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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릴라칼럼은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들이 쓰는 칼럼입니다. [편집자말]
채웅석 카톨릭대 교수와 하일식 연세대 교수, 정연태 카톨릭대 교수, 홍순민 명지대 교수가 4일 오전 서울 종로구 참여연대 느티나무홀에서 국정원의 대선개입을 규탄하며 시국선언을 하고 있다.
이날 전국의 역사학자 225명은 시국선언 발표를 통해 국가 기관에 의한 국기문란 행위가 재발하지 않도록 법적, 제도적 개혁 및 보완책 마련과 박근혜 대통령의 책임있는 입장 표명을 촉구했다.
▲ 역사학자, 국정원 사태 시국선언 채웅석 카톨릭대 교수와 하일식 연세대 교수, 정연태 카톨릭대 교수, 홍순민 명지대 교수가 4일 오전 서울 종로구 참여연대 느티나무홀에서 국정원의 대선개입을 규탄하며 시국선언을 하고 있다. 이날 전국의 역사학자 225명은 시국선언 발표를 통해 국가 기관에 의한 국기문란 행위가 재발하지 않도록 법적, 제도적 개혁 및 보완책 마련과 박근혜 대통령의 책임있는 입장 표명을 촉구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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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원 불법 대선 개입 사건과 관련 각계각층의 시국선언이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지난 4일에는 전국 역사학자 225명의 시국선언이 있었다.(13일 기준 281명) 이 시국선언문은 일종의 '격문(檄文)' 형식으로 작성되었다. 이는 그 만큼 역사학자들이 현재 상황을 매우 심각하게 바라보고 있음을 의미한다. 격문이라 함은 본디 어떤 일을 여러 사람에게 알리어 부추길 때, 어떤 일을 급히 사람들에게 알리려고 할 때 작성하는 글이기 때문이다.

도대체 무엇이 그들을 그리 긴박하게 만들었을까? 상아탑에서 조용히 책과 씨름하던 이들이 굳이 자신의 이름까지 걸어가며 국민들에게 말하려는 내용은 무엇이었을까?

혹자들은 수많은 이들이 시국선언을 하고 있는 지금의 형국에서 전국의 역사학자들이 모여 시국선언을 한 게 뭘 그리 호들갑이냐고 핀잔을 주기도 한다. 심지어 고등학생까지 나서서 시국선언을 하고 있는 마당에 교수가 시국선언을 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그거야말로 지식인으로서의 책임 방기 아니냐고 되묻기도 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역사학자들의 시국선언은 여타 그것들과 비교하여 또 다른 의미를 지닐 수밖에 없다. 그들이 바로 역사를 전문적으로 공부하는 역사학자들이기 때문이다. 최대한 정쟁과 거리를 둔 채 당대의 인물과 사건들을 조금 더 거시적으로, 역사적으로 판단하는 일을 업으로 하는 사람들이 바라보는 관점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따라서 우리는 그들의 시국선언을 좀 더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현실이 과거의 역사와 절대 무관하지 않음을 인식한다면, 역사적으로 현 시국을 평가하는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어야 한다. 어쨌든 그들은 작금의 사태를 대한민국 이전시대 때부터 우리 공동체가 가지고 있던 가치와 연결시켜 고민할 것이며, 무엇이 문제인지 지적할 것이기 때문이다.

과연 그들이 바라보는 현 시국의 문제는 무엇일까?

역사학자들이 시국선언에 나선 이유

역사학자들 시국선언의 가장 특이한 부분은 거기에 NLL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는 점이다. 물론 국정원의 NLL 관련 2007년 남북정상회담회의록 공개가 국정원의 대선개입 관련 책임추궁에 대한 물타기일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에 그렇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위 사항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그리고 그들이 NLL의 연원을 역사적으로 고증할 수 있음을 감안한다면 시국선언에서 NLL 문제점이 언급되지 않은 것은 특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대신 그들은 MB정권과 현 정권의 범죄 가능성에 주목했다. 국정원이 국정원법·선거법을 어기며 정치 공작에 몰두한 사실과 최고급 국가기밀을 왜곡 편집하여 새누리당에 제공한 것, 그리고 새누리당이 왜곡된 자료를 선거에 활용하여 국민을 선동한 행위에 엄중한 책임을 묻고 있다.

특히 역사학자들이 가장 분개하는 부분은 국정원의 대선개입이라는 1차 범죄를 덮기 위해 국가적 불이익이 예상됨에도, 국제외교의 관례를 무시한 채 2007년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전문을 공개한 사실이다. 그것은 대통령기록물에 관한 법을 어긴 2차 범죄일 뿐만 아니라 우리 공동체가 역사적으로 축적해 온 전통과 지혜, 그리고 교훈을 무시한 처사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기록문화 만큼은 아주 오래 전부터 우리 문명이 전 세계에 내세울만한 유산 아니던가.

"조선시대에 사관(史官)이 작성한 사초(史草)는 그 누구도 보지 못했고, 내용을 발설하거나 변조하면 엄벌했습니다. 조선 세종은 태종실록을 열람하려다가 끝내 그만두었습니다. 군주는 자신의 언행이 기록됨을 의식하여 행실을 삼가하고, 사실을 기록하는 자가 불이익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야 올바른 역사기록이 남는다는 원칙 때문입니다. 세종의 처신은 이후 국왕이 실록을 보지 못하는 조선의 전통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물론 연산군처럼 사초를 농단하여 무오사화·갑자사화를 잇달아 일으키고 비행을 일삼다가 권좌에서 쫓겨나 역설적 교훈이 된 경우도 있기는 합니다."

사실 역사학자들이 이번 사태에 경악을 금치 못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현재 집권세력의 역사에 대한 인식이 전반적인 국가 기록물 관련 법률들을 정비했던 김대중·노무현 정부와 비교하여 너무나도 저열하기 때문이다.

여야가 전날 2007년 남북정상회담 관련 자료 2차 예비열람을 마쳤지만 회의록 원본의 존재를 확인하지 못한 것과 관련, 민주당 전병헌 원내대표는 18일 고위정책회의에서 "노무현 정부가 이 기록물을 삭제 또는 폐기했을 가능성은 전무하다"고 말했다. 전 원내대표 방에 김대중 대통령과 노무현 전 대통령의 사진이 나란히 걸려 있다.
 여야가 전날 2007년 남북정상회담 관련 자료 2차 예비열람을 마쳤지만 회의록 원본의 존재를 확인하지 못한 것과 관련, 민주당 전병헌 원내대표는 18일 고위정책회의에서 "노무현 정부가 이 기록물을 삭제 또는 폐기했을 가능성은 전무하다"고 말했다. 전 원내대표 방에 김대중 대통령과 노무현 전 대통령의 사진이 나란히 걸려 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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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정부 당시 법률 제정에 참여했던 교수들의 증언을 들어보면 이는 더 명확해진다. 당시 노무현 전 대통령은 국가기록물 관련 법률을 제정하기 위해 역사학자들과 기록전문가들, 고위 관료들을 초청하여 2시간 가까이 난상토론을 벌이고 절충했다고 한다. 기록이야말로 공무원들의 뇌물과 비리를 막을 수 있는 근원적인 장치이고, 후임 대통령이 전임자의 경험을 참고할 수 있는 자료라는 것이 노 대통령의 생각이었는데, 참여한 교수들 역시 그 토론을 통해 기록물의 역사적 중요성을 통감했다는 것이다. 덕분에 참여정부도 학자들의 조언을 받아 조선시대의 기록물 관련 관행들을 심도 있게 검토했다고 한다.

반면 현재 집권 세력들은 어떠한가. 작금의 사태에서도 볼 수 있듯이 그들의 역사에 대한 인식은 조선시대만도 못하다. 기록은커녕 무엇을 기록하고 보관해야하는 지도 모르는 수준이다. 오로지 권력을 잡기 위해 보존기간이 엄연히 법률로 제정되어 있는 기록물을 마음대로 이용하고 왜곡하고 있다. 조선시대에도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21세기 대한민국에서 버젓이 자행되고 있는 셈이다.

2008년, 노무현 전 대통령이 회고록을 쓰겠다고 법제처 유권해석까지 받아서 대통령기록물 사본을 봉하마을로 가지고 갔을 때, 온갖 말도 되지 않는 핑계를 달아 전 대통령을 압박하여 결국 굴복을 받아냈던 그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결코 그 기록물이 아니었다. 보수언론을 통해 전 대통령의 불법 이미지를 확산시키는 것이 중요했으며, 이를 통해 노무현으로 상징되는 정치세력에 흠집을 내고자 했다.

결국 역사학자들의 시국선언은 이와 같은 몰역사성에 대한 공포에서 비롯됐다고 볼 수 있다. 역사를 무서워하지 않는 이들에게서 느끼는 절망감과 그들에게 이 시대를 맡길 수 없다는 절박함이 그들을 상아탑 밖으로 불러낸 것이다.

이제 더 이상 NLL은 중요하지 않다. 그것은 이미 우리가 목도하고 있듯이 해석주체에 따라, 보수언론의 도움만 있다면 언제든지 정쟁의 하나로 전락할 수 있다. 초등학교 수준의 해석능력을 보이더라도 힘만 있으면 그것이 진실이 되어버리는 현실을 우리 사회는 지금까지 용인해 오지 않았던가.

지난 5년 동안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국가기록원 관계자들이 18일 오후 국회 운영위 소회의실에 마련된 2007년 남북정상회담 자료 열람실 금고에 관련 자료가 담긴 박스를 옮겨 싣고 있다.
 국가기록원 관계자들이 18일 오후 국회 운영위 소회의실에 마련된 2007년 남북정상회담 자료 열람실 금고에 관련 자료가 담긴 박스를 옮겨 싣고 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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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대다수 국회의원들이 동의한 결과 여야는 국가기록원에 보관되어 있는 2007년 남북정상회담회의록의 원본을 열람하고자 했는데, 18일 국가기록원은 그 자료가 없다고 공식적으로 밝혔다.

사라진 2007년 남북정상회담 대화록과 관련, 박경국 국가기록원장은 18일 국회에 출석해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재가를 거쳐 넘겨받은 자료 목록에 대화록이 없었다"고 밝혔다. 반면 참여정부 당시 대통령기록관 초대관장을 지낸 임상경 전 기록관리비서관은 언론인터뷰를 통해 "지정서고 목록은 종이문서 목록을 얘기하는 것"이라면서 "정상회담 대화록은 이지원을 통해 전자문서로 이관됐고, 이에 따라 대화록이 지정서고 목록에 없는 것은 당연한 얘기"라고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 도대체 지난 5년 동안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조중동은 19일자 신문에서 일제히 노무현 대통령 측에서 기록물을 폐기했다는 쪽에 무게를 실어 보도했지만 그걸 그대로 믿기는 어렵다. 

많은 국민들이 다시 촛불을 들기 시작한 이유는 이번 국정원 사태가 민주주의를 후퇴시킨 결정적인 근거로 받아들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텅 비어버린 국가기록원의 문제는 국정원 사태를 뛰어 넘는 더 심각함이 숨어 있다는 걸 인식시켰다. 민주주의의 문제를 떠나 과연 현재 집권세력이 국가를 운영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그들이 역사적으로 이 시대를 책임질 수 있는 역량을 가지고 있는지 심각한 의문이 제기되기 때문이다.


태그:#시국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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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사회학, 북한학을 전공한 사회학도입니다. 물류와 사회적경제 분야에서 일을 했었고, 2022년 강동구의회 의원이 되었습니다. 일상의 정치, 정치의 일상화를 꿈꾸는 17년차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서, 더 나은 사회를 위하여 제가 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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