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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비틀거리는 날이면>
 <꽃, 비틀거리는 날이면>
ⓒ 책이있는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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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시(詩)를 그리 즐겨 읽는 편이 아니다. 그럼에도 책장에 오래오래 꽂아두고 출간의 의미와 가치를 이따금 떠올려보고 싶도록 의미 있는 시집이 출간됐다.

<꽃, 비틀거리는 날이면>(책이있는마을 펴냄)이 그 책. 올해로 서거 4주기를 보낸 고 노무현(1946.9.1~ 2009. 5.23) 전 대통령을 추모하는 시집인데, 일반적인 시집들과 여러 부분 의미가 남다른 그런 시집이기 때문이다.

단지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을 추모하는 그런 시집이라면 크게 남다르지 않을 것이다. 누군가를 추모하는 책들은 그간 얼마든지 나왔고,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나올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노무현 마지막 인터뷰>, <10명의 사람이 노무현을 말하다>, <노무현 평전>(김삼웅), <바람이 불면 당신인줄 알겠습니다> 등,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을 기리고 추모하는 책들은 그간 사상유례없다할 정도로 많이 나왔고, 그리고 (아마도) 앞으로도 계속 나올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시집이 왜 특별한가. 우선 이 책은 취지가 남다르다. 4년 전 고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당시 그를 추모했던 '500만의 분노와 눈물을 어떤 형태로든 다듬어진 형식으로 남겨야겠다'는 고민으로부터 시작된 책이기 때문이다.

거문고 별자리 그날 이후 보이지 않았다
하루 치 분량 먼지가 무표정하게 않은 날
한 통의 편지 당신이 떠난 후 쓴다
당신과 우리 사이에 남아 있는 인연에 대해
어쩜, 이 편지는 먼 훗날에나 읽을지 모른다
드문드문 소등을 준비하는 새벽 어스름
삐걱 거리던 낡은 의자에 않아 저승과 이승
오가는 길 없을까 생각한 적 있었다
당신도 그날, 저승과 이승 수없이 오갔으리라
처음 사랑할 때 뜨겁게 달궈진 심장
쿵 내려 않아 터진 아침
누구도 밥 한 수저
목으로 넘길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당신만은 얼어붙은 겨울 강 온전히 건너길 바랐다
볕 드는 양달의 가슴을 모질게 쪼아대던
무지한 사람과 사람 몸에 박힌 가시
묵정밭의 몹쓸 돌을 골라내길 바라던 무수한 기원
그 담장에 산수유 꽃 다시 핀 봄이다
검은 리본 주둥이를 문질러 버리고 싶은
환장하게 좋은 날, 비.틀.거.리.는 봄이다

- 박미림의 '꽃, 비틀거리는 날이면' 전문

그런데 이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시집에 참여한 사람들 역시 특별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시깨나 읽었을 사람들은 시들을 만나며 고개를 좀 갸우뚱거릴지도 모르겠다. 도종환이나 안도현, 김정란, 박미림 등처럼 시인으로 유명한 사람들의 시도 섞여 있지만, 명계남이나 유시민, 이창동(감독) 등처럼 시보다는 그간 해온 활동들이 우선 떠오르는 사람들이나 아마도 시인으로는 전혀 낯선 사람들의 시가 꽤나 많이 섞여 있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꽃, 비틀거리는 날이면> 이 시집에 수록된 시는 모두 121편. 이중 시인 혹은 작가로 등단한 사람들의 시는 47편이고 그 나머지인 74편은 고등학생과 주부, 사무직, 생산직 노동자, 전문직 등 다양한 계층의 다양한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쓴 시다. 오로지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을 좋아하고 그의 죽음을 애달파하는 마음으로 참여한.

여기까지만 해도 여느 시집들과 다를 수밖에 없는데, 이것으로 그치지 않고 시집은 더 큰 의미와 감동을 준다. 이제까지 여러 사람의 글이나 시를 모아 엮은 책에서 으레 볼 수 있었던 글쓴이의 약력이나 활동, 작품 등이 포함된 프로필을 전혀 넣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일부 시를 거론하며 그에 대해 이야기하는 형식의 평론, 즉 일반적인 시집에서 볼 수 있는 형식적인 평론까지 없다. 그러니까 그가 어떤 위치에 있는 어떤 사람이건 상관없이 평등하게 누군가의 죽음을 애도하는 그 마음만을 우선한 것이다.

아마도 특권층 혹은 기득권을 거부한 고인의 뜻에 맞지 않는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리라.

이천구년 오월 이십삼일/무정란 품은 희망이 부서지던 그날/그 바람은 방부제였다(15쪽)

서리 내라고 하늘에 별이 하나도 없던 날 당신은 눈물을 흘렸지만, 이젠 울지말아요, 내가 달이든 별이든 햇살이든 죄다 당신 가슴 속에 모아놓은 거니까(16쪽) 

그러나 문득/ 당신이 심은 벼가 고개를 숙이고 여전히 우리의 삶에 바탕이 됨을 알았을 때/ 당신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느꼈다(65쪽) 

그 해 오월은 유난히 지천으로 개나리꽃이 만발했다/그 날 이후 해마다 봄이 오면/꼭 한번은 가슴 뭉클한 속병을 앓아야만 했다(115쪽)
(기자 주: 몇몇 시(詩)의 일부만을 인용한 것이다)

이런지라 시 한편 한편을 읽노라면 시를 쓴 그 누군가가 어쩌면 고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당시 같은 공간에서 함께 슬퍼하고 울었을, 그리고 같은 마음으로 촛불을 밝혔을 그 누군가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는 동질감? 동지애? 이런 감정까지 들기도 한다. 그간 어떤 시집에서 이런 감정을 느꼈을까 기억이 뚜렷하지 않다.

여기까지 쓰는 동안 밀짚모자를 쓰고 환하게 웃던 고인의 모습이, 시집 속의 꾸밈없이 순박한 시들과 너무나 닮은 고인의 모습이 떠오른다. 동시대를 함께 살고 있다는 자랑그러움과 함께 좀 더 오래오래 보고 싶었던 그 모습이 말이다. 2년 전 20대가 된 내 아들과 내년에 20대가 될 우리 아이들이 많은 영향을 받길 바랐던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말이다.

<꽃, 비틀거리는 날이면>은 이처럼 특별한 의미의 시집이다.

시대를 앞질러간 노무현. 그는 우리 시대의 비극인 동시에 희망이기도 하다. 상고 출신이 대통령이 될 수 있다는 것은, 대학을 나오지 않아도 성공할 수 있다는 사례는 여전히 망국적 입시제도로 신음하는 대다수 한국인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상식과 원칙을 지향하는 사회는 아직도 우리에게 해결이 난망한 과제이지만 또 고질적인 지역주의를 극복하고자 했던 통합의 정치는 지금도 현실정치에서 외면 받고 있지만 언젠가 우리가 이루어야 할 목표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시간은 걸리겠지만 우리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을 것이다. "강물은 바다를 포기하지 않는다"는 그의 신념이 옳다고 믿기 때문이다. 우리는 강물처럼 '사람 사는 세상'이 온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을 것이다. 정치의식의 지평이 바뀌고 그의 역사관을 뒤늦게 깨닫기 시작할 때 이 시대가 그의 죽음이 주는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리라는 희망을…. - <꽃, 비틀거리는 날이면> 발간사에서

덧붙이는 글 | <꽃, 비틀거리는 날이면>| 박미림, 도종환, 안도현 포함 121인|책이있는마을 | 2013-05-10 | 정가 12,000원



꽃, 비틀거리는 날이면 -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4주기를 맞아 대한민국 시인들이 보내는 5월의 시!

안도현.도종환.이창동.유시민.명계남 외 지음, 책이있는마을(2013)


태그:#노무현, #노무현 재단, #박미림, #서거 4주기, #추모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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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제게 닿아있는 '끈' 덕분에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책동네' 기사를 주로 쓰고 있습니다. 여러 분야의 책을 읽지만, '동·식물 및 자연, 역사' 관련 책들은 특히 더 좋아합니다. 책과 함께 할 수 있는 오늘,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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