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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참 행복한 '사람'이다. 그를 사랑하는 시인 47명과 시민 74명이 시를 바쳤다. '그'는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이다. 아직도 많은 이들이 노무현이란 이름 앞에서 '고'자가 없기를 바란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그가 봉하마을에 있으면 좋겠다.

사랑한다고 소리쳐 볼 것을/ 아무 책이나 종이나 옷이라도 벗어들고/ 사람 사는 세상 노무현이라고 사인해 달라고 조를 것을// 당신이 보고 싶습니다/ 지금도 봉하마을에 당신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 <꽃, 비틀거리는 날이면> 중 <사랑하는 당신>

지난 2009년 5월 29일 그가 봉하마을을 떠날 때 차를 붙잡고 물끄러미 바라봤던 영화배우 명계남씨가 쓴 <사랑하는 당신>이다. 한 나라 대통령을 지낸 이지만 "존경합니다"가 아니라 "사랑합니다", "보고싶습니다"라는 말이 더 어울리는 노무현. 그는 '대통령'보다 '사람'이 더 울린 이였다.

꽃 비틀거리는 날이면
 꽃 비틀거리는 날이면
ⓒ 책이있는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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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흙으로 돌아간 지 4주기를 맞아 만든 <꽃, 비틀거리는 날이면>(책이있는마을)은  '사람 사는 세상'을 갈망하며 통곡하는 심정으로 그를 기리는 이들이 만든 "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세운 작은 시비(詩碑)"다.

시집은 1부 '강물처럼', 2부 '삶과 죽음이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 3부 '야, 기분 좋다'로 구성됐다.

노무현재단은 "인간 노무현의 가치, 정치인 노무현에 대한 회고, 고인에 대한 사랑, 바보 노무현에 대한 추억과 그리움, 아픔, 미안함 등 다하지 못한 노무현을 향한 마음을 때론 넓게, 때론 깊숙이 투영하고 있다"고 말한다.

"죽어도 사랑했었다는 말은 하지 않으리"

나중에 다시 태어나면/ 나 자전거가 되리/ 한평생 왼쪽과 오른쪽 어느 한쪽으로 기우뚱거리지 않고/ 말랑말랑한 맨발로 땅을 만져보리/ 구부러진 길은 반듯하게 펴고, 반듯한 길은 구부리기도 하면서 / 이 세상의 모든 모퉁이, 움푹 패인 구덩이, 모난 돌멩이들/ 내 두 바퀴에 감아 기억하리/ 가위가 광목 천 가르듯이 바람을 가르겠지만/ 바람을 찢어발기진 않으리

나 어느 날은 구름이 머문 곳의 주소를 물으러 가고/ 또 어느 날은 잃어버린 달의 반지를 찾으러 가기도 하리/ 페달을 밟는 발바닥은 촉촉해지고 발목은 굵어지고/ 종아리는 딴딴해지리/ 게을러지고 싶으면 체인을 몰래 스르르 풀고/ 페달을 헛돌게도 하리/ 굴러가는 시간보다 담벼락에 어깨를 기대고/ 바큇살로 햇살이나 하릴없이 돌리는 날이 많을수록 좋으리/ 그러다가 천천히 언덕 위 옛 애인의 집도 찾아가리

언덕이 가팔라 삼십 년이 더 걸렸다고 농을 쳐도 그녀는 웃으리/ 돌아가는 내리막길에서는 뒷짐 지고 휘파람을 휘휘 불리/ 죽어도 사랑했었다는 말은 하지 않으리/ 나중에 다시 태어나면 - 안도현 <나중에 다시 태어나면>

"죽어도 사랑했었다는 말은 하지 않으리"라는 역설이다. 그를 죽어도 사랑했기에 이런 말을 할 수 있으리라. 아니 "죽어도 사랑했었다는 말을 하지 않으리"라고 할지라도 그가 지금 살아있다면 하고 싶은 말이다.

"환장하게 좋은 날, 비.틀.거.리.는 봄이다"

거문고 별자리 그날 이후 보이지 않는다/ 하루 치 분량 먼지가 무표정하게 앉은 날/ 한 통의 편지 당신이 떠난 후 쓴다/ 당신과 우리 사이에 남아 있는 인연에 대해/ 어쩜, 이 편지는 먼 훗날에나 읽을지도 모른다/ 드문드문 소등을 준비하는 새벽 어스름/ 삐걱거리던 낡은 의자에 앉아 저승과 이승/ 오가는 길 없을까 생각한 적 있었다

당신도 그날, 저승과 이승 수없이 오갔으리라/ 처음 사랑할 때 뜨겁게 달궈진 심장/ 쿵 내려앉아 터진 아침/ 누구도 밥 한 수저/ 목으로 넘길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당신만은 얼어붙은 겨울 강 온전히 건너길 바랐다/ 볕 드는 양달의 가슴을 모질게 쪼아대던/ 무지한 사람과 사람 몸에 박힌 가시/ 묵정밭의 몹쓸 돌을 골라내길 바라던 무수한 기원/ 그 담장에 산수유 꽃 다시 핀 봄이다/ 검은 리본 주둥이를 문질러버리고 싶은/ 환장하게 좋은 날, 비.틀.거.리.는 봄이다 - 박미림 <꽃, 비틀거리는 날이면>

'환장'(換腸)은 "마음이 정상적인 상태를 벗어나 뒤집히다", "마음이나 행동 따위가 정상적인 상태를 벗어나 제정신이 아닌 듯한 상태로 됨"이라는 뜻이다. 그가 몸을 던졌던 '그날' 나 역시 마음이 정상이 아니었고, 제정신이 아니었다. 봄은 환장하게 좋지만, 우리는 비틀거리고 있다. 아직도 우리는 그날을 잊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나는 이제 울지 않는다"

"그는 새벽에 집을 나섰다/ 산으로 올라가기 전에/ 그는 길가에 나 있는 작은 띠풀 한잎을 본다/ 그는 무릎을 꿇고 앉아 띠풀을 조용히 잡아 당겼다/ 텅, 깊은 세상의 문이 열렸다/ 그는 가버렸다/ 멀리, 단 한 순간에/ 띠풀 위에 그의 영혼이 내려 앉았다/ 흰 벌 꽃 한송이/ 눈 밝은 이들 눈에만 보이는 작은 꽃/ 한 송이/ 해마다 그 길가에 피어난다/ 그가 마지막 마음을 내려놓은/ 작은 잎사귀 위에/ 나는 이제 울지 않는다/ 나는 띠풀 위에 피어나는/ 흰 벌꽃 한 송이를 깊이 명상한다 - 김정란 <작은 띠풀 한 잎>

이제 울지 않는다. 그가 마지막 마음을 내려놓은 작은 잎사귀 위에, 띠풀 위에 흰 벌꽃이 피었기 때문이다. 죽음을 기리는 것이 아니라 이제 생명을 말할 때다. 생명을 탄식과 절망이 아닌, 희망이다. 죽음을 기리고, 희망을 노래하는 곳에 막걸리 한 잔 어떨까?

"주인의 입술에 개나리가 피었다"


스마트폰 지도에도 없는 술집에서/ 청와대 만찬주로 사용했다는/ 막걸리를 주문하고 나니/ 노란주전자에 노란술잔이 함께 나왔다/ 파전 굽는 소리를 들으며/ 노란무가 있으면 달라고 했다/ 술잔 크기만큼 웃는/ 주인의 입술에 개나리가 피었다. - 강승환 <그날, 막걸리를 시켰다>

노무현은 막걸리를 좋아했을까? 청와대에서 만찬주로 막걸리를 사용했다니? 내 직업이 목사이지만, 장모님에게 가면 막걸리 한 잔을 마신다. 그분이 만드는 막걸리는 최고 맛이다. 살아계셨다면 장모님이 빚은 막걸리 한 잔을 대접하고 싶다. 고추전도 잘 부친다. 장모님인 빚은 막걸리와 부친 고추전을 보고 그가 함박웃음을 짓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입술에 "개나리가 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흙으로 갔다. 그러니 더 그립다. 노혜경은 그리워하는 죄가 너무 깊다고 한다.

"그리워하는 죄가 너무 깊어"

천둥벼락에 잠이 깨어 그리운 당신을 생각합니다/ 어디에 있나요 내 목소리 들리나요/ 그쪽 하늘에도 통곡처럼 비 쏟아지고 모처럼 장만한 새신발이 젖고 있나요/ 이렇게 비 내리면/ 당신에게로 건너갈 외나무 다리 떠 내려가고/ 강물이 속상해하며 깊어져 울며불며 흐러갑니다(중략) 어디로 가나요 내 목소리 들리나/ 그립지 않아야 할 당신을/ 그리워하는 죄가 너무 깊어 - 노혜경 <그리운 당신>

"그립지 말아야 할 당신을 그리워하는 죄가 너무 깊어"라는 말에 다시 눈시울이 붉어진다. 사내가 울지 말아야 하는데. 하지만 울자. 다시 한 번 울자. 하지만 이 울음을 절망과 탄식, 원망과 분노가 아니라.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바랐던 그의 꿈을 이루기 위한 희망의 울음이다. 노무현은 살았을 적에 "강물은 바다를 포기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 포기하지 말자.

덧붙이는 글 | <꽃 비틀거리는 날이면> 박미림 , 안도현 , 도종환 , 이창동 , 유시민 지음 ㅣ 책이있는마을 ㅣ 12000원



꽃, 비틀거리는 날이면 -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4주기를 맞아 대한민국 시인들이 보내는 5월의 시!

안도현.도종환.이창동.유시민.명계남 외 지음, 책이있는마을(2013)


태그:#노무현, #노무현재단, #헌정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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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태어날 때 당신은 울었고, 세상은 기뻐했다. 당신이 죽을 때 세상은 울고 당신은 기쁘게 눈감을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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