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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태 대법원장을 비롯한 역대 대법원장과 법원행정처는 국민은 물론 재판당사자들과의 '소통'을 강조하며 주문하고 있으나 일선 판사의 생각은 좀 달라 괴리감이 커 보인다. 한 마디로 '엇박자' 모양새다. 창원지법 이정렬 부장판사가 밝힌 일선 판사들의 생각을 보면 충격이다.

 

재판을 담당하는 판사들은 '소통'하고 싶어도 그렇게 할 수 없는 재판 현실을 꼽는다. 대법원장과 법원행정처는 외형상으로는 '소통'을 주문하나, 사실 빠르고 많은 사건처리가 전제돼 있는 것을 원하는데, 판사들이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기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법정에서 재판당사자의 아픔과 하소연 등 얘기를 꼼꼼히 들으며 '소통'하다보면, 사건처리 속도가 느려져 결국은 사건이 적체되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판사 입장에서 '소통하는 재판'을 하기 어렵다는 푸념이자 지적이다.

 

왜냐하면 대법원장과 법원행정처의 '소통' 주문 말만을 믿고, 소통하는 재판을 하다가는 사건처리율이 낮아질 수밖에 없고, 그러면 판사 재임용 연임심사에서 근무평정에 고스란히 반영돼 결국 재임용이 위태로워질 수밖에 없다는 이유에서다.

 

거기에는 현재 진보정의당 국회의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서기호 전 서울북부지법 판사의 사건이 판사들에게 큰 충격으로 자리하고 있다. 서기호 판사는 법원공무원들 사이에서 소통하는 판사로 잘 알려져 있었는데, 대법원은 작년 2월 서 판사가 근무성적이 불량하다는 이유로 연임심사에서 탈락시킨 전례가 있기 때문이다. 당시 전국 법원의 평판사들은 잇따라 '판사회의'를 소집해 근무평정제도를 개선할 것을 요구했고, 대법원도 이를 수용했었다.

 

이쯤에서 창원지법 이정렬 부장판사가 전한 일선 판사들의 분위기를 들어보자. 이 부장판사는 25일 페이스북에 아래의 글을 올렸다. 그는 트위터에도 "지난 주 있었던 제가 충격 받은 이야기입니다"라며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링크했다. 다음은 전문을 그대로 실었다.

 

지난주에는 선·후배 동료 판사들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수차례 있었습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많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대화의 일부를 기억나는 대로 말씀드립니다.

 

판사들 : 대법원장과 법원행정처가 최근에 계속 소통을 강조하고 있는데, 그 의중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 법정에서, 재판과정에서, 재판당사자와의 폭넓은 대화와 이해를 통해 그분들의 아픔을 치유하는 것이 진정한 소통 아니겠는가? 그런데, 대법원장과 법원행정처의 의중을 알 필요가 무엇인가?

판사들 : 재판당사자와 폭넓은 대화와 이해를 통해 그분들의 아픔을 치유해야 한다는 데는 공감한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사건처리속도가 느려지고 사건이 적체된다.

: 충실한 재판을 하려면 시간이 필요하고, 그러면 사건처리속도가 느려지는 것은 어쩔 수 없지 않나? 사건처리를 많이 하려고 재판을 졸속으로 할 수는 없지 않나?

 

판사들 : 순진한 소리 하지 마라. 서기호를 봐라. 올바른 재판을 하려는 판사를 사건처리 숫자가 적다는 모함을 씌워서 재임용 탈락시키지 않았느냐. 소통도 좋고 좋은 재판도 좋지만, 결국 대법원장과 법원행정처가 요구하는 것은 빠르고 많은 사건처리 아니겠느냐?

: 설마 소통을 강조하시는 대법원장님께서 그럴 리야 있겠나?

판사들 : 속으면 안 된다. 대법원장과 법원행정처의 정확한 의중을 알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서기호와 같은 사태가 또 생긴다. 대법원장이 아무리 소통을 강조해도 지금 일선 판사들은 그 말을 믿지 않는다. 소통하는 재판을 한다고 해도 그건 숫자로 드러나지 않는다. 그럼 서기호처럼 재임용 때 트집을 잡힐 수 있다. 사건 처리 많이 해서 어떻게든 재임용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들을 하고 있다. 소통은 무슨...

: ...

 

판사들 : 이 부장님(저를 가리킵니다)도 정신 차려라. 당사자를 위한 재판을 하다가는 이 부장님이 제2의 서기호가 될 것이다. 이유 불문하고 사건처리를 많이 하는데 신경 써라.

: 나는 그렇게는 못하겠다. 그렇게 해서 재임용 받은들 얼마나 떳떳하겠나. 차라리 재임용 탈락하더라도 재판다운 재판을 해 보았다는 보람과 뿌듯함을 가지는 것이 낫지.

판사들 : 순진하기는...

 

대한민국 판사들이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요? 누가, 왜 이렇게 만들었을까요? 참담합니다. 이걸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이정렬 부장판사는 이렇게 일선 판사들의 분위기를 전하며 씁쓸해했다. 이 글에는 최강욱 변호사, 이재정 변호사 등 수백 명의 페이스북 친구들이 '좋아요' 버튼을 누르며 공감을 표시했고, 또한 이 부장판사는 지지하고 응원한다는 수십 개의 댓글이 이어지고 있다.

 

법정에서 뿐만 아니라 트위터와 페이스북을 통해 국민들과 소통하는 이정렬 부장판사는 자신의 트위터에 '실적이 아닌 사람을 위한 재판'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실제로 이정렬 부장판사는 2012년 8월 27일부터 2013년 2월 22일까지 창원지법 가사4단독 재판장을 맡으며 약 6개월 동안 642건의 사건을 처리했는데, 당사자가 불복해 항고한 건수가 하나도 없어 당사자 승복률 100%라는 진기록을 세워 화제가 됐다.

 


그 때문에 양승태 대법원장과 법원행정처가 이 부장판사의 글을 보게 된다면 당장 일선 판사들과의 소통부터 시작해야 할 것 같다. 이 부장판사의 글에서 제시됐듯이 일선 판사들이 대법원장의 말을 믿지 못하는 이유부터 들어보고, 일선 판사들이 대법원장과 법원행정처의 말을 믿고 '소통하는 재판'을 할 수 있는 '안전장치'를 약속한 다음에야 비로소 소통을 주문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일단 대법원으로서는 '소통하는 재판'을 위해서는 판사들의 과중한 업무 부담을 덜어 주는 방안부터 심도 있게 모색해야 한다. 왜냐하면 2011년 4월 기준으로 판사 정원은 2844명인데, 당시 현원 판사는 2556명. 정원에서 288명이나 부족한 셈이다. 2011년 판사 결원율이 10%정도 된다는 얘기다. 결원 판사가 처리해야 할 사건마저 다른 판사들이 분담해 처리해야 하는 상황이기 때문에 판사들은 수북이 쌓여있는 재판서류에 몸살을 앓고 있다. 이런 현실에 '소통'만을 주문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에다 판사들이 재임용 심사의 기준인 근무평정에 크게 반영되는 사건처리율에 대한 부담을 덜어주는 약속도 전제돼야 '소통하는 재판'이 실현될 것으로 보인다. 물론 대법원으로서는 사건처리 건수도 중요한 수치다. 하지만 소통을 주문하려면 판사들이 믿고 따를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해 주는 게 선행돼야 한다.

 

예를 들어 사건처리율뿐만 아니라 재판당사자들의 재판 승복도와 만족도를 근무평정에 반영하는 방안을 고려해 보기를 대법원에 제시해 본다. 재판이 끝난 뒤 사건의 항소ㆍ항고 등 상소율을 따져 승복도를 근무평정에 반영하는 것이다. 또한 현재 법정모니터링을 강화하고 있는 만큼 직접 설문을 통해 재판당사자들로부터 만족도를 조사해 보면 판사들이 얼마나 '소통하는 재판'을 하는지 쉽게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재판 승복도와 만족도를, 사건처리건수보다 근무평정에 더 큰 비중으로 삼는다면, 굳이 대법원장과 법원행정처에서 '소통하는 재판'을 강조하거나 주문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구현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왜냐하면 일선 판사들 입장에서도 사건처리건수에 급급하기보다는, 당사자들의 사연과 애환을 충분히 들어 그들이 승복하고 만족시켜 주는 재판을 함으로써 판사로서도 뿌듯하고, 그럼으로써 존경받는 판사가 되기를 원하고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서울지방변호사회 소속 회원 변호사들이 평가한 <2011년 법관평가 결과 우수 사례>를 보면 이해가 쉬울 것 같아 소개한다.

 

▶ 재판장이 소송관계인에게 정중하고 친절하게 대했고, 충분한 변론과 진술을 허락해 재판결과 피고인은 법정구속 됐지만, 절차진행만큼은 모범적으로 됐다는 평가를 받았다.

 

▶ 재판장이 피고인에게 충분한 진술기회를 부여하고, 충고와 훈계의 말을 적절히 해 재판 종료 후 피고인이 감사의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 재판장이 성폭력사건에서 무고혐의로 기소된 피고인이 수치스러울까 방청객을 나가게 하는 등 피고인을 배려해 주었고, 변호인의 의견을 끝까지 경청해 줬으며, 인자하고 훌륭한 재판장 덕분에 어려운 사건이지만 힘들지 않았다는 의견도 있었다.

 

▶ 재판장이 형사사건에서 피고인을 대하는 태도가 정중했고, 피고인의 비법률적이고 비논리적인 주장도 진지하게 들어줬으며, 절차진행에 있어서도 피고인의 의견을 적극 반영하면서 방어권 보장을 위해 충분한 조치를 취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는 평가도 나왔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법률전문 인터넷신문 [로이슈](www.lawissue.co.kr)에도 실렸습니다.


태그:#이정렬, #대법원장, #소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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