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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백남준이 1963년 독일 부퍼탈에서 첫 전시를 열고, 비디오 아트를 탄생시킨 지 50주년이 되는 해다. 백남준의 전문가와 관련자 인터뷰에 이어 그의 생애와 예술에 대해 어린 시절부터 연대별로 나눠 소개하고자 한다. - 기자 말

백남준 I '7월 20일' 1985. 자신의 생일과 관련된 큰 사건을 주제로 한 작품. 물음표에서 반전된 물음표를 빼면 무한대가 된다는 표시가 재미있다
 백남준 I '7월 20일' 1985. 자신의 생일과 관련된 큰 사건을 주제로 한 작품. 물음표에서 반전된 물음표를 빼면 무한대가 된다는 표시가 재미있다
ⓒ 김형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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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은 일제식민시대인 1932년 7월 20일 서울 종로구 서린동 45번지에서 3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백남준은 자신의 생일에 일어난 세기적 사건, 예컨대 1929년 케네디 미 대통령 부인 재클린 여사 탄생, 1944년 히틀러 암살 시도, 1969년 미국 우주비행사의 달 착륙 등을 재치 있게 작품화했다.

백남준 집안은 한국에 캐딜락이 두 대밖에 없는 시절 캐딜락이 한 대 있을 정도로 큰 부자였다. 어려서 산 창신동 집 대문이 커다란 솟을대문으로 돼 있어 '큰 대문 집'이라 불렸다. 그의 유치원 친구 이경희 여사는 이와 관련한 얘기는 이미 인터뷰에서 일부 소개(기사 보기)했지만 그녀가 쓴 <백남준 이야기>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한국 최초의 '재벌 막내아들'

1935년 금강산 여행 중에 찍은 가족사진. 앞줄 맨 왼쪽이 백남준이고 그 뒤로 부친 백낙승이다.
 1935년 금강산 여행 중에 찍은 가족사진. 앞줄 맨 왼쪽이 백남준이고 그 뒤로 부친 백낙승이다.
ⓒ 백남준아트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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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의 부친인 백낙승씨는 한국 최초의 재벌로 일본의 니혼대 상과와 메이지대 법과를 졸업한 엘리트 출신이다. 1920년대부터 1300여 대의 방직기를 갖춘 태창방직을 경영했고 홍콩과도 무역했다. 또한 그의 조부 백윤수씨는 당시 종로·동대문 일대 포목점 중 50~70%를 독점했고 조선말 왕실의 상복·제복 등을 도맡았다.

백남준은 선친으로부터 사업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랐고 반드시 훌륭한 사업가 돼야 한다는 다짐을 받아왔다. 그래서 두 형은 모두 사업가가 됐지만, 막내인 백남준은 아버지의 뜻과는 정반대로 예술가의 길을 걸었다. 집안의 자랑이 아니라 사고뭉치 내지 말썽쟁이가 되고 만 셈이다.

1964년 익살맞은 백남준 '자서전'

백남준 I '태내기 자서전' 1981. 이 작품은 1932년 4월 14일자 <뉴욕타임스>에 영어로 쓴 백남준의 엄마 뱃속 자서전으로 여기서도 자신과 비디오아트를 불가분의 관계로 설정한다. 그래서 "엄마는 말했다. 너는 비디오아트를 시작할 것이다(Mother said, you will start a Video Art)"라고 적고 있다.
 백남준 I '태내기 자서전' 1981. 이 작품은 1932년 4월 14일자 <뉴욕타임스>에 영어로 쓴 백남준의 엄마 뱃속 자서전으로 여기서도 자신과 비디오아트를 불가분의 관계로 설정한다. 그래서 "엄마는 말했다. 너는 비디오아트를 시작할 것이다(Mother said, you will start a Video Art)"라고 적고 있다.
ⓒ 김형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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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내기자서전'이라는 제목이 붙은 1981년 작품(위 사진)에는 백남준이 자기 출생과 관련해 <뉴욕타임스> 지면에 영어로 쓴 것이다. 이 작품의 원본이라 할 수 있는 1964년 '자서전'에서는 자신의 잉태과정과 그 미래적 전망까지 함께하면서 예술가는 시간과 싸우는 존재라는 점을 익살맞은 반어법으로 기술했다.

"1931년 9월 31일 나는 어머니의 자궁에서 어머니와 아버지가 최고의 쾌락을 음미하는 동안 잉태됐다. (중략) 2032년에 내가 여전히 살아 있다면 나는 100살이 될 것이다. 3032년에 내가 여전히 살아 있다면 나는 1000살이 될 것이다. 11932년에 내가 여전히 살아 있다면 나는 10만 살이 될 것이다."

식민지 시대에 태어난 '전쟁 세대'

백남준아트센터 백남준 전시에 소개된 백남준 어린 시절 사진들. 4살 때 백남준(왼쪽) 3살 때 금강산 여행 중에 찍은 가족사진(오른쪽 상단) 애국유치원 다닐 때 찍은 사진(오른쪽 하단)
 백남준아트센터 백남준 전시에 소개된 백남준 어린 시절 사진들. 4살 때 백남준(왼쪽) 3살 때 금강산 여행 중에 찍은 가족사진(오른쪽 상단) 애국유치원 다닐 때 찍은 사진(오른쪽 하단)
ⓒ 김형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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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은 시인은 "우리 세대는 절반이 죽었다"라고 했지만 그보다 한 살 위인 백남준이라고 예외일 수 있겠는가. 2009년 2월 백남준아트센터에서 열린 국제심포지엄에서 현실문화연구 발행인 김수기씨는 백남준의 청년기를 '전쟁 세대'로 규정한다. 백남준이 예술적으로 극단적이고 파괴적이고 급진적인 이유가 여기에서 나온 것인가.

"백남준의 청년기를 보면 사실 거의 '전쟁시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태어날 때부터 한국을 떠날 때까지 전쟁으로 점철됐다. 백남준이 태어난 지 1년 전인 1931년 만주사변이, 1937년 중일전쟁이, 1941년 태평양전쟁이 일어났다. (중략) 특히 6·25 피난과정에서 겪은 상처로 삶과 예술의 뭔지를 대해 근본적인 성찰을 하게 됐다."

성장기에 피아노·독서·외국어에 열중

경기중학교 다니던 시절인 1948년 급우들과 찍은 사진. 맨 앞줄에서 2번째가 백남준이다
 경기중학교 다니던 시절인 1948년 급우들과 찍은 사진. 맨 앞줄에서 2번째가 백남준이다
ⓒ 백남준아트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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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은 어려서 애국유치원과 수송초등학교에 다녔다. 그 시절, 백남준의 집에는 피아노가 있었는데 여간 특권층이 아니면 누릴 수 없는 것이었다. 백남준은 피아노를 배우고 싶었지만 그런 건 남자가 하는 게 아니라는 부친의 엄한 훈계로 큰누이 백희득씨가 피아노 레슨을 받을 때 어깨 너머로 배웠을 뿐이다.

그러다가 본격적으로 피아노를 시작한 건 1945년 경기중학교(6년제)에 진학하고 나서부터다. 당시 이 학교에는 큰누이를 가르친 신재덕 선생과 이건우 선생이 재직했는데, 피아노는 신재덕 선생에게서, 작곡은 이건우 선생에게서 배웠다. 백남준은 또한 이건우 선생을 통해 민주적 '12음법'을 시도한 작곡가 '쇤베르크'도 알게 됐다.

백남준은 후에 조벽암 선생의 시 <향수>에 곡을 붙일 만큼 작곡에 재능을 보였고, 그 후로 전부 5곡을 작곡했다. 이 가운데 한 곡을 독일에서 발표하기도 했다.

또한 백남준은 어려서부터 몸이 약해서인지 방에 틀어박혀 '세계문학전집'(일어판)을 읽은 독서광이었다. 그때 프랑스어도 배웠고 홍콩·일본·독일 유학 그리고 뉴욕 생활로 중국어·일어·독어·영어를 익혔다. 그래서 백남준은 자신을 "3개의 서양어와 3개의 동양어를 배우고 카이로를 거쳐 독일로 온 한국인"이라고 소개했다.

청년 백남준, 쇤베르크와 마르크스에 빠지다

1900년 리하르트 게르스틀(Richard Gerstl 1883-1908)가 그린 아놀드 쇤베르크(1874-1951) 초상화
 1900년 리하르트 게르스틀(Richard Gerstl 1883-1908)가 그린 아놀드 쇤베르크(1874-1951) 초상화
ⓒ Wiki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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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은 예술적으로는 '쇤베르크', 철학적으로는 마르크스의 영향을 받았다. 유토피아 건설을 위한 과학적 논리를 제공한 마르크스에 마음이 기울었다. 그리고 작곡을 공부하고 싶었기에 현대 음악의 마르크스 격인 쇤베르크를 좋아했다. 1947년 백남준은 쇤베르크 레코드를 수소문해 어렵사리 구하기도 했다.

그는 쇤베르크의 관련해선 바르토크·스트라빈스키·힌데미트·시벨리우스에도 알고 있었고, 마르크스에 관련해서는 바쿠닌·부하린·프루동·프랑스노동조합운동·페이비언 사회주의도 알고 있었다. 하긴 그땐 막시스트가 아니면 지성인 행세를 못했다.

백남준은 왜 쇤베르크와 마르크스를 좋아했는지 <백남준, 그 치열한 삶과 예술>을 쓴 미술평론가 이용우(세계비엔날레협회 회장)씨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밝힌다.

"나의 쇤베르크 발견은 아마도 마르크스로부터 나온 것이 아닌가 싶다. 일제 상황은 은연중 지식인들로 하여금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마르크스는 존경의 대상이었고 이를테면 지식인의 열병이었다. 쇤베르크가 극단주의자였다면 그가 전통음악을 개혁할 수 있는 길은 오로지 급진주의자가 되는 길이었을 것이다."

2009년 백남준아트센터에서 열린 백남준 전시 때 벽에 적혀있는 마르크스의 명구다.
 2009년 백남준아트센터에서 열린 백남준 전시 때 벽에 적혀있는 마르크스의 명구다.
ⓒ 김형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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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은 경기중학교에 재직한 철학자 안병욱 선생과 민족사학자 최관우 선생에게서 마르크스를 배웠다고 술회한다. 백남준 아트센터 이유진 큐레이터는 '부드러운 교란'전에서 백남준이 <자본론>을 읽었다는 기록이 있다고 설명한다.

백남준은 '소외와 착취'라는 개념을 발명한 마르크스를 좋아해 돈에 대한 혐오도 심했다. 심지어 백씨 집안은 망해야 한다고까지 말했다. 일제와 타협해 못쓸 방법으로 돈을 번다고 생각했고 포목 상품을 독점하고 무기 장사를 한 부친을 못마땅해했다.

백남준은 당시 말뿐만 아니라 적극적 행동도 보였다. 1995년 8월 15일 MBC와 광복절 50주년 특집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셋째 형인 박상희씨가 이끈 1946년 '대구사건'에서 경기중학교 행동 대장이었고, 해방공간에서 그의 집은 5당 회의 주역인 박헌영, 여운형, 한민당과 한독당 대표가 모이는 장소였다고 밝혔다.

이러다 보니 대자본가의 아들인 백남준은 우익 상급생에게 며칠 학교를 가지 못할 정도로 얻어맞았다고 그의 동창인 서재웅씨는 증언한다. 그래서 백남준은 학교에 가길 꺼렸다고 한다.

홍콩유학과 귀국 후 이상한 피난법

그의 부친은 좌파 성향을 보이며 마르크스주의에 빠진 말썽쟁이 아들을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어 1949년 경기중학교 4학년 후반기에 홍콩에 있는 영국계 로이덴(Royden) 스쿨로 전학시킨다. 백남준은 이걸 스스로 '화려한 정치 망명'이라고 너스레를 떤다.

부친과 함께 받은 백남준의 비자를 보면 그의 직업란에는 '통역원'이라고 적혀 있다. 하긴 당시 10대에 해외로 나간다는 것은 지극히 예외적인 일이었다.

백남준이 처음 비행기를 탄 것은 17살 때다. 백남준 부친은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여권번호 6번이고, 백남준은 7번이다. 백남준아트센터 전시설명 때 사용한 영상화면을 찍은 것이다
 백남준이 처음 비행기를 탄 것은 17살 때다. 백남준 부친은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여권번호 6번이고, 백남준은 7번이다. 백남준아트센터 전시설명 때 사용한 영상화면을 찍은 것이다
ⓒ 백남준아트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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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은 1950년 5월 홍콩에서 조카 백일잔치를 보기 위해 잠시 귀국했다. 그때 마침 한국전쟁이 터져 집안 식구들이 먼저 부산으로 피난을 갔다. 하지만 2차 피난대열에 합류할 뜻인지 마르크스주의에 심취한 이상주의자 백남준은 북한군에 대한 공포감이나 적대감이 적었는지 피난을 가지 않고 서울에 혼자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런 막연한 기대감은 모두 무너졌다. 백남준 집을 점령한 북한군은 세간을 다 뒤져 개를 모조리 잡아먹고 달아났다. 이 사건을 계기로 실망한 백남준은 맨 마지막으로, 마치 망명자처럼 부산으로 내려갔고 7월 27일 밀항을 통해 일본에 들어갔다. 동경에는 이미 그의 집이 있었다. 백남준은 이렇게 그의 생애 중 17년만 한국에서 살았다.

부친과 갈등 속 일본·독일 유학

부자지간의 갈등, 이건 백남준이 홍콩에 갈 때부터 시작됐지만, 동경대학에 진학할 때 폭발했다. 성적은 부친이 원하던 대로 동경대 상과를 들어갈 충분한 수준이었으나 부친을 속이고 미학과에 진학했기 때문이다. 이를 계기로 부자지간은 최악으로 치닫는다.

백남준은 1952년 동경(도쿄)대 문과부에 입학했다. 2년 후 미학 및 예술사를 전공을 정하고, 주로 작곡과 음악사를 공부했다. 졸업 논문도 '쇤베르크 연구'였다. 동경대를 졸업하고도 성이 차지 않았던 백남준은 파리로 유학가려 했으나 부친이 파리는 퇴폐적 도시라고 말리자 결국 방향을 틀어 독일 유학을 결심했다.

1956년 뮌헨대 입학 허가를 받고 첫해 음악사 등을 공부했으나 학교 분위기가 너무 보수적이라 다음 해 더 자유로운 프라이부르크 음대로 옮겼다. 그리고 1957년부터는 독일 다름슈타트에서 매년 여름학기에 열리는 '젊은 작곡가를 위한 음악제'에도 참석했다. 그 후 백남준은 쾰른대 철학과에 입학해 니체와 헤겔 등을 공부했다.

단군 이래 그와 비견할 인물은 없다

 백남준 I '프랙탈 거북선' 350×670×400cm 1993. 1993년 대전엑스포 때 출품된 작품으로 400여개의 TV모니터와 100여개의 오브제가 혼합되어 있다. 이순신장군에 대한 백남준의 존경이 담겨 있다
 백남준 I '프랙탈 거북선' 350×670×400cm 1993. 1993년 대전엑스포 때 출품된 작품으로 400여개의 TV모니터와 100여개의 오브제가 혼합되어 있다. 이순신장군에 대한 백남준의 존경이 담겨 있다
ⓒ 김형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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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 I '로봇 정약용' 1993. 이 전자로봇 역시 백남준의 정약용선생에 대한 존경이 담겨 있다. 리움미술관에서 찍은 사진
 백남준 I '로봇 정약용' 1993. 이 전자로봇 역시 백남준의 정약용선생에 대한 존경이 담겨 있다. 리움미술관에서 찍은 사진
ⓒ 김형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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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유학을 계기로 그는 전자매체를 활용한 '비디오 아트'라는 새로운 예술영역을 개척했다. 그는 단군 이래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첫 인물이다. 왕립언어연구소격인 '집현전'을 만들어 빛나는 한글을 창제한 세종대왕이나 거북선을 만든 발명가·전략가인 이순신 장군이나 조선의 천재사상가 정약용도 있지만, 이들을 백남준과 비견할 수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백남준은 1995년 독일 <캐피탈>이 뽑은 세계 100대 예술가 중 5위로 선정됐다. 산업사회에서 정보사회로 패러다임이 바뛰는 시대, 인터페이스개념을 도입해 행위 음악과 전자미술을 융합시켰다. 그는 셔먼의 정신을 현대예술로 재해석해 하이테크 아트의 제왕이 됐다. 또한 그는 비디오 아트를 위성 아트와 레이저 아트로 발전시켰다.

백남준과 관련된 일화① 일본에서의 첫사랑
1953년 백남준은 일본에서 같은 동경대 불문과 학생 시브사와 미치코(步澤道子)와 첫사랑에 빠졌다. 그녀는 똑똑하고 인형처럼 예쁜 여학생이었다. 수줍음을 잘 타는 백남준은 그녀 앞에 서면 얼굴을 붉어졌고 그녀를 만나고 싶어 끙끙 앓았다. 어느 날 그녀에게 대학생으로는 살 수 없는 엄청나게 비싼 부다페스트 현악 4중주가 연주하는 바르토크 첼로연주회 티켓을 건넨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남자친구가 있었고 너무 비싼 표라 마음에 걸려 돌려주려고 했다. 그녀가 백남준의 주소를 알아내 그의 집을 찾아갔는데 백남준이 사는 곳은 동경에서도 최고급 주택가가 모여있는 부촌이라 처음에는 크게 당황했다. 초인종을 누르자 백남준이 나왔고 부잣집 도련님답지 않게 옷차림은 허름했다고 한다. 백남준은 형들과 여기서 살았던 것이다.

그녀가 연주회에 못 간다고 하니까 백남준이 함께 가면 안 되겠냐고 애원하다시피 해 겨우 같이 가게 된다. 차도 같이 마시며 데이트도 했지만 결국 그녀는 자신 애인에게 돌아갔고 백남준의 애틋한 첫사랑은 그렇게 끝나고 만다. 초대 백남준 아트센터 이영철 관장이 3년 전 일본 출장을 갔다가 그녀를 만났는데, 세월이 많이 흘렀음에도 아직 스마트한 미인이라고 기자와 인터뷰에서 밝혔다.

유치원 동창인 이경희 여사와 백남준 선생의 인터뷰를 보면 백남준은 이 여사에게 독일에서 첫 전시 후 1964년 동경에서 첫 번째 퍼포먼스를 했는데 미치코에게 초청장을 보내는 걸 깜박 잊어버려 끝난 다음에야 그 생각이 났다고 말했단다. 또한 뉴욕시절 백남준이 콜롬비아대 다니던 미치코의 여자 친구를 만났는데 미치코가 자기 얘기를 했다는 걸 들었다며 마치 영화이야기처럼 말했단다.

덧붙이는 글 | 관련전시 I] '백남준: 음악의 전시 1963-2013' 한국국제교류재단(KF) 소속 문화센터 갤러리(중구 을지로5길 26 미래에셋센터 서관19층)에서 5월 24일까지 열린다.

[백남준 특강] 장소: 한국국제교류재단 문화센터 세미나실(서울 을지로 센터원 빌딩) 5월 9일(목) 7시 <백남준의 예술 세계> 강사: 안경화(백남준아트센터 학예팀장), 5월 16일(목) 7시 <백남준 비디오 아카이브> 강사: 박상애(백남준아트센터 아키비스트), 5월 23일(목) 7시 <큐레이터 백남준> 강사: 임산(동덕여대 큐레이터학과 교수) [신청방법] 이메일 seann@kf.or.kr로 참여 희망프로그램, 날짜, 참가자명, 연락처를 보내면 선착순 마감. 참가비는 무료 문의 02)2151-6520

[관련전시 II] '부드러운 교란전(1층)' 상설전이 백남준아트센터에서 2013년 6월 30일까지 예술가의 사회적 역할을 주제로 열린다. 관람시간: 오전 10시-오후 8시(매월 둘째, 넷째 월요일 휴관) 관람료 성인 4,000원 '끈질긴 후렴(2층)' 기획전도 같은 곳에서 6월 16일까지 열린다



태그:#백남준, #전쟁세대, #마르크스, #쇤베르크, #미치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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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중 현대미술을 대중과 다양하게 접촉시키려는 매치메이커. 현대미술과 관련된 전시나 뉴스 취재. 최근에는 백남준 작품세계를 주로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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