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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희 여사 자택에서 인터뷰하면서 포즈를 취한 모습. 연로한 나이에도 컴퓨터에 능하시다
 이경희 여사 자택에서 인터뷰하면서 포즈를 취한 모습. 연로한 나이에도 컴퓨터에 능하시다
ⓒ 김형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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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희 여사는 백남준과 명동성당 건너편에 있었던 '애국유치원' 동창이다. 당시 한국에 캐딜락이 두 대밖에 없던 시절 백남준 집에 그 차가 한 대 있었는데 이 여사는 그 차를 타고 유치원에 같이 다녔다고 한다. 두 집안의 어른들끼리는 정혼을 맺어 이 여사가 백남준 집에 놀러 가면 "남준이 색시 왔네"라고 말했단다.

이경희 여사는 서울대에서 약학을 전공했으나 대학 2학년 때부터 방송과 인연을 맺어 KBS 라디오 '스무고개' '재치문답' 등과 KBS TV '나는 누구일까요' 등 20년 가까이 방송패널로 출연했다. 후에 세계여행을 주제로 한 기행수필가로 변신했고 전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한국 꼭두극'을 알리는 문화대사 몫도 톡톡히 했다.

35년 만에 백남준이 귀국했을 때 첫 마디가 "유치원친구 경희를 만나고 싶다"였다는 이야기였다. 또 백남준이 세상을 떠나기 1년 여 전 마이애미로 백남준을 찾아갔다가 이를 탐탁지 않게 여긴 부인 시게코 때문에 힘들기도 했단다. 이경희 여사는 백남준 관련 서적 두 권을 냈다. 그를 통해 인간 백남준을 알기 위해 지난 3월 23일 자택을 찾았다.

- 백남준 관련 행사에 거의 안 빠지시는데 요즘 건강은 어떠신지요?
"원래 제가 전시에 참석하거나 학술강의 듣는 걸 좋아해서 그런 곳에 많이 다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백남준과 관련되는 곳이니까 더 가게 되지요. 생존에 백남준 본인이 자기의 행사가 있을 때마다 내게 와달라고 부탁을 했어요. 사후에도 그 연장으로 백남준을 기쁘게 해주고 싶어 자연스럽게 그와 관련행사에 참석하게 됩니다.

나는 무남독녀로 형제 없이 혼자 자라 몸이 보통 약한 게 아닙니다. 초등학교 6학년 때는 폐문임파선을 앓아서 거의 학교를 못 가 6학년을 재수했어요. 나이 들어서도 매년행사처럼 1년에 한 번씩 입원을 했는데 나중에 안 일이지만 백남준은 외국에 있으면서도 그걸 알았더군요. 그러니 지금도 그의 행사에 빠질 수가 없지요"

1939년 백남준과 함께 다녔던 애국유치원은 명당성당 건너편에 있었는데 그 때 찍은 졸업사진. 맨 뒷줄 오른쪽에서 8번째가 백남준, 가운뎃줄 오른쪽으로 7번째가 이경희 여사다
 1939년 백남준과 함께 다녔던 애국유치원은 명당성당 건너편에 있었는데 그 때 찍은 졸업사진. 맨 뒷줄 오른쪽에서 8번째가 백남준, 가운뎃줄 오른쪽으로 7번째가 이경희 여사다
ⓒ 이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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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적인 예술가를 유치원 친구로 두셨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백남준 같은 세계적 천재를 유치원친구로 두었다는 건 나에게 너무 감사한 일입니다. 더군다나 한국을 떠나 해외에서 35년을 지내다 돌아와서 나를 잊지 않고 찾아줬다는 게 기뻤습니다. 나는 백남준의 예술에 대해서는 솔직히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의 예술을 연구하는 사람들의 강의나 글을 읽고 차츰 이해하고 있을 뿐입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그의 난해하고 이상하게 느껴졌던 예술이 우리사회에도 익숙해지고 있다는 걸 느낍니다. 그가 맨 처음 한국에 와 나와 인터뷰할 때 '나의 예술이 지금은 난해하고 재미없다고 하지만 나중에 사람들이 편리하다고 하며 따라할 거야'라고 했는데 실제로 요즘 광고 등에 응용되는 걸 봅니다. TV모니터를 비스듬히 들고 거기에 얼굴을 내밀거나 거기서 연속문양을 사용하는 게 참 많습니다."

- 백남준의 유치원 시절 이야기를 좀 해주시겠어요?
"백남준은 창작활동에서 유치원 때 기억이 꽤 많이 아이디어로 작용하는 것 같습니다. 결국 예술작품은 예술가 자신이 경험한 것에서 영감을 창출되는 것 아닙니까.

우리가 어렸을 1930년 후반에는 유치원 다니는 게 흔치 않았습니다. 백남준은 부잣집 아들이었고 나도 무남독녀 외동딸인데다 아버지가 일본 유학생이었고 어머니가 동덕여중을 나온 신여성이라 딸 교육에 관심이 많으셨던 것 같아요. 그렇지 않고서야 동대문 밖 창신동에 살면서 을지로 2가 명동성당까지 유치원을 다닐 수 있었겠어요.

같은 창신동에 살았던 백남준 집에는 그 당시 한국에 '캐딜락'이 두 대밖에 없었던 시절 백남준 집에는 그 차 한 대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도 그 차를 타고 같이 유치원엘 다녔습니다. 백남준 집은 대문이 커서 창신동에서 '큰대문집'이라고 불렀습니다.

토니 슈투스(Toni Stooss)와 토마스 켈라인(Thomas Kellein)이 공동 저술한 <백남준의 비디오 시간-비디오 스페이스(NAM JUNE PAIK Video Time-Video Space. 1992)>의 한 페이지. 여기에 이경희 여사가 1971년에 쓴 수필 <왕자와 공주>가 독일어로 번역돼 실려 있다. 상단은 금강산에서 찍은 백남준 가족사진이고, 하단은 백남준이 물음표로 나란히 거꾸로 그려 이 여사에게 보낸 사랑의 하트사인이다
 토니 슈투스(Toni Stooss)와 토마스 켈라인(Thomas Kellein)이 공동 저술한 <백남준의 비디오 시간-비디오 스페이스(NAM JUNE PAIK Video Time-Video Space. 1992)>의 한 페이지. 여기에 이경희 여사가 1971년에 쓴 수필 <왕자와 공주>가 독일어로 번역돼 실려 있다. 상단은 금강산에서 찍은 백남준 가족사진이고, 하단은 백남준이 물음표로 나란히 거꾸로 그려 이 여사에게 보낸 사랑의 하트사인이다
ⓒ 이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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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준이와 나는 모래를 가지고 놀길 좋아했어요. 그런데 나는 다른 애들이 하는 모래장난대로 '두껍아, 두껍아, 헌집 줄게 새집 다오'라고 하며 젖은 모래로 두꺼비집을 만들곤 했는데 백남준이 내가 만든 집을 깨트리거나 다른 이상한 걸 만드는 겁니다. 뭔가 남다른 데가 있었던 것 같은데 거기서도 일종의 퍼포먼스를 한 것 같아요.

백남준 집 뒷동산에 벚나무가 많아 벚꽃이 지고 버찌가 달리면 우리는 그 검은 열매를 따먹곤 했습니다. 백남준은 입가에 시커멓게 물을 묻혀 나를 웃기곤 했지요. 어느 날 백남준 사촌들과 함께 숨바꼭질하다가 백남준이 내 손을 잡고 함께 숨는다고 창고 뒤로 숨었습니다. 그런데 내가 그만 창고 지붕에 씌운 도당에 이마가 찢겼어요. 남준이 피가 나는 걸 보고 겁을 내 나는 아프다는 말도 못했습니다. 나중에 보니까 백남준은 그게 자신이 잘못이라고 생각해 40여 년 간 그걸 미안하게 생각했더라고요.

그런데 백남준이 1968년 국내 <공간>(8월호) 잡지에 '뉴욕 단상'이란 제목으로 투고를 했는데 거기에 내 이야기가 나와요. 그 이야기 중에 숨바꼭질하다가 내가 이마를 다쳐서 피가 흐르는 것을 보고 그 어린나이에 여자 친구에게서 '춘(春)'을 느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섹스'를 느꼈다는 말인데 얼마나 성숙한 일입니까. 모차르트가 그랬듯 천재는 일찍 성이 발달한다고 하는데 백남준도 그랬나봅니다."

- 백남준은 유치원 시절을 '유토피아'로 봤는데 그 이유가 뭘까요?
"유치원은 일종의 유토피아였을 것입니다. 1963년 부퍼탈에서 열린 백남준의 첫 전시 '음악의 전시 - 전자 텔레비전'의 포스터에 보면 16개 주제가 네모 칸에 적혀있는데 그 첫 주제가 바로 '어른을 위한 유치원(Kindergarten der Alten)'입니다.

그리고 전시가 끝난 후 직접 쓴 글에서도 '지금이 곧 유토피아다'라는 말이 나옵니다. 여기의 '지금'이라는 건 아이처럼 깨어 있는 순간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아이의 마음이 돼 자유롭게 말하고 행동하는 것, 이걸 유치원 시절의 특권으로 본 것이죠."

"35년 만에 견우와 직녀처럼 만나다"

백남준은 1984년 6월 22일 밤 35년 만에 귀향했다 6월 30일 출국하게 된다. 그때 배웅나간 이경희 여사와 유치원친구 박한수(왼쪽)씨 그리고 백남준이 얘기꽃을 피우고 있다
 백남준은 1984년 6월 22일 밤 35년 만에 귀향했다 6월 30일 출국하게 된다. 그때 배웅나간 이경희 여사와 유치원친구 박한수(왼쪽)씨 그리고 백남준이 얘기꽃을 피우고 있다
ⓒ 이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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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자의 궤도를 돌다 1984년 35년 만에 견우와 직녀처럼 만났습니다. '유치원친구 이경희를 만나고 싶다'는 말을 했는데 기분이 어떠셨는지요?
"나는 남준이를 늘 기억하고 있었지요. 그러나 남준이는 나를 잊어버렸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왜냐하면 백남준 작은 누님이 동생은 외국에 돌아다니면서 힘든 전위예술인지 뭔지를 한다고 해서 날 기억할 여지가 없다고 생각을 했으니까요. 그리고 외국에서 정말 멋진 여자들도 많이 만났을 것이고요.(웃음)

그래서 나는 백남준이 6월 22일 밤에 공항에 들어오는 걸 TV로 보면서 어릴 적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쳐갔지만 먼 산 보듯 그저 담담하게 봤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조간에 백남준이 유치원 친구 경희를 만나고 싶다는 기사를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꿈만 같다는 생각이 들면서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것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었으니까요. 도대체 기자들이 '한국에 와서 하고 싶은 게 뭐냐'는 질문에 전혀 예상치 않은 대답을 하는 사람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백남준이 처음 아니냐며 주변에서 역시 천재는 생각하는 방법이 다르다고 하더군요."

- 백남준은 기지 넘치는 말을 많이 남겼는데 특히 좋아하시는 게 있다면?
"'내일 세상은 아름다울 것이다' '가난한 나라에서 온 가난한 사람, 오직 할 수 있는 것은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것뿐이다' 등입니다. 백남준은 자신을 '어릿광대'로 비유하며 자기의 예술은 사람을 즐겁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지구촌 사람을 즐겁게 하려고 84년에 <굿모닝 미스터오웰> 86년에 <바이, 바이 키플링> 88년에 <손에, 손잡고>같은 위성아트연작을 남긴 것 같아요. <손에, 손잡고>는 구소련과 중국이 참가해서 아주 큰 이슈가 됐습니다. 구소련에서는 사전검열 없이 생방송되어 전무후무한 일이 일어났고요. 세계적으로 히트 하려면 사람들이 얼떨떨해 할 정도로 재미있게 대중예술 위주로 편성돼야 한다고 봤습니다."

백남준은 '위성아트'로, 난 '꼭두극'으로 한국 알리다

이경희 여사가 만든 말뚝이꼭두를 받고 좋아하는 백남준. 1985년 청담동 백남준 작은누이 댁에서 찍은 사진.
 이경희 여사가 만든 말뚝이꼭두를 받고 좋아하는 백남준. 1985년 청담동 백남준 작은누이 댁에서 찍은 사진.
ⓒ 이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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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남준은 '작곡가'에서 '비디오 아티스트'로, 이경희 여사는 '약학도'에서 '꼭두극 연출가'로 변신하셨는데 그런 면에서 두 분 비슷한 점이 많네요?
"글쎄요. 그리고 보니 그렇네요. 나도 <백남준, 나의 유치원 친구>를 낼 때 우연이기는 하지만 우리 둘은 많은 면에서 닮아있어 거기에 뭔가 뜻이 있는 것 같습니다.

꼭두극·사물놀이·남사당 풍물패 유럽공연을 제가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시도한 셈인데 그런 것이 백남준의 예술적 시도에서도 일맥상통하는 것 같아요. 내가 꼭두극단을 만들고 자문을 얻어 '인형극'이 아니라 꼭두놀음패 '어릿광대'라고 지었는데 백남준은 스스로를 '무당'이나 '어릿광대'라는 비유했잖아요.

더군다나 백남준이 한국에 온 첫 해인 1984년 내가 제작한 꼭두극 '양주별산대'를 가지고 동독 드레스덴에서 열린 '세계꼭두극페스티벌'에 참석하게 됐는데 당시로는 동구권참가라 우리나라에도 역사적인 일이었지요. 국가지원 없이 나 혼자서 해나가기가 힘들다니까, 백남준은 '경희가 굉장한 일을 하는데 내가 뭘 도와줄까?' 하더니, 마침 자기가 조금 후에 문공부장관을 만나러 가니 도움을 청하겠다는 거예요.

나는 한마디로 거절했습니다. 아니, 고국에 돌아와서 문공부장관을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그런 자기의 유치원 친구를 도와달라고 한다니 그게 말이 안 되지요. 1984년 유럽공연을 잘 마쳤더니 연말에 백남준이 나에게 '구라파 순회공연 축하!'라고 쓴 엽서를 보내줬어요. 우린 이상할 정도로 상통하는 데가 많아 보입니다."

- 백남준은 아이디어가 많은 천재인데 왜 머리보다 몸을 중시했나요?
"왜 몸이냐고요? 백남준은 인간의 본능을 그대로 귀하게 여기며 살아 온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그의 머리가 쉴 새 없이 전기스파크 같은 불꽃을 일으켜도 그는 몸을 먼저 주제로 삼은 것 같아요. 그렇게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그런 생각을 몸으로 실현하고 행위로 표현한 것이 아닌가라고 나는 해석하고 싶습니다.

일상에서 그래요. 그가 삶에서 보인 즉흥적 해결법이나 번갯불 같은 발상은 놀라워요. 1984년 귀국 후 두 번째 만나는 날에 처음 인터뷰에서 그가 위성 쇼 <굿모닝 미스터오웰>을 하다 빚을 많이 졌다는 말이 안쓰러워 내가 봉투에 200달러를 넣고 갔어요. 그리고는 이것으로 빚 갚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는 글을 쪽지에 쓰고는 이 쪽지를 내가 간 다음에 없애달라고 했어요. 그는 '내가 한국에서 달러를 가지고 나가면 안 되지. 이 돈, 경희가 가지고 있다가 내가 달랠 때줘' 하고는 내 손을 붙잡고 화장실 문을 열더니 변기 속에 쪽지를 넣고 물을 내리는 거예요. 나에게 쪽지를 없앴다는 확인을 시켜주는 그런 번갯불 같은 기지를 나는 모르고 화장실 문을 열기에 당황했던 일이 있어요."

'남준이 색시'라는 특별한 관계에 대한 의무감

2011년 9월에 이경희 여사가 출간한 <백남준 나의 유치원친구>의 표지. 아래 백남준 사진은 이 여사가 1984년 6년 29일 워커일 '펄 빌라'에서 찍은 것으로 누가 사진을 잘 찍는지 내기를 했는데 나는 백남준을 제대로 찍었는데 그가 찍은 내 사진은 얼굴이 흐리게 나와 속상했는데 나중에 생각하니 일부러 흔들어서 그렇게 찍은 거였다.
 2011년 9월에 이경희 여사가 출간한 <백남준 나의 유치원친구>의 표지. 아래 백남준 사진은 이 여사가 1984년 6년 29일 워커일 '펄 빌라'에서 찍은 것으로 누가 사진을 잘 찍는지 내기를 했는데 나는 백남준을 제대로 찍었는데 그가 찍은 내 사진은 얼굴이 흐리게 나와 속상했는데 나중에 생각하니 일부러 흔들어서 그렇게 찍은 거였다.
ⓒ 이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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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여 년 간격으로 백남준 관련 책을 두 권 내셨는데 그의 차이점은 뭔가요?
"백남준이 처음에 한국에 왔을 때부터 자기와 내 이야기를 책으로 써달라는 이야기를 몇 번 했는데 난 그런 이야기를 한다는 것 자체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어요. 왜냐하면 한국인의 정서로는 '나와 남준 같은 사적 이야기'를 쓴다는 것도 그렇고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게 좀 부끄럽고 유치하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럼에도 백남준은 어린애처럼 몇 번이나 조르듯 떼를 쓰며 '내 이야기를 써달라'고 했어요. 하지만 난 그런 글을 쓸 생각이 없었어요. 그러다가 2000년 뉴욕 구겐하임미술관에서 열린 백남준 회고전에 갔을 때 보니 백남준이 나를 금방 못 알아보는 거예요. 처음엔 비디오아트전시라 내부가 좀 어두워서 그런가 하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백남준이 당뇨로 눈이 잘 안 보인다는 말을 들었을 때 충격적이었어요. 보이지 않는 눈으로 그런 세계적 회고전을 열 수 있다니 생각하니 얼마나 고생을 심했을까 싶어 마음이 아팠어요. 그가 내게 부탁한 책을 낸다 해도 읽지 못하게 되면 어쩌나 싶어 그해 다급하게 낸 책이 바로 <백남준 이야기>(2000)입니다.

이 책은 백남준과의 어릴 적 이야기며, 40여 년 전 만에 만나 함께 지냈던 이야기 등 사사로운 내용이 주입니다. 그리고 백남준이 세상 떠난 후, 그의 탄생 80주년을 맞아 그의 예술세계에도 접근하고자 <백남준 나의 유치원친구>(2011)를 썼습니다.

내가 백남준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내가 아는 그의 흔적을 진실 되게 기록으로 남기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 겁니다. 그건 유치원 친구인 날 그토록 오래 잊지 않고 기억해 준 것에 대한 고마움의 보답이기도 하지만 어찌 보면 어려서 '남준이 색시'라는 특별한 관계에 있었던 사람으로서의 의무감 같은 것도 있었어요.

역사에 남는 영웅이나 천재예술가 이야기에는 항상 오해되고 있는 부분이 있어서 후세에 그게 사실이 아니라는 자료나 증거가 발견돼 그제야 수정되는 게 허다하지요. 특히 사람들이 제일 흥미롭게 생각하는 부분이 사랑이나 남녀문제인데 백남준에 대해 내가 아는 진실을 꼼꼼히 기록해 두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백남준에 관심을 두고 연구하는 이들을 위해 예술과 관련된 이야기도 많이 실었습니다."

백남준이 어린 시절 살았던 창신동 자리에서 프랑스 TV '카날 플뤼(CANAL+)'에서 촬영한 영상필름의 스틸 컷. 백남준이 살았던 부잣집을 상징하는 창신동 '큰대문집'이 나온다. 백남준의 흰 도포차림과 갓 그리고 이경희 여사의 한복이 인상적이다. 백남준 집안은 음력시월상달에 굿판을 벌였단다. 부잣집답게 동네사람들 다 모아 한바탕 축제를 벌이고 크게 대접을 했단다. 이런 경험은 그의 '굿 미학'에도 큰 영향을 준 것 같다
 백남준이 어린 시절 살았던 창신동 자리에서 프랑스 TV '카날 플뤼(CANAL+)'에서 촬영한 영상필름의 스틸 컷. 백남준이 살았던 부잣집을 상징하는 창신동 '큰대문집'이 나온다. 백남준의 흰 도포차림과 갓 그리고 이경희 여사의 한복이 인상적이다. 백남준 집안은 음력시월상달에 굿판을 벌였단다. 부잣집답게 동네사람들 다 모아 한바탕 축제를 벌이고 크게 대접을 했단다. 이런 경험은 그의 '굿 미학'에도 큰 영향을 준 것 같다
ⓒ 이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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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남준은 왜 '굿의 예술화', '민속학' 등을 중시했는데 생각하시는지요?
"백남준의 작품에는 한국에 대한 전통, 민속놀이 같은 것이 많이 소재로 돼 있습니다. 어려서 '큰대문집'에서는 1년에 한 번씩 굿을 했는데 그 때 본 무당에 강한 인상이 어른이 돼 비디오 아트에도 많은 소재가 된 것 같습니다. 그때의 무당이 한쪽 눈이 보이지 않는 '애꾸무당'이었다며 애꾸무당의 얼굴이 TV프레임 속에 있는 스케치를 그 자리에서 그려 주는 순발력을 보고 함께 있던 분들도 놀랬어요.

동서양의 만남과 소통을 주제로 한 <바이, 바이 키플링>에 나오는 장면 중 남대문시장의 미꾸라지장사·옷 장사 등의 영상이 방영된 적이 있는데 왜 그런 후진국 모습을 담았냐고 비난을 하니까 '궂은 것을 피하면 후진을 벗지 못한다, 남대문시장 풍경은 미국에 없는 퍼포먼스여서 재미있어 찍은 것'이라고 말했어요."

- '윤이상 선생' 국내 초청 건으로 잘못 말했다 큰 곤혹을 치렀다고요?
"1994년 '윤이상음악제' 때 정부가 윤이상 선생을 초청한다고 하니 주변에서 날보고 말리라는 사람이 많았고 국내여론도 안 좋았습니다. 그래서 마침 백남준에게 전화가 왔기에 '윤이상 선생과 퍼포먼스를 안 하는 게 어때요'라고 의견을 말했더니 백남준이 너무나 크게 화를 내는 거예요.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얼굴이 화끈거립니다.

백남준은 한 신문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어요. '윤이상 선생은 한국이 낳은 금세기 최고의 음악가다, 선생과 나는 예술장르와 생각은 달라도 한국의 예술가라는 점에서 같다, 1958년 다름슈타트 음악페스티벌에서 만난 후 깊은 정신적 교류를 가졌다'고 하면서 '예술가에게 가장 중요한 건 자유와 상상력이다, 이데올로기·제도·상황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 때 무한한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하더군요.

나는 백남준의 이런 정신이야말로 새로운 것을 만들 수 있는 원동력이라고 생각합니다. 독일에서 '플럭서스' 운동을 할 때 그들이 신주처럼 떠받드는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부순 건 이 시대 우상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을 표현한 것이잖아요. 기존의 질서나 고정관념이 만들어낸 상징을 파괴해서 얻을 수 있는 무한한 자유, 이를 통해 또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을 겁니다. 그러면서 '내 경우에 있어 이 시대의 진정한 애국은 투사나 열사가 되는 게 아니라 세계미술계에서 더욱 유명해지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경희 여사가 본 백남준의 마지막 모습

백남준은 말년에 건강이 안 좋고 추위를 많이 타 겨울만 되면 마이애미 자택에 거주했다. 이경희 여사는 2004년 12월 6일 마이애미에서 백남준을 극적으로 만나 찍은 마지막 사진이다. 간병인과 그의 부인도 보인다
 백남준은 말년에 건강이 안 좋고 추위를 많이 타 겨울만 되면 마이애미 자택에 거주했다. 이경희 여사는 2004년 12월 6일 마이애미에서 백남준을 극적으로 만나 찍은 마지막 사진이다. 간병인과 그의 부인도 보인다
ⓒ 이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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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끝으로 백남준을 언제 마지막으로 보셨는지요?
"마지막으로 본 게 그가 죽기 거의 1년 전인 2004년 12월 6일입니다. 백남준이 건강이 더 나빠지기 전에 내가 만나야겠다는 생각에 쿠바여행을 핑계로 백남준에게 전화를 걸고 가겠다고 했더니 만나겠다고 하더군요. 부인 시게코에게도 알렸고요.

호텔에 도착에 전화를 여러 번 해도 안 받아 또 걸었는데 누가 전화를 받기는 하는데 끊어졌어요. 그때 아마 백남준은 내 팩스를 못 받고 부인 시게코가 알지만 집에 있으면서도 안 받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죠. 내가 남편한테 어렵고 허락을 받아놓고도 백남준을 못 만나고 귀국하면 어쩌나싶어 신경안정제까지 먹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일찍 호텔을 나와 바닷가를 나갔어요. 백남준을 못 만났지만 백남준이 있는 마이애미 아침바다라 감격스러웠습니다. 길 건너 멀리 노천카페가 보였고요. 그런데 어떤 남자가 정상적이지 않는 소리를 지르기에 누가 장난을 치나 아니면 어제 밤에 본 불량배인가 무서워 안 돌아봤는데 또 더 크게 소리치는 거예요. 돌아보니 파라솔카페 아래 시게코가 있었고 그 옆에 기적처럼 백남준이 있지 않겠어요.

백남준 나를 알아보고 괴성을 질렀어요. 시게코와 인사하는 동안도 계속됐고요. '당신이 와서 너무 흥분돼 저렇게 소리를 지르는 거예요, 의사도 흥분하면 뇌혈관 파열이 될 수 있어 조심하라'고 했는데 나는 왈칵 겁이 나 그가 절규 못하도록 그의 얼굴을 꽉 껴안았어요. 시게코도 '소리치면 주인이 더 못 오게 한 대요'라며 그를 다그쳤고요. 그런데 백남준은 뜻밖에도 나에게 난생처음 존댓말을 쓰며 '감사합니다'라고 말했어요. 그게 백남준과의 마지막 포옹이었습니다.

그런데 백남준이 내 얼굴을 똑바로 보더니 '경희, 옛날하고 똑같아'라고 두 번이나 말하잖아요. 유치원 때처럼 날 예쁘게 본 것 같아 마음이 흡족했습니다. 한국어를 모르는 시게코에 좀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어 '어제 왜 통화가 안 됐나요'라고 했더니 '당신이 내가 어딜 가는지 알아야할 이유가 뭐냐'며 화를 버럭 내더니 백남준의 휠체어를 확 빼가지고 그대로 가버렸지요. 그 순간 너무 당황했습니다. 이제 백남준을 마지막으로 보는가 싶어 급하게 디지털카메라를 꺼내 그의 뒷모습을 찍었지요."

수필가이자 한국 꼭두극의 선구자 이경희 여사

수필가 이경희 여사
 수필가 이경희 여사
ⓒ 이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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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사(唯史) 이경희(李京姬)는 1932년 12월 15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숙명여고와 서울대학교 약학대학을 졸업하고, 대학 2학년 재학시절부터, KBS 라디오의 '스무고개'와 재치문답' 등의 프로그램에 '박사'로 출연하기 시작하여 KBS TV의 '나는 누구일까요?' '나의 직업은' 등 20년 가까이 방송패널로 출연했다.

1970년 첫 수필집 <산귀래(山歸來)>로 문단활동을 시작하면서, 1972년부터 1975년까지 영문일간지 <The Korea Herald>에 'Women's Pattern'이라는 타이틀의 주간칼럼을 씀으로써 한국여성의 고유한 정서를 외국인독자에게 알리는 데 기여했다.

또한 많은 국제회의에 참석하는 등 1960년대부터의 여행이 그녀의 삶의 테마가 되어 '기행수필'이라는 장르의 수필세계를 만들어 1994년부터 2007년까지 <월간 춤>지에 연속해서 글을 썼다. 특히 그녀의 수필 중 <현이의 연극>은 중학교 국정국어교과서에 선정되어 30년 가까이 실리고 있다.

이 여사는 또한 70년대 말부터 척박한 한국의 꼭두극(마리오네트)을 개척해 유럽 등 꼭두극 순회공연을 가졌다. 1979년 '국제꼭두극연맹(유니마 UNIMA)'에 가입해 한국본부를 두고 회장을 맡았다. 현재 이 연맹의 명예회원이기도 하다. 전문지 <계간 꼭두극>을 펴내고 꼭두극단 '어릿광대'를 창설해 '꼭두극 양주별산대'로 주목을 받았다. 88년에는 '서울국제꼭두극페스티벌'을 유치했다.

동갑인 남편 고 오수인(吳壽寅)사이에 네 딸을 두었고, 현재 국제펜클럽, 한국문인협회, 한국수필가협회, 한국여성문학인회 등 문인단체에 적을 두고 있다. 저서로 <산귀래>(1970), <뜰이 보이는 창>(1972), <현이의 연극>(1973), <백남준 이야기>(2000), <이경희 기행수필>(2009), <백남준, 나의 유치원친구>(2011) 외 여럿이 있으며 영문번역집 (1994)이 있다.

덧붙이는 글 | [관련전시] 백남준아트센터 2013년 전반기 상설전 : '부드러운 교란_백남준을 말하다' 2013년 6월 30일까지 장소 : 백남준아트센터 1층 참가작가 : 백남준, 저드 얄커트, 만프레드 레베, 샬럿 무어먼. 이 전시는 백남준과 맑스, 쇤베르크 그리고 성(Sexuality)이 주제다



태그:#백남준, #이경희, #백남준 이야기, #백남준 나의 유치원친구, #꼭두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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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중 현대미술을 대중과 다양하게 접촉시키려는 매치메이커. 현대미술과 관련된 전시나 뉴스 취재. 최근에는 백남준 작품세계를 주로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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