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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카톨릭대 서근원 교수의 책 <학교 혁신의 패러독스>(2012, 강현출판사)의 표지 사진.
 대구카톨릭대 서근원 교수의 책 <학교 혁신의 패러독스>(2012, 강현출판사)의 표지 사진.
ⓒ 강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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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學生)은 배우는 사람인가? 교사(敎師)는 가르치는 사람인가? 이 두 개의 질문에 모두 '그렇다'라고 대답하고 싶은 사람은 이 글을 읽을 필요가 없다. 이 글이 대상으로 삼은 책인, 대구카톨릭대 서근원 교수의 <학교 혁신의 패러독스>는 학생과 교사에 관한 이 상식적인 시선을 배반한다. 학생과 교사가 각각 '배우는 사람',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면 무엇일까? 저자의 결론에 따르면, 이들은 모두 서로가 스스로 깨우치는 사람이다.

'배움으로부터 도주하는 아이들'('배움의 공동체' 교육 운동을 펼치고 있는 일본 교육학자 사토 마나부 교수가 적극적으로 설파한 용어다)이 많다. 최근 몇 년 간 교실과 학교를 이탈하는 아이들의 숫자는 한 해 7만 명을 계속 육박하고 있다.(2011년 기준으로 초중고생은 6만 3천 5백여 명, 대학생은 6만 3천여 명이 학교를 자퇴하였다.) 이러한 현실의 이면에는 가족 해체나 경제적인 문제, 학교의 무관심 등의 문제가 구조적으로 얽혀 있을 것이다.

여기에 '배움'과 '가르침'의 문제는 없을까? 당연히 있고, 또 그것은 아이들이 배움으로부터 도주하는 데 가장 큰 요인이 되고 있다. 저자의 말을 보자.

"학습을 하면 할수록 자신의 고유한 생각은 사라지고 타인의 생각이 자기 안에 자리잡게 된다. 즉 학생들은 학교에서 학습하면 할수록 자신으로부터 소외되는 것이다. 이런 학습의 과정을 통해서 학생들이 자기 주변의 세계와 새롭게 관계를 맺기는 기대하기 어렵다. 오히려 학생들은 학교에서 제시하는 지식의 절대성을 믿고, 그 지식에 의존하여 타자들보다 우위에 서려고 하게 된다. 그로 인해서 학생들은 학교의 학습을 통해서 주변의 타자들과 더욱 유리되고 고립되어 간다. 즉 학생들은 학교에서 학습하면 할수록 주변의 타자들로부터 소외되는 것이다." (35쪽)

학교에서 하는 '학습', 곧 '배움'은 내 것이 아니다. 그것은 철저하게 저 머나먼 곳에 있는 국가에서 하달된 것이다. 그 첫 번째에 국가가 제정한 교육과정이 있다. 두 번째로 국가 교육과정을 구체화한 교과서가 있다. 마지막으로 교과서의 단원을 현장 수업에 적용할 때 교사들이 지침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만든 교사용 지도서가 있다. 교사들은 이 세 가지에 준하여 '이것저것'을 가르치고, 아이들은 그 '이것저것'을 배운다.

이와 같은 위계 구조 속에서 아이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낼 기회는 원천적으로 차단된다. 혹시 말할 기회를 갖더라도 그 구체적인 내용은 철저하게 예의 위계 구조에서 벗어나서는 안 된다. 만약 아이가 구조로부터 벗어나게 되면 곧장 평가(시험)에 따른 현실적인 불이익이 아이를 엄습한다. 그 모든 '이것저것'을 배우는 데에서 의미를 찾지 못하면, 아이들은 학교로부터, 그리고 수업으로부터 도주한다. 자퇴와 수업 방해와 동료 왕따와 같은 형태로 말이다.

많은 이가 생각 없는 아이들을 탓한다. 그런 아이들의 무례함을 나무라기도 한다. 하지만 도대체 아이들에게 생각할 기회는 제대로 주었는가. 그들은 아이들이 앵무새처럼 교과서와 선생님이 일러주는 내용을 반복하지 않으면 안 되는 자명한 이유를 애써 모른 체한다.

(나 자신이 교사지만) 특히 그렇게 말하는 교사들은 다른 누구보다 더 비겁하다. 그들이, '요새 아이들은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할 때의 그 '생각' 속에는 결코 아이 자신의 것은 들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교과서의 내용과 교사의 뜻에 맞는 생각만 있을 뿐 아이 자신의 생각과 체험은 들어설 여지가 없다. 학교에서 아이들이 무언가를 배우면 배울수록 그 자신으로부터, 그리고 타인으로부터 소외되는 악순환이 일어나는 까닭이다.

이 악순환은 교사에게서도 마찬가지로 일어난다. 교사의 시선은 철저하게 교과서에 머무르지 않으면 안 된다. 국가 교육과정에서 지정해주고 있는 거창한 학습 목표와 단원 활동으로부터 벗어나서도 안 된다. (교육에서 궁극적으로는 불요불급한) 평가는, 배점과 영역과 난도(難度) 등에 걸쳐 아주 철저하게 통제된다. 서술형 평가의 전면 확대나 절대 평가제로의 전환을 앞두고 있는 상황이 무색할 뿐이다.

교사가 수업을 진행하는 방식은 그나마 (아주) 조금 숨통이 트여 있다. 최근 각광을 받고 있는 모둠식 협력 수업이나, 토론 수업, 배움의 공동체 수업 등이 그 구체적인 사례들이다. 교사들 간의 상호 수업 비평을 통해 수업 내용과 방식을 개선하려는 연구나 움직임이 활발하게 펼쳐지고 있는 것도 이를 반영한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교실에서 특정한 하나의 수업 진행 방식, 특히 교장의 지침에 따른 수업 모형을 요구하는 학교가 많다. 학교의 교장 선생님들은 수시로 복도 순찰을 하면서 교사들의 수업 방식을 모니터링 한다.(말이 좋아 '모니터링'이지 '감시'와 다름 없다) 시시때때로 아이들에게서 교사의 수업에 관한 의견을 청취하기도 한다.('의견 청취'는 명분이고 대개 말 안 듣는 교사의 꼬투리를 잡기 위한 것이다.) 그러고는 교사들에게 주문한다.

"수업을 좀 제대로 하라. 내 말을 잘 들어라."

이런 현실에서 도대체 교사가 서 있(어야 하)는 곳은 과연 어디인가? 그가 해야 하는 일은 무엇인가? 내가 보기에 대한민국의 교사는 잡다한 교과 지식을 시장판에 펼쳐놓고 철을 따라가며 아이들에게 파는 소매상(도매상조차도 못 된다)이거나 단순한 전달자에 불과하다. 과연 이런 상황에서 교사가 스스로에게서, 그리고 동료 교사나 학생으로부터 소외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런 분석을 따르는 한, 대한민국 교사의 무능력과 무기력과 귀차니즘을 마냥 비난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자, 그렇다면 이 현실을 어떻게 타개할 것인가? 시스템을 바꾸는 방법이 있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대다수 학교는 '가르침'과 '배움'이 이원화하여 철저하게 분리된 근대 학교 시스템을 따르고 있다. 여기에는 몇 가지 전제가 깔려 있다. 아이들은 '배움'과 지식이 필요한 미성숙한 존재라는 것, 그리고 교사는 이들에게 '가르침'을 통해 지식을 채워줘야 한다는 것.

25평의 네모난 교실과 그 중앙에 놓인 교탁을 중심으로 아이들의 책상이 나란히 서 있는 공간 또한 그 근대 학교 시스템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다. 국가 주도의 교육 과정과 교과서도 마찬가지다. 정해진 연간 수업 일수와 교과별 주간 수업 시수 등도 다 그 중앙 집권적 시스템을 위한 하부 장치들이다. 전국의 모든 학교에 있는 아이들이 붕어빵 문제를 놓고 벌이는 교내 정기고사도 마찬가지다.

작년 2학기 수업 중에 모둠 활동을 하는 아이들 모습. '좀비'가 된 아이들은, 책상만 살짝 돌려 옹기종기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금방 생기를 되찾는다. 굳이 '거창하게'(?) 모둠별로 배열하지 않아도 된다. 사각형의 교실을 오각형이나 육각형과 같은 다각형의 공간으로 활용할 줄 아는 교사의 인식만 있으면 되지 않을까?
 작년 2학기 수업 중에 모둠 활동을 하는 아이들 모습. '좀비'가 된 아이들은, 책상만 살짝 돌려 옹기종기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금방 생기를 되찾는다. 굳이 '거창하게'(?) 모둠별로 배열하지 않아도 된다. 사각형의 교실을 오각형이나 육각형과 같은 다각형의 공간으로 활용할 줄 아는 교사의 인식만 있으면 되지 않을까?
ⓒ 정은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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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지금 당장 이 모든 시스템을 바꿀 수는 없는 노릇이다. 여기에는 교육 주체들 간의 수많은 이해 관계와 체제 전환에 따른 비용의 문제 등을 해결해야 하는 복잡한 일들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는 그와 같은 시스템에 대한 고민을 깊게 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바꾸려는 적극적인 노력을 계속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다른 방법은 교육에 대한 인식과 태도를 바꾸는 일이다. 저자가 주장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 인식과 태도, 곧 패러다임의 전환이다. 그리고 이를 설명하기 위해 동원한 개념이 책의 부제에도 등장하는 '교민(敎民)'과 '회인(誨人)'이다. 좀 길지만, 이 책의 핵심에 해당하므로 해당 구절을 모두 인용한다.

"교민(敎民)에서 교(敎)는 효(孝)와 지(支)가 결합하여 만들어진 글자다. 여기서 효(孝)는 누구나 받아들이고 따라야 하는 사회적 규범을 상징하고, 지(支)는 나뭇가지 모양을 본뜬 것으로서 회초리 또는 강제를 상징한다. 민(民)은 사람이 등에 짐을 지고 동굴로 들어가는 모양을 본 딴 글자로서 백성 또는 피지배자를 뜻한다. 따라서 교민(敎民)은 지배자가 백성 또는 피지배자들에게 사회적 규범이나 질서, 또는 정답과 같은 것을 강제로 가르치는 일을 뜻한다. 이 과정에서 피지배자인 민(民)은 수동적인 위치에서 지배자가 정해놓은 하나의 정답을 획일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회인(誨人)에서 회(誨)는 언(言)과 매(每)가 결합하여 만들어진 글자다. 여기서 언(言)은 말을 주고받는 것을 뜻하고, 매(每)는 아이(人)가 스스로 엄마의 젖(母)을 빨아먹듯이 늘 그러하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회(誨)는 항상 말을 통해서 스스로 깨우치도록 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인(人)은 고대사회에서 군주 또는 지배자를 뜻한다. 따라서 회인(誨人)은 말을 통해서 또는 대화에 의해서 군주나 지배자를 스스로 깨닫도록 하는 일을 뜻한다. 달리 말하면 군주나 지배자들에게는 백성들에게 그러하듯이 일방적으로 정답을 가르쳐주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뜻한다. 이 과정에서 깨우침의 주체는 인(人)이며, 그 점에서 인(人)은 능동적 존재다." (20, 21쪽)

'교민'과 '회인'은 원래 봉건 사회의 교육 원리다. 이 두 가지 원리는 철저하게 이분화하여 '교민'은 백성(피지배자)에게, '회인'은 군주(지배자)에게 적용되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21세기 대한민국은 적어도 그 명색만큼은 봉건 사회가 아니라 민주주의 사회다. 그런데도 우리는 아이들을 봉건적인 '교민'의 원리에 따라 대한다.

'교민' 체제를 따르는 대한민국의 학교 시스템에서 아이들은 무지하고 부족한 대상으로 간주된 채 국가가 정해 준 규범과 질서를 배운다. 이들에게는 스스로 깨우치고 생각할 겨를이 주어지지 않는다. '교육은 중립'이라는 말이 정치적 견해를 밝힌 교사들에게 휘둘러지는 전가의 보도처럼 돼버렸지만, 이보다 더 '정치적인' 교육이 또 어디 있겠는가.

그렇다면 교육에 대한 우리의 패러다임을 '교민'에서 '회인'으로 바꾸는 데에는 어떤 것들이 필요한가? 저자는 교육주의(↔'교민'의 정치주의), 자연주의(↔'교민'의 공학주의), 상호주관주의(↔'교민'의 객관주의), 해석주의(↔'교민'의 계량주의), 실존주의(↔'교민'의 개체주의) 등을 제안한다. 나는 이들 다섯 가지를 종합하여 기존 '교민' 체제 하의 '상명하달(上命下達)'식 패러다임이 '하의상달(下意上達)'식 패러다임으로 전환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이는 어찌 보면 평범한 결론이다. 실상 이와 같은 저자의 대조법에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교민' 패러다임의 정치주의를 '회인' 패러다임의 교육주의와 대비한 것은 가장 치명적인 오류라고 생각한다. 실상 교육 분야에서처럼 정치가 첨예하게 부각되는 부문이 어디 있는가. 특히 "학교에서 회인을 실현한다는 것은 결국 교육이 교육 고유의 개념에 따라서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이다. 학교에서 교육을 되살리는 것이다."(82쪽)라고 말하는 대목은 더욱 납득하기 어렵다.

어떻게 '교육'과 '정치'가 대비될 수 있을까? 권력 관계의 유무를 기준으로 정치와 교육을 구별한 저자의 세세한 설명을 고려하더라도 이는 선뜻 이해할 수 없다. 이러한 대비는 '정치'에 대한 또다른 혐오 정서를 유발할 수도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교육과 정치의 온당한 대조어는 오히려 비교육(자연)과 비정치(폭력)가 아닌가.

내가 보기에 가장 진정한 교육은 가장 정치적인 교육이다. '회인'의 패러다임 속에서 '아이 세상 이해하기'(149~159), '아이 눈으로 수업보기'(159~168쪽), '아이 수업으로 대화하기'(168~181쪽) 등을 통해 교사와 학생이 스스로 깨우치는 것 또한 지극히 정치적이다. 저자 자신의 말마따나, '타자가 스스로의 자각을 통하여 고유하게 성장'(82쪽)하거나 '자신이 타자의 일부분이 되도록 함으로써 타자와 관계를 맺'(82쪽)는 그 모든 과정이 바로 정치적인 행위가 아니고 무엇인가. 여기서 말하는 의식의 성장이나 관계 맺기는 결국 개인과 사회를 더 나은 것으로 만드려는 정치적인 목적(의도)과 관련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문제는 정치(주의) 그 자체가 아니라 바로 어떤 정치(주의)인가 하는 것이다. 교육을 정치와 분리하려 하는 것이나 교육은 정치와 뗄 수 없다고 보는 것 모두 정치(주의)와 관련된다. 정치(주의) 그 자체는 선도 악도 아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어떤 정치이며 누구를 위한 정치인가 하는 것이다.

기존의 국가, 학교에 초점을 맞춘 '교민' 체제 대신 교육의 최일선에 있는 교사와 학생에 초점을 맞춘 '회인' 체제는, 바로 그런 점에서 올바른 교육 정치다. 그러한 '회인'의 교육을 주장하는 저자 또한 정치적으로 정당하다. 정치는 그런 식으로 우리가 적극적으로, 그리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우리는 정치를 권력 관계나 헤게모니와 같은 좁은 열쇠어로만 보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 그 분야가 교육이 되었든 문화가 되었든 마찬가지다. 요새 유행하는 학교 혁신이나 혁신 학교 또한 마찬가지다. 그것이 기존의 수많은 교육 개혁 정책 중의 하나로 전락하지 않으려면 올바른 정치적인 입장을 견지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다시 한번 말하건대, 가장 진정한 교육은 가장 정치적인 교육이다. (나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지만) 교육이 정치를 벗어나 중립으로 향하는 바로 그 순간에조차 정치는 우리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우리에게 영향을 주면서 활발하게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교육에는 중립이 없다는 명제를 되새길 필요가 있다. 애초 우리 헌법이 보장하는 교육의 중립성은 정치'로부터의' 중립성이지 정치'를 향한' 중립성이 아니다. 바로 이 점을 유의하면서 이 책을 읽었으면 좋겠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오마이뉴스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서근원 저(2012), 학교 혁신의 패러독스 - 교민(敎民)에서 회인(誨人)으로, 강현출판사. 값 15,000원



학교 혁신의 패러독스 : 교민에서 회인으로

서근원 지음, 강현출판사(2012)


태그:#서근원, #<학교 혁신의 패러독스>, #교민, #회인,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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