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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 넘겨 떠난 배낭여행. 캄보디아에서 종교에 관해 고민해보는 시간을 가졌다. 사진은 캄보디아 씨엠립의 앙코르와트.
 마흔 넘겨 떠난 배낭여행. 캄보디아에서 종교에 관해 고민해보는 시간을 가졌다. 사진은 캄보디아 씨엠립의 앙코르와트.
ⓒ 서영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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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리아정교회 성당으로 추측되는 건물. 이 나라에서 역시 종교와 관련된 생소한 체험을 했다.
 불가리아정교회 성당으로 추측되는 건물. 이 나라에서 역시 종교와 관련된 생소한 체험을 했다.
ⓒ 류태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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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볼리비아에서 체 게바라가 체포된다. '20세기 최고의 혁명가'를 산 채로 붙잡았지만, 볼리비아 정부군은 묶인 그를 앞에 두고 떨었다. 20대에 쿠바 혁명을 주도하고, 30대 초반 나이에 미국의 백악관과 소련의 크렘린 앞에서도 전혀 기죽지 않았던 게바라의 당당함과 유명세에 질린 탓이었다.

모두가 심문에 나서기를 두려워했다. 미국 CIA로부터 특수훈련을 받은 볼리비아 장교 하나가 겨우 나서 몇 가지를 묻고 답을 들었다. 이후 그 장교는 개인적 호기심을 더해 이런 질문을 덧붙였다고 한다. "당신도 신을 믿습니까?"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명료하게 게바라가 답했다. "아니오. 나는 인간을 믿습니다."

내가 신의 존재에 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게 된 건 다소간의 드라마틱한 과장이 섞였을 수도 있는 이 일화의 영향이 컸다. 소설가 김용만은 일흔을 넘긴 나이임에도 종교 곁에 가보지 않은 이유를 "내게는 문학이라는 또 다른 종교(신)가 있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나는?

신이라는 절대자, 절대자를 신뢰하는 종교에 기대려면 '인간은 약한 존재'라는 인식이 선행돼야 한다. 그러나, 나는 그렇지 못했다. '어떤 것에 의존하지 않아도 주체적으로 삶을 이끌 수 있는 존재'로 스스로를 과대평가 혹은, 과신했던 것이다. 착각이었다.

그러나, 아직은 그 착각에서 빠져나오고 싶지 않다. 종교를 가질 생각이 현재까지는 없다는 말이다. 하지만, 예전과 다르게 신을 믿는 사람을 내심 무시하는 마음은 많이 옅어졌다. 불가리아와 캄보디아에서 받은 감흥 때문이다. '무작정 배낭여행'을 떠난 2011년. 마흔 살 '무신론자'에겐 어떤 일이 있었을까.


캄보디아, 맨발의 동승(童僧)들에게 절하다


동승들 앞에서 무릎 꿇고 엎드린 나. 이상하게 마음이 편해졌다.
 동승들 앞에서 무릎 꿇고 엎드린 나. 이상하게 마음이 편해졌다.
ⓒ 서영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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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라면 쌀쌀함이 남아있을 2월 말과 3월 초순. 캄보디아의 한낮 기온은 섭씨 40도를 오르내린다. 과장이 아니라, 실제로 숨이 턱턱 막히는 날씨. 아스팔트가 깔린 도로가 많지 않은 나라지만, 흙길도 태양에 달궈져 후끈거리고 뜨겁다. 포장된 대낮의 아스팔트길은 더 말할 것도 없다. 맨살이 닿는다면 화상을 입을 수도 있다.

바로 그 길 위를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맨발로 걷는 캄보디아의 어린 스님들. 소승불교 전통의 그 나라에는 시주를 청하러 다니는 수도승들이 많다. 인접국이며 비슷한 종교양식을 가진 라오스의 '새벽 탁발'은 세계적으로 잘 알려져 있고, 외국인이 시주에 참여하기도 한다. 루앙프라방(라오스 서북부에 위치한 도시)의 탁발은 일종의 관광상품화 되기까지 했다.

2011년 2월과 3월. 두 차례에 걸쳐 1개월 정도 캄보디아에 머물렀다. 수도인 프놈펜과 앙코르와트가 위치한 씨엠립, 원시의 해변풍경이 펼쳐지는 시아누크빌 등. 아침부터 뜨겁게 이글대는 태양을 피해 카페나 식당 차광막 그늘에서 과일주스를 마시고 있노라면, 거리를 오가는 적지 않은 숫자의 동승들과 만날 수 있었다.

오렌지빛깔 선명한 캄보디아 승복을 입고, 새까맣게 그을린 얼굴로 총총히 길을 재촉하는 어린 스님들. 누군가가 자신 앞에 나타나 무릎을 꿇고 시주를 건네면 들릴 듯 말듯 작은 목소리로 축원의 말을 전했다. 그 장면을 지켜보고 있으면, 정확하게 표현하긴 힘들지만 발원지를 알 수 없는 경견함이 나에게까지 전해져왔다.

무릎 꿇는 걸 비굴한 행위라 생각해왔던 내가 그들 앞에 꿇어 앉아 머리를 숙인 게 언제가 처음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유는 단순했다. 많아야 열서너 살로 밖에 보이지 않는 동승들의 피곤한 발걸음을 잠시 쉬게 하고, 음료수나 과일 혹은, 빵을 그네들에게 전하기 위해서였다. 어린 스님을 내 앞에 멈추게 하려면 그 방법밖에 없어 보였던 것이다.

맞다. 시작은 캄보디아 동승을 향한 연민이었다. 그러나, 그들 앞에 무릎 꿇는 게 거듭될수록 기이한 마음상태에 이르게 됐다. 주스 병이나 바나나를 가방에 넣어주면, 어린 스님의 축원이 머리 숙인 내 앞에서 진행된다. 단 한마디도 알아듣지 못하는 그 주문 같은 웅얼거림에 마음이 한없이 편해졌다.

그 편안함을 얻으려고 어떤 날은 각기 다른 수도승 앞에서 10번 넘게 고개 숙여 무릎을 꺾었다. 축원의 주된 내용이 "신의 은혜가 당신에게 전해져 건강과 행복을 누리기를 바랍니다"라는 건 한참이 지난 후 영어를 할 줄 아는 캄보디아인을 통해 들었다. 펄펄 끓는 아스팔트나 지저분한 흙길에 꿇어앉은 나는 목덜미로 굵은 땀을 흘리면서도 축원이 계속되길 마음속으로 빌었다.

왜 그랬을까? 지금 와서 짐작하건대 그 편안함의 이유는 아마도 불교에서 말하는 하심(下心)을 어렴풋이나마 체험한 때문이 아니었을까싶다. 스스로를 낮추고 상대를 떠받드는 행위.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이는 단순한 행동이 사람의 마음상태까지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게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면 그날, 평화로웠던 내 마음의 상태는 어떻게 설명해야 될지.

불가리아 소피아 시내.
 불가리아 소피아 시내.
ⓒ 류태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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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리아의 수도 소피아엔 직각으로 축조된 거대한 건축물이 많다. 권위주의의 한 양상 같아 그다지 좋아 보이진 않았다.
 불가리아의 수도 소피아엔 직각으로 축조된 거대한 건축물이 많다. 권위주의의 한 양상 같아 그다지 좋아 보이진 않았다.
ⓒ 류태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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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리아정교회 성당에서 홀로 노래를 듣다

터키의 이스탄불에서 오후 11시쯤 출발하는 야간 기차를 타고 불가리아 소피아로 가는 길. 2번의 여권 검사 탓에 기분을 망쳤다. 터키-불가리아 국경을 넘은 새벽. 불가리아 국경경찰인지 세관원인지 정체를 정확히 알 수 없는 제복 입은 여성이 잠든 나를 툭툭 친다. 억지로 눈을 뜨니 무심한 표정으로 묻는다.

"어디 가?"
"나? 불가리아 가지."
"왜(Why)?"

아니, 왜라니. 이런 불친절한 검문 태도엔 어떻게 대처해야하나 난감했다. 바로 얼마 전까지 이란과 터키 국경에서 환한 미소의 친절한 경찰과 세관원을 만나온 터라 더 기분이 상했다. 하지만, 여긴 내 나라가 아닌 외국. 발끈하는 감정을 얼굴에서 숨기고 점잖게 답했다.

"소피아가 좋다고 해서 놀러 가는데."

내 대답엔 일언반구도 없이, 쌀쌀한 표정으로 여권을 돌려주며 제 볼일 다 봤다는 식으로 휙 돌아나가는 제복. 2시간 후쯤엔 같은 상황이 반복됐다. 막 동이 틀 무렵. 이번엔 제복 입은 남성이다. 그 역시 표정이 없었고, 내게 던져진 질문은 앞 상황과 맞추기라도 한 듯 똑같다. "어디 가냐?" "왜?"

2차대전 이후 권위적인 독재 속에서 오래 살아온 탓인지, 불가리아 사람들의 첫인상은 차갑고 사무적이며 시니컬했다. 그런 모습 앞에서 길을 물으면 손목을 끌고 목적지까지 바래다주는 터키와 이란 사람들 같은 호의적인 태도를 기대할 순 없었다. 게다가 소문(?)처럼 요구르트가 맛있지도 않았다.

다소 기분 상한 심사 탓이었다. 소피아에서의 4일. 도심 한가운데 칼로 두부를 자른 듯 직각으로 서 있는 웅장한 건물들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대부분이 독재정권 시절 축조된 관공서로 짐작되는 것들. 중심가를 피해 사람들 표정에 웃음이 조금은 녹아있는 재래시장에서 주로 시간을 보냈다. 1kg에 1유로(1500원)도 하지 않는 크고 달콤한 체리가 우중충한 기분을 달래줬다.

불가리아 소피아의 재래시장. 값싼 과일들이 가득했다. 서민들의 사는 모습도 정감 있었다.
 불가리아 소피아의 재래시장. 값싼 과일들이 가득했다. 서민들의 사는 모습도 정감 있었다.
ⓒ 류태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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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리아 소피아 시내 중심가엔 거대한 성당이 흔하다. 황금빛 지붕이 이채롭다.
 불가리아 소피아 시내 중심가엔 거대한 성당이 흔하다. 황금빛 지붕이 이채롭다.
ⓒ 류태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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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그 나흘 중 어떤 하루였다. 소피아 변두리를 어슬렁거리던 내가 무슨 마음에선지 불가리아정교회 성당엘 들어가게 됐다. 시내 중심가에 지어진 이름난 성당에 비하면, 작고 낡고 보잘 것 없는 곳이었다. 실내는 어둡고 눅눅해 어디선가 곰팡이 냄새가 풍겨올 것 같았다. 그 흔한 성화 한 점 걸려있지 않은 성당.

뭘 해야 할지 모를 어색하고 복잡한 감정. 그때, 신부인지 수사인지 모를 한 사내가 온몸을 휘감은 검은 옷을 입고 나타났다. 그리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의 손에서 흔들리는 조그만 향갑이 연기를 피워 올리고 있었다. 그게 불가리아정교회의 성가(聖歌)였는지, 일종의 기도양식이었는지는 아직도 알지 못한다. 그러나, 웅얼거림에 가까웠던 음률은 귓가에 선명하다.

캄보디아 동승 앞에 무릎 꿇었을 때와 유사한 감정이 몰려왔다. 신부 혹은, 수사의 노래가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긴 나무 의자에 얌전히 앉아 귀와 마음을 동시에 기울였다. 당시의 평안했던 마음을 어떻게 설명해야할까.

마침내 웅얼거림이 끝난 후 그가 내 쪽을 향해 작은 미소를 보냈다.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한 나는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은 채 두 손을 모았다. 이건 뭔가? 무신론자의 기도하는 제스처. 다시 고민해도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불가리아의 거리 풍경. 초록빛 나무와 붉은색과 노란색이 주조를 이루는 그림들의 하모니가 예쁘다.
 불가리아의 거리 풍경. 초록빛 나무와 붉은색과 노란색이 주조를 이루는 그림들의 하모니가 예쁘다.
ⓒ 류태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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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에게 기댄다는 것의 편안함

10개월간 이어진 여행에서 돌아온 지 1년 하고도 한 계절이 지났다. '집이 아닌 길 위에서 나는 무엇을 보고 배웠던가'를 가끔 자문한다.

신과 신을 믿는 사람들에 대한 편견에서 벗어나, 절대자와 종교에 관해 열린 시각을 가지려 하는 태도변화. 이건 여행이 내게 준 작지 않은 선물이다. 외롭고, 자신의 힘만으론 이겨내기 힘든 고통에 직면했을 때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다는 것. 불완전한 존재인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럴 수 있지 않을까.

신을 믿고, 종교를 가진다는 게 아직까진 나와 무관한 일이다. 그러나, 그 이성적 결심과는 별개로 캄보디아 동승 앞에서, 불가리아 성당 안에서 잠시잠깐 맛보았던 '설명 힘든' 평안함은 자꾸 그리워진다. 왜 이러지?


태그:#종교, #캄보디아, #불가리아, #절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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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꽃> <한국문학을 인터뷰하다> <내겐 너무 이쁜 그녀> <처음 흔들렸다> <안철수냐 문재인이냐>(공저) <서라벌 꽃비 내리던 날> <신라 여자> <아름다운 서약 풍류도와 화랑> <천년왕국 신라 서라벌의 보물들>등의 저자. 경북매일 특집기획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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