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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비아. 노란 등이 켜지는 저녁 무렵이면 고풍스런 건물들이 더 멋스러워 보인다.
 세르비아. 노란 등이 켜지는 저녁 무렵이면 고풍스런 건물들이 더 멋스러워 보인다.
ⓒ 홍성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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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밤. 홀로 낯선 도시에 도착한다는 건 설레는 동시에 조금은 두려운 체험이다. 세르비아 베오그라드역. 기차에서 내린 건 자정이 훨씬 지난 오전 2시 무렵. 이럴 땐 장 그르니에의 산문집 <섬>의 한 구절을 조용히 되새겨 보면 마음이 다소 가라앉는다.

'새벽녘, 나는 안개 낀 낯선 항구에 도착하고 싶었다.
거기서 나, 가난하고 겸허하게 살고 싶었다.
비밀이 없는 삶이란 서랍 없는 책상처럼 허망한 것...'

베트남의 고풍스러운 도시 훼(Hue)와 아라비아해의 파도가 일렁이는 인도의 마르가오(Margao)역에 도착했을 때도 사방이 캄캄한 밤이었다. 낯선 공간과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 속에 혼자 남겨진 느낌. 누구나 막막함과 당혹감에 휩싸인다. 그러나, 지나치게 겁먹거나 걱정할 필요는 없다. 혼자 떠난 여행이라면 그 정도 곤경은 이미 예상했을 터.

세르비아 도시 곳곳에서 만날 수 있는 조형물들. 공원과 녹지의 비율이 높아 더운 날씨임에도 쾌적함을 느낄 수 있었다.
 세르비아 도시 곳곳에서 만날 수 있는 조형물들. 공원과 녹지의 비율이 높아 더운 날씨임에도 쾌적함을 느낄 수 있었다.
ⓒ 홍성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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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든 작든 여행지에서의 문제란 어떻게든 해결되기 마련이다. 내 경우도 그랬다. 훼에선 고교 동창끼리 여행 온 이들의 도움을 받아 근처 숙소를 찾아갈 수 있었고, 인도 마르가오에선 역 바닥에서 반쯤 잠들어 있던 오토바이 택시 기사를 깨워 해변 인근 호텔로 새벽 공기를 가르며 달렸다. 가끔은 일이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두는 게 최상의 해결책일 수도 있는 것이다.

베오그라드역 또한 그랬다. 대부분이 잠든 늦은 밤임에도 국경을 넘어 그 시간에 도착한 여행자들을 위해 역 주변 숙소에서 적지 않은 호객꾼들이 나와 있었다. 저마다 준비한 팸플릿 형태의 숙소 홍보 전단을 보여주며 자신의 호스텔 혹은 게스트하우스로 가자고 채근했다. 가격도 생각보다 저렴했다. 도미토리의 경우 간단한 아침식사를 포함한 1박 가격이 10유로(1만5000원) 정도.

밝은 갈색머리칼을 길게 늘어뜨린 젊은 여성이 내게 다가와 묻는다. 초록빛 눈동자가 예쁘다. "우리 호스텔로 갈래요?" 내미는 전단을 보니 예상했던 가격이다. 비슷한 비용에 유사한 조건이라면 미인을 따라가서 나쁠 게 뭐 있겠는가. "그럽시다. 여기서 가깝죠?"

지저분한 숙소서 스페인·세르비아 청년들과 어울리다

배낭여행의 즐거움 중 하나는 숙소에서 만나는 사람들과의 교류다. 국적과 종교·인종은 다르지만 찾아보면 공통의 관심사가 적지 않다.
 배낭여행의 즐거움 중 하나는 숙소에서 만나는 사람들과의 교류다. 국적과 종교·인종은 다르지만 찾아보면 공통의 관심사가 적지 않다.
ⓒ 홍성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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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 앞을 벗어나니 인적이 눈에 띄게 드물어졌다. 앞장서 걷는 여자를 따라 나 역시 발걸음을 빨리했다. 10분 정도 갔을까. 전단지에 찍힌 숙소 사진과는 전혀 다른 낡고 허름한 건물이 나타났다. 내부는 더 지저분했다. 자주 세탁하지 않은 게 분명한 침대 시트가 때에 절어 반질반질.

약간 실망했다. 그러나 그 마음도 잠시. '내처 살 것도 아니고 하루 이틀 묵고 떠날 건데 뭐 어때'라는 낙관으로 마음을 바꿨다. 한국 시골 여인숙도 1만5000원에는 못 구한다. 그 가격에 뭐 대단한 시설과 서비스를 바라겠는가. 생각을 돌리니 마음도 편해졌다. 내가 숙박부에 이름과 여권번호를 적는 것까지 본 그 '호객꾼 처녀'는 웃음으로 인사를 대신하고 밖으로 나갔다. 아마 다시 역으로 가서 다른 손님을 데려오겠지.

오래되고 깨끗하지 못한 숙소였지만 분위기는 좋았다. 스페인에서 온 대학생 10여 명이 단체로 묵고 있었고, 스물넷이라는 호스텔 주인의 친구들도 왁자지껄 모여 스프라이트에 보드카를 섞어 마시며 뭐가 그렇게 좋은지 1분 간격으로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말하자면, 스페인 청년 절반에 세르비아 청년 절반, 거기에 중년의 동양 사내 하나가 낀 풍경이었다.

나이로 보자면 그들은 내 조카뻘이지만, 서로가 낯선 여행자들에게 그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스페인 영화감독 페드로 알모도바르와 여배우 페넬로페 크루즈, 세르비아의 테니스 스타 노박 조코비치와 한국의 걸그룹 소녀시대의 이야기가 앞뒤 없이 오가는 가운데 모두가 잠을 잊었다.

그 시끌벅적한 주석에서 나를 숙소까지 데려온 여자가 호스텔 주인의 여자친구란 걸 알게 됐다. 다소 우락부락한 인상의 남자친구를 대신해 상냥한 말투와 호감 가는 인상으로 호스텔 손님을 끌어모으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게다가 그녀는 국적도 세르비아가 아닌 에스토니아. 외국까지 와서 연인을 위해 쉽지 않은 호객 일을 자처한 여자. 역시, 사랑은 힘이 세다.

여행을 하다 보면 국적이 다른 커플을 가끔 만난다. 마케도니아에서는 이탈리아 여자와 벨기에 남자 커플을 봤고, 불가리아에선 체코 여대생과 핀란드 사내의 다정다감한 연애를 목격했다. 알바니아에선 독일 남자, 알바니아 여자 커플과 커피를 함께 마셨다.

사랑하는데, 국적 따위가 무슨 제약일까

베오그라드 곳곳에서 만난 정체를 알 수 없는 그림. 일종의 그래피티 같은데 어떤 의미에서 그려진 것인지는 아직도 모른다.
 베오그라드 곳곳에서 만난 정체를 알 수 없는 그림. 일종의 그래피티 같은데 어떤 의미에서 그려진 것인지는 아직도 모른다.
ⓒ 홍성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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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난 커플들에 한정시켜 보자면 사랑에 빠진 이에겐 상대의 국적 따위가 아무 상관 없는 모양이었다. 아니, 그 이전에 서로 다른 국적은 연애를 시작하는데 방해 요소가 될 수 없는 듯했다.

등산과 수영 등 활동적인 레포츠를 즐기는 이탈리아-벨기에 커플은 가끔은 이탈리아어로 때로는 프랑스어로 내일의 일정을 논의하며 누가 보든 말든 10초당 한 번씩 입을 맞췄다. 체코-핀란드 커플은 남자가 두 살 아래인데도 누나를 에스코트하는 모습이 의젓했다. 종교의 벽을 뛰어넘어 사랑을 나누고 있는 알바니아-독일 커플의 모습도 보기에 썩 좋았다.

국경이 국경처럼 인식되지 않는 유럽. 그런 외부적 환경은 사람의 심성에도 영향을 미치는 게 아닐까. 태어난 곳이 다를 뿐, 동시대를 호흡하며 유사한 고민과 희망 속에서 사는 젊은이들에게 인종과 종교·국적이 같은 사람하고만 연애하라는 건 또 다른 형태의 폭력일 수도 있다. 인간은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 사랑의 대상을 선택하는 것 역시 어떤 제약에 휘둘릴 필요가 없지 않겠는가.

조금은 방향이 다른 문제제기일 수도 있지만, 최근 한국에서 급속도로 늘어나고 있는 한국인 남성-외국인 여성, 외국인 남성-한국인 여성 커플에 대해서도 같은 생각을 가진다면 색안경을 끼고 그들을 바라볼 이유가 없지 않을까 싶었다.

시내 곳곳을 점령한 저 소들은 대체 뭐지?

베오그라드에서 만난 소 조형물.
 베오그라드에서 만난 소 조형물.
ⓒ 홍성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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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인을 따라 에스토니아에서 왔다는 여자와 호방한 성격의 세르비아 남자를 다시 만난 건 칼레메그단이란 거대한 성(城)이 지척인 베오그라드 언덕 위에서였다. 도나우강과 사바강 물결이 쿨렁이며 합쳐지는 모습이 내려다보이는 낭만적인 장소.

새벽까지 이어진 호스텔 호객에 지쳤을 에스토니아 여자의 어깨를 나긋나긋한 손길로 마사지해주는 세르비아 사내의 모습이 190cm에 육박할 커다란 덩치와는 안 어울리게 귀여웠다. 간지러운 것인지 연인의 손을 가볍게 쳐내면서도 행복한 웃음을 짓는 여자.

맞다. 막 연애를 시작한 20대 빛나는 시절이라면 둘이 있는 곳이 곧 세상의 중심이 되는 것. 그게 세르비아든 한국이든. 그 빛나는 청춘을 허무하게 지나온 나는 그저 부러울 뿐이었다.

둘에게 다가가 "늦은 점심이라도 함께 먹자"고 하려다가 발길을 멈췄다. 지금 저들의 배를 불리는 건 감자튀김이나 햄버거 따위의 음식이 아닌 둘만의 밀어(蜜語)일 것이란 생각에서였다. 그 순간 그네들 사이에 끼어드는 건 주제넘은 일인 동시에, 눈치 없는 행동일 것이 분명했을 터.

이 소들은 대체 왜 베오그라드를 배회할까?
 이 소들은 대체 왜 베오그라드를 배회할까?
ⓒ 홍성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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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토니아-세르비아 커플을 뒤로 하고 시내로 향했다. 세르비아는 한국과 비슷하게 외국의 침략을 여러 차례 겪었고, 내전의 상처 또한 안고 있는 나라다. 파괴와 재건을 거듭한 베오그라드의 역사 역시 서울과 흡사하다. 인종과 종교가 야기한 야만의 과거를 추상적으로나마 떠올리며 걷고 있는데…. 저건 대체 뭐지?

도심 거리 곳곳을 소가 점령(?)하고 있다. 소를 형상화한 조형물의 색깔과 질감·형태가 다 조금씩 다르다. 대체 저렇듯 많은 소를 시내 중심가에 풀어놓은 이유는 뭘까? 궁금증이 몰려왔다. 누구에게 물어봐야 명쾌한 대답을 들을 수 있을까.


태그:#세르비아, #에스토니아 여자, #베오그라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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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꽃> <한국문학을 인터뷰하다> <내겐 너무 이쁜 그녀> <처음 흔들렸다> <안철수냐 문재인이냐>(공저) <서라벌 꽃비 내리던 날> <신라 여자> <아름다운 서약 풍류도와 화랑> <천년왕국 신라 서라벌의 보물들>등의 저자. 경북매일 특집기획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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