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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비아 베오그라드 중앙역. 고풍스런 건축양식이 근사했지만, 그에 어울리는 청결함은 찾아 보기 힘들었다.
 세르비아 베오그라드 중앙역. 고풍스런 건축양식이 근사했지만, 그에 어울리는 청결함은 찾아 보기 힘들었다.
ⓒ 홍성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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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비아.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주도국이었던 이 나라에 관해 내가 아는 것이라곤 칸영화제와 베니스영화제 그랑프리를 수상한 영화감독 에밀 쿠스트리차가 활동한 곳이라는 정도였다. 영화 관람을 통해 습득한 지식이 옛 유고 연방과 세르비아에 관해 아는 것의 전부였다는 이야기.

냉철한 사실주의에 남아메리카 예술의 특징 중 하나인 마술적 요소를 결합한 '환상적 리얼리즘'에 기반을 둔 쿠스트리차의 영화. 그중에서도 <집시의 시간>과 <언더그라운드>는 슬라브족 특유의 쾌활함과 에너지, 위트를 극대화해 보여줌으로써 한국은 물론, 세계적으로 화제를 모았다.

1990년대 초반부터 말까지.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몬테네그로, 코소보 등 연방국들의 독립선언과 이어진 내전으로 유고슬라비아는 큰 비극을 겪었다. 인종과 종교의 다름을 이유로 서로가 서로를 죽고 죽이는 참혹한 시간이 오랜 기간 지속된 것. 그 당시 언론은 이 지역의 또 다른 명칭인 발칸반도를 '유럽의 화약고'라 칭했다. 내전으로 인해 수백만 명이 죽거나, 다쳤다.

옛 유고 연방에 전쟁의 포연이 온전히 걷힌 것은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다. 인종과 종교간 비극의 불씨는 아직도 도처에 남아있지만,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평화로운 시기가 시작된 지 10년을 넘어서고 있는 것. 나는 그 지역 나라 중 마케도니아와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와 몬테네그로, 보스니아와 세르비아를 여행했다.

도나우강이 유유하게 흐르는 조용한 도시 노비사드.
 도나우강이 유유하게 흐르는 조용한 도시 노비사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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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비사드 역. 나른한 여름날 오후 풍경이다.
 노비사드 역. 나른한 여름날 오후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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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유엔 사무총장과 똑같이 생겼다?

2011년 무더위가 한창이던 8월.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에서 출발한 기차를 타고 10시간 가까이를 달려 세르비아 베오그라드 중앙역에 도착했다. 동유럽의 중심부를 관통하는 그 구간의 풍경은 한국과는 딴판이었다. 온통 감자밭과 해바라기밭 천지였다. 높은 산도 거의 없었다. 덕분에 지평선이 보이는 너른 벌판을 달렸다.

쌀이 주식인 우리와 달리 유럽인들은 감자를 거의 매일 먹는다. 그걸 증명하듯 차창 밖 풍경이 1시간 내내 감자밭인 경우도 있었다. 감자밭을 지나면 해바라기밭, 해바라기밭을 지나면 다시 광대한 감자밭이 반복되는 풍경. 녹음 짙은 그 풍경에 눈이 편안해졌다.

오래된 열차와 낡은 철로 탓일까? 동유럽 기차는 버스보다 훨씬 느리다. 보스니아에서 세르비아까지 버스로는 5시간이면 간다는데 기차는 그 2배의 시간이 필요하다. 대신 가격은 절반으로 저렴했다. 시간 많은 여행자들에겐 나쁘지 않은 선택.

6명이 앉을 수 있게 만들어진 2등 칸에 3~4명이 앉아 느긋하게 바깥 경치를 즐기며 베오그라드를 향했다. 기차에 오르기 전 준비한 간식과 맥주 따위를 동석한 사람들과 나눠 먹고 마셨다. 오스트리아에서 왔다는 대학생 커플과 점잖은 네덜란드 영감님이 같은 칸에 앉았다.

그런데, 전직 역사교사였다는 네덜란드 영감님이 내 국적을 말하기도 전에 "너 한국 사람 아니냐"고 먼저 묻는다. "맞는데, 어떻게 아셨어요"라고 대답했다. "딱 보니 유엔 사무총장인 미스터 반(기문)과 똑같이 생겼잖아." "네?~" 맞은편에 앉은 오스트리아 커플까지 네덜란드 영감님의 견해에 수긍의 고개 끄덕임을 보였다.

반기문은 1944년생으로 당시 나이 67세. 나는 마흔 살이었다. 아버지뻘인 그와 내가 똑같이 생겼다니. 세계적인 유명인과 생김새가 비슷하다는 그의 말. 물론, 나쁜 뜻으로 한 말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내 입장에선 웃어야할지 울어야할지 표정관리가 힘들었다.

우리가 서양인 얼굴의 차이점과 공통점을 인식하는 게 어려울 때가 있는 것처럼, 서양인 역시 동양인의 안면 특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생긴 해프닝이었을까? 이건 그래도 약과다. 세르비아 북부의 노비사드(Novi Sad)에선 내 얼굴과 관련해 더 황당한 이야기를 들었으니….

노비사드의 주택가. 커다란 나무가 숲을 이루는 풍경이 이채롭다.
 노비사드의 주택가. 커다란 나무가 숲을 이루는 풍경이 이채롭다.
ⓒ 홍성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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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비사드 도나우 강변을 따라 조각 작품들이 곳곳에 들어서있다.
 노비사드 도나우 강변을 따라 조각 작품들이 곳곳에 들어서있다.
ⓒ 홍성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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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비사드, 산책하기 더없이 좋은 도시

독특한 도시 구조와 거리에 즐비한 소(牛) 조형물이 인상적인 세르비아의 수도 베오그라드에선 사흘을 묵었다. 그곳에서의 추억담은 잠시 뒤로 미루고 일단 '황당한' 이야기를 들었던 노비사드 여행담부터 시작하려 한다.

노비사드는 베오그라드에서 북쪽으로 30km 가량 떨어진 도시. 깨끗하게 정돈된 시가지와 도심 외곽을 흐르는 도나우강(江)이 인상적이었다. 역시 기차를 타고 도착한 도시. 가장 먼저 노비사드 전역에 울울창창하게 들어선 녹지가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강변은 물론, 주택가까지 그 수령을 짐작키 힘든 커다란 나무가 가득했다. 산책하기 좋은 도시였다.

10여 년 전쯤. 경기도 과천에서 산 적이 있다. 한국에서는 그래도 녹지비율이 높아 쾌적하다는 지역. 하지만, 노비사드는 그 정도가 아니었다. 도시 전체가 짙푸른 녹색의 허파처럼 느껴졌다. 걸어 다니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음에도 이틀 내내 나무 아래와 도나우 강변을 느리게 서성댔다.

세르비아에선 베오그라드를 제외하고 가장 큰 도시 중 하나라는 노비사드. 하지만, 느낌상으론 그렇게 다가오지 않았다. 한국의 면 정도 규모와 분위기로 느껴졌다. 교통량이 적고, 대기오염이 덜해서였을 것이다.

섭씨 35도를 오르내리는 날씨였지만, 무지막지하게 큰 나무 그늘에 앉아 물놀이 하는 아이들을 지켜보노라면 더위는 저만치 물러갔다. 강변을 따라 설치된 조각 작품을 보는 것도 즐거웠다. 한강유원지처럼 유람선 형태로 꾸며진 강변 레스토랑에선 주스도 한잔 마시고.

예쁜 건물들이 줄줄이 들어선 시내에선 운 좋게 영화 촬영 현장도 볼 수 있었다. 아마도 1차 세계대전을 다룬 작품인 듯 마차와 클래식한 디자인의 차가 함께 등장했고, 팔과 다리가 늘씬한 남녀배우들이 대기하는 카페에선 그들과 눈인사도 나눴다. 어느 나라 할 것 없이 영화배우들은 미남미녀였다.

수령을 짐작하기 힘든 거대한 나무가 도나우 강변을 따라 가득하다. 노비사드의 매력을 더하는 풍광.
 수령을 짐작하기 힘든 거대한 나무가 도나우 강변을 따라 가득하다. 노비사드의 매력을 더하는 풍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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깔끔하게 정돈된 아기자기하고 예쁜 도시 노비사드.
 깔끔하게 정돈된 아기자기하고 예쁜 도시 노비사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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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나라 프레지던트 킴(Kim)과 닮았네"

오랜 시간의 산책과 영화 촬영 현장 구경이 지겨워진 나는 잠시 쉬려고 묵고 있던 '소바 호스텔'로 돌아왔다. 유럽과 할리우드 영화포스터가 벽면 가득 걸린 깔끔한 숙소. 50대 초반으로 보이는 주인은 동양문화에도 관심이 많은 것 같았다.

노비사드에 도착한 첫날 저녁. 벨기에 할아버지와 독일에서 온 여대생들, 나와 숙소 주인이 공용거실에서 함께 맥주를 마셨다.

동유럽을 다니다보면 아직 한국에 관해 상세한 걸 아는 이들이 많지 않다는 걸 알게 된다. 그날도 그랬다. 독일 여학생 하나가 "한국은 중국과 같은 문자를 쓰느냐"고 물었다. 또 시원찮은 영어 실력으로 그렇지 않다는 걸 설명해야겠구나 생각하는 찰나, 숙소 주인이 먼저 나섰다.

"한국은 중국과는 별개의 나라이고, 언어와 문자도 다르다. 중국 문자는 사물의 형체를 본뜬 것인데, 한국의 경우엔 아니다. 수백 년 전에 어떤 왕이 그들만의 문자를 만들었다. 일본 문자는 중국, 한국과는 또 다르다"는 요지의 설명을 하는 숙소 주인장. 나는 그 '어떤 왕'이 '킹 세종'이라는 것만 부연했다. 내 수고를 덜어준 셈이다.

그가 한국에 관해 알고 있는 건 그 외에도 많았다. 삼성 핸드폰이 노키아 제품보다 더 많이 팔리고, 현대와 대우가 한국에서 가장 큰 자동차 생산업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거기에 더해 홍상수와 김기덕의 영화 DVD를 가지고 있으며, 그 작품들이 "동양적인 독특함을 보여 준다"는 평까지. 한국영화에 관한 그의 판단이 옳고 그름을 떠나 "저 정도면 세르비아 노비사드에선 최고의 지한파군"이라는 혼잣말이 나올 정도였다. 그런데….

낮잠을 자기 위해 숙소로 돌아온 내가 가벼운 인사를 전하자, 소파에 기대 앉아 책을 읽던 그가 대뜸 이런 말을 했다. "어제부터 봤는데 너 말이야, 너희 나라 대통령인 미스터 킴과 너무 닮았어." 미스터 킴? 한국 대통령의 패밀리 네임(姓)은 '리' 혹은, '이'인데.

갑작스런 말에 황당해하는 내 표정을 보며 그가 덧붙였다. "프레지던트 킴은 세르비아에서도 유명해. 미국이 무서워하는 핵을 가졌잖아."

아, 그는 내가 북한에서 온 여행객으로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반기문에 이어 김정일과 닮았다니. 갑자기 터져 나온 웃음을 참기가 어려웠다. 그렇다면 그는 김기덕과 홍상수도 북한의 영화감독인 줄 알았던 걸까?


태그:#세르비아, #노비사드, #반기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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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꽃> <한국문학을 인터뷰하다> <내겐 너무 이쁜 그녀> <처음 흔들렸다> <안철수냐 문재인이냐>(공저) <서라벌 꽃비 내리던 날> <신라 여자> <아름다운 서약 풍류도와 화랑> <천년왕국 신라 서라벌의 보물들>등의 저자. 경북매일 특집기획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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