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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명은 영양실조이고, 1명은 굶어 죽기 직전인데 15명은 비만입니다. 이 마을의 모든 부 가운데 6명이 59%를 가졌고 그들은 모두 미국사람입니다. 또 74명이 39%를 차지하고 겨우 2%만이 20명이 나누어 가졌습니다."-<세계가 만일 100명의 마을이라면> 이케다 가요코 지음 | 한성례 옮김 ㅣ국일미디어 펴냄

지난 2002년에 읽었던 <세계가 만일 100명의 마을이라면>에 나오는 한 대목입니다. 이 작은 책을 읽는 것만으로도 나는 이미 상위 5% 안에 들어가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책에는 "은행에 예금이 있고 지갑에 돈이 들어 있고 집안 어딘가에 잔돈이 굴러다니는 사람은 마을에서 가장 부유한 8명 안에 드는 사람입니다. 자가용을 소유한 사람은 7명 안에 드는 사람입니다. 1명은 대학교육, 2명은 컴퓨터를 가지고 있습니다"는 내용도 나옵니다.

열 명 기독인을 통해 본 한국교회...

지구인구 63억 명을 100명으로 축소한 것이 너무 비약이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런 수치를 통해 우리가 얼마나 부유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갑자기 11년 전 읽었던 <세계가 만일 100명이라면>을 언급한 이유는 기독교인 10명을 통해 현재 한국교회가 '말하고 싶지 않은', '숨기고 싶은 어둠'을 과감히 겉으로 드러낸 한 책 때문입니다.

당신들의 기독교: 환상의 미래와 예수의 희망
 당신들의 기독교: 환상의 미래와 예수의 희망
ⓒ 글항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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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은 간다>, <세속의 어긋남과 어긋냄의 인문학>, <영화인문학>, <동무론> 등으로 독자들 사랑을 받아왔던 김영민 전 감리교신학대학 교수가 2011년 월간 <기독교 사상>에 연재한 글을 묶어 새롭게 재구성한 <당신들의 기독교>(글항이라 펴냄)가 그 책입니다.

책쓴이는 신자 열 명의 삶을 통해 변질된 기독교를 파헤치면서 진정한 종교적 삶이 무엇인지 말합니다. 변질된 기독교를 회복하지 않으면 더 이상 기독교는 희망이 없습니다.

이미 현상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2005년 통계청이 발표한 '인구주택총조사'에 따르면 1995년 876만 명이던 개신교 신자는 10년 뒤인 2005년에는 861만6천 명으로 줄었습니다. 한국교회 그 동안 1400만 명 신자라며 '신자부풀리기'를 했던 적도 있지만, 실제는 800만 명 안팎입니다. 이에 비해 천주교는 지난 1995년 345만 명에서 2005년 514만 6000명으로 50% 정도 늘었습니다.

개신교는 내리막길로 접어 든 이유는 교회가 그 본질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겉모습은 화려하고 거룩하지만, 안은 썩어 곪아 들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일부 대형교회 목사들, 아니 많은 목사들이 세상을 향해 "사탄아 물러가라"를 외칩니다. 김영민의 <당신들의 기독교>를 지금 읽어야 할 이유입니다.

나 역시 다른 '환락가'를 찾는 목사였다...

<당신들의 기독교>에 나오는 기독교 신자 면면을 보면, '10년간 한 차례도 주일 대 예배에 빠진 적이 없으며, 7년째 십이조(十二祖)를 드리는 옹골지게 독실한 교회 재무부장 A, "욕망의 상대를 부모나 남편 대신 신이라는 환상적 대상선택(Objektwahl)으로 교체"라고 생각하는 교회 권사 B, 한 주간의 수업이 끝나는 금요일 저녁이 되면, 동료와 더불어 꼬리곰탕 같은 기름기 있는 음식을 먹은 뒤 강남의 유흥가로 향하는 목사 C도 있습니다.

"'목사'요 교수라는 사회적 기표를 페르소나로 삼아 살아오면서 어렵사리 숨기고 억압해야만 했던 어떤 욕동(Trieb)은 이 수컷 동아리의 패거리 의식 속에 순발력 있게 추진(Trieb-en)된다.…기업가의 삶이 기획이듯이, 그들의 삶은 '추진'이다. 그리고 오입(悟入)의 칸트와 오입(誤入)의 사드 사이를 왕래하는 이 목사들의 순례처는 이스라엘의 어느 곳이나 사회적 소외자의 어느 장소가 아니라 강남의 환락가다."(본문에서)

차마 얼굴을 들 수가 없습니다. 솔직히 이 대목에서 "나는 이런 목사는 아니라"라고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목사인 나 역시 목사C와 다를 것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강남 환락가를 가지 않았다고 나는 "너보다는 더 거룩해"라는 말을 없을 정도로 나는 다른 '환락가'를 찾아 나선 목사였기 때문입니다.

서울시민이라면 다들 보았을 '불신지옥', '예수천당' 글귀를 통해 "세상 끝 날까지 전파할 복음 전도자"인 '신자 I'같은 이도 있습니다. 자기가 전하는 예수를 믿지 않으면 다 지옥불에 떨어질 존재입니다. 예수님은 사랑하라고,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하셨는데 신자 I가 보는 세상은 다 멸망 받을 존재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전한 사랑과는 다릅니다. 그러기에 글쓴이가 보기에 신자 I는 "예수의 진지함도, 당대 체계에 대한 급진적 저항과 혁명의 비전을 장착한 전사도 아니"고 일갈합니다.

"예수의 가족은, 사회적 동화의 정념 속에서 동일시할 수 있는 혈친이 아니라, 성경 속에 잘 표명되었듯이, 차라리 어떤 희망('하나님의 나라')을 향해 당대의 체계와 불화하면서 걸어나가는 동무공동체라고 해야 할 것이다."(본문에서)

수백억 원짜리 예배당은 단박에 지을 수 있는 이른바 '대형교회'에 다니는 장로 G는 10년째 교회 재정을 맡고 있습니다. 규모나 위세에서 으뜸으로 치는 한 교회의 장로입니다. 이쯤 되면 장로 중에도 '알짜 장로'입니다.

'뒷돈' 받아 십일조? 하나님 속이는 일...

하지만 그의 본질은 이름만 대면 입이 쩍벌어지는 재벌이 세운 종합병원 내과 과장으로 월급 천만 원이 넘습니다. 하지만 월급 천만 원은 '껌값'입니다. 그는 한 사모 모임에서 유식하게 말하면 '커미션', 무식하게 말하면 '뒷돈'인 관행을 자랑하면서 "몇 차례만 응하면 집 한 채쯤은 장만할 수 있다"고 합니다. 뒷돈 받은 것으로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리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을 속이는 일입니다.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둑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둑질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봉헌물이라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둑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말라기 3장 8-9절)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마태복음 23장 23절)

그리고 김영민도 단호하게 말합니다.

"'많이 벌어 많이 내겠다'는 변명이 얹혀 있는 자리가 실은 얼마나 썩고 곪은 코드로 얽혀 있는지, '자본제적 풍요의 신학'이란 완벽한 몰신학일 뿐이며, 다수의 기독교인이 내세우는 소망이란 게 자본을 향한 호객을 멈추지 않는 여리꾼들의 가면-다만 자신의 몸에 몹시 가까운 탓에 마침내 제 몸이 되어버려서, 자신의 가면을 가리킬 수 없는 가면-에 불과하다는 사실만을 말하려는 게 아니다. 그것은 새로운 형식의 '계급' 혹은 신분에 관한 얘기다."(93쪽)

몇 년 전 한국교회는 '청부론'이 유행(?)한 적이 있습니다. '청부론'을 풀어쓰면 '깨끗한 부자'로 핵심은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이 부자 되기를 원하신다'입니다. 돈을 일만 악의 뿌리로 가르침을 받았던 신자들에게는 솔깃한 개념으로 부를 소유하는 것에 대한 부담을 들어주었습니다. 하지만 자크엘룰이 <하나님이냐 돈이냐>(대장간 펴냄)에서 말한 것처럼 현실에서는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성경이 저주하는 대상은 부자들의 어떤 행위가 아니라, 필연적으로 하나님께 적대적일 수밖에 없는 그들의 전체적인 삶 자체다. 아브라함과 욥과 솔로몬을 제외하면 의로운 부자나 좋은 부자는 없다. 아브라함과 욥과 솔로몬은 비록 돈은 많이 소유하고 있었지만 성경에  말하는 [부정적]부자들과는 전혀 다른 영적 자세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지금도 끊임없이 장로G가 되기를 바랍니다. 교회는 헌금많이 하는 장로가 있어 좋고, 그 장로는 '믿음 좋다'는 주위 평판이 있어 좋습니다. '누이좋고 매부 좋은'것입니다.

'내 마음대로 믿음', 한국교회 비극 시작...

하지만 글쓴이는 "이미 우리 시대의 교회는 사회적 강자와 부자들을 대체하거나 각성시키는 어떤 (초대 교회들과 같이) '절실한 약자들로 구성된 희망의 공동체'가 아니다"라고 질타합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요?

"한국의 개신교인들은 공부를 매개로 모종의 신념에 이르는 게 아니라, 제 '마음'대로 믿음을 얻은 뒤에 그제야 신학을 공부하는 것이다. 이 탓에 신학은 애초 그 정당성(legitimacy)이 의심스러운 신념을 정당화(justification)하는 장치로서 동원되곤 한다. 이 때문에 믿지 않고는 사유(공부)할 수 없는 한국 신학의 독특한 풍경이 연출된다."(본문에서)

생각하는 힘을 상실한 한국교회는 목사가 특정인을 "빨갱이", "반민주의자", "김정일은 사탄"이라고 하면 그대로 믿어버립니다. 목사가 '성범죄', '헌금횡령'을 해도 "우리 목사님을 비판하는 자는 사탄"이라고 믿어버리는 것입니다. 김영민이 "은혜를 받기 위함이라면 차라리 죄라도 좋다"는 직격탄이 바로 그 이유입니다.

생각하는 힘, 곧 의심하는 기독인이 필요한 때입니다. 의심하고, 또 의심한 후 얻은 진리는 결코 무너지지 않습니다. 한국교회가 계속 생각하는 힘을 거부할 때 희망은 없습니다. 의심하는 자는 믿음이 없는 자가 아니라 오히려 믿음이 있는 자입니다.

덧붙이는 글 | <당신들의 기독교: 환상의 미래와 예수의 희망> 김영민 씀 | 글항아리 펴냄 ㅣ 9000원



당신들의 기독교 - 환상의 미래와 예수의 희망

김영민 지음, 글항아리(2012)


태그:#한국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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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태어날 때 당신은 울었고, 세상은 기뻐했다. 당신이 죽을 때 세상은 울고 당신은 기쁘게 눈감을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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