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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가 좋아 '거의' 무작정 내려와 눌러 산 지 6개월이 지나고 해가 바뀌었다. 제주에 연고도 없는 육지 촌놈에게 제주살이는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지만 아직까지는 앞으로도 오랫동안 살고 싶은 곳이라는 생각에 변함이 없다.

주위에서 '홀로 사는 제주 생활이 외롭지 않느냐' '고향이 그리울 것 같다' 등의 이야기를 많이 듣지만, 역설적으로 혼자 사는 사람에겐 고향이란게 큰 의미가 없는 듯하다. 내 생각에 고향이란 지역의 문제가 아니고 사람의 문제다. 그리운 사람이 있어야 고향으로서의 의미가 있지 않을까. 제주도는 다행히 그런 외로움이나 적적함을 상쇄하고도 남을 훌륭한 '자연'이 있다. 특정 관광지를 열거할 필요도 없이 섬 전체가 하나의 빛나는 보석이다.

제주도를 여행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바로 '테마'를 정하는 것이다. 차를 빌려 관광지 순례를 다닐 것인가, 올레길을 중심으로 도보여행을 다닐 것인가, 한라산 등반이 목표인가, 가족들과 같이 테마공원을 돌아볼 것인가 아니면 이것들을 적절히 섞어보고 싶은가. 성공적 여행의 가장 중요한 요소인 '동반자'와 의논해 어떤 형태로든지 이런 테마를 정해야 그 여행이 성공할 가능성이 커진다.

제주를 잘 모르는 이들은 제주에는 한라산과 올레길과 여러 관광 포인트와 테마공원만 있는 줄 안다. '가짜 휴식'이 아닌 '참 휴식'을 위해 제주도를 여행하는 이들에게 이런 곳들 외에 진짜로 좋은 곳이 있다. 바로 '숲길'과 '오름'이다.

'곳자왈'(나무와 덩굴과 바위가 원시림처럼 얽혀 있는 곳)이라고 상징되는 각양의 숲길이 (주로 제주의 동북쪽에) 산재해 있어 삼림욕 열풍과 함께 최근에 많은 각광을 받고 있다.

제주에서는 '산'을 오름이라 하는데 육지의 산과는 탄생배경이 달리 화산폭발로 형성됐다. 제주에 있는 350여 개의 오름은 모두 분화구가 있다. 하지만 모양새는 각기 다르다. 대부분 너무 높지도 않고 경사가 가파르지 않아 풍만하고 넉넉한 모양으로 찾는 이들을 품어주는 느낌이 드는 곳이 오름이다.

만약 제주 여행의 테마를 '걷기를 통한 힐링'이나 '복잡하고 번거로운 일상을 벗어나 참휴식을 하는 시간'으로 정했는데 그동안 올레길은 몇 번 다녀와봐서 뭔가 다른 체험을 해보고 싶다고 정했다면? 그것에 딱 맞는 곳이 있다. 제주도 중산간의 숲길과 오름을 오롯이 같이 체험할 수 있는 곳, '갑마장길'이다.

사실 제주에 내려와서도 몇 달 만에 알게 된 이름이다. 아마도 육지사람들은 들어본 적도 없는 명칭일 게다. 가을에 제주 억새를 느끼기 위해 '따라비 오름'에 갔을 때 곳곳에 있던 갑마장길 표지판을 보고 저기는 어떤 길일까 엄청 궁금했다.

제주의 동남쪽 내지인 표선면 가시리에 있는 '갑마장길'은 조선시대 말을 키우던 곳을 걷기여행 코스로 만든 곳인데 원래 길이는 20km이다. 2012년 11월 초에 '쫄븐 갑마장길'이라고 중간에 잘라먹어서 10km짜리 짧은 코스를 만들어 개장했단다. 따라비오름-잣성-대록산(큰사슴이오름)-유체꽃프라자-행기머체 등 주옥 같은 숲길과 오름을 한꺼번에 접할 수 있는 최고의 트레킹 코스이다. 말 그대로 제주의 진정한 속살을 체험할 수 있는 곳이라 감히 자부한다.

교래사거리에서 평대리로 가는 비자림로(1112번도로)는 주변 풍광이 좋은 최고의 드라이브 코스 중 하나다. 산굼부리를 지나 조금 내려 가다가 정석항공관 방향으로 우회전, 가시리 가는 방향에 있다. 도로 이름이 녹산로인데 차가 거의 다니지 않는 한가로운 지선도로다. 단체 관광객들이 거의 오지 않아 저렴한 현지식당이 많은 가시리에서 점심을 먹고 쫄븐 갑마장길의 출발점인 행기머체로 간다.

행기머체란 무슨 뜻일까. 뜻을 풀이하면 '행기물(녹그릇에 담긴 물) + 머체(돌무더기)'로 녹그릇에 담긴 것 같은 돌무더기란다. 행기머체 앞에는 조랑말 체험공원이 있다. 초등학생 아이들과 같이 왔다면 들어가 봐도 좋을 거 같다.

본격적으로 쫄븐갑마장길 탐방에 들어간다. 처음엔 짧은 숲길이 나온다. 이파리도 거의 없는 나무들이 미동도 하지 않고 가만히 서 있다. 마치 숲의 시간이 정지된 듯하다.

쫄븐갑마장길 시작점의 숲길
 쫄븐갑마장길 시작점의 숲길
ⓒ 임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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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방 탁 트인 벌판이 나오고 멀리 따라비오름이 보인다. 벌판 다른 쪽엔 풍력발전기들이 우뚝우뚝 서 있다. 하얀 꼬챙이를 세워 놓은 듯한 풍력발전기들은 몇 시간 후 거대한 위용으로 다시 나타난다.

멀리서 본 따라비오름과 풍력발전기
 멀리서 본 따라비오름과 풍력발전기
ⓒ 임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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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숲길이 나타나는데 옆엔 물이 흐른다. 계곡같이 보이기도 하고 개울같기도 하고. 제주에서는 개천을 보기 힘든데 맑은 물이 거울처럼 번들거리고 있다. 바위에는 겨울인데도 녹색이끼가 가득하다. 이끼류는 청정한 공기 속에서만 산다 했던가. 하긴 육지 어디가 제주처럼 공기가 좋을까... 이 천의 이름은 '가시천'이다.

가시천의 이끼
 가시천의 이끼
ⓒ 임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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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천 숲길은 나무들 모양새가 단조롭지 않고 다양하여 질좋은 풍광을 보여주고 있다. 마주치는 이 하나 없는 조용한 숲길을 우리는 걷는다. 나무들이 바람을 막아주어 조용하고 포근하다. 공기가 맑아 호흡이 자연스럽게 깊어진다.

금방 숲길을 벗어나 이젠 따라비오름의 측면을 향해 간다. 한낮의 햇살이 따리비오름을 노랗게 비춰준다. 따라비오름 아래에 도착하여 측면을 타고 오른다. 아직도 억새가 지천에 널려 있다.

오늘은 바람이 많이 불지 않아 걷기가 수월한 편이다. 태양광을 받아 반짝이는 억새들을 옆에 두고 우리는 분화구를 한바퀴 돈다.

따라비오름의 분화구는 특이하게 세 개가 겹쳐있다. 동그란 봉우리들이 거대한 파도마냥 겹쳐있는 것처럼 보인다고나 할까. 여하튼 번화구며 정상 모습이 오묘한 모양새다.

따라비오름의 정상
 따라비오름의 정상
ⓒ 임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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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비오름을 내려와 특이하게 생긴 숲에서 우린 잠시 휴식을 취한다. 일행 중 한 명이 생고구마를 꺼내더니 주머니칼로 깎는다. 저마다 가져온 간식들을 합쳐, 고구마와 커피 귤 등으로 갈증을 달래고 요기를 한다. 생고구마를 먹으니 생각보다 든든하고 부담감도 없다.

이제 큰사슴이오름으로 향한다. 따라비오름을 내려와서 한숨 돌린 우리는 다시 길을 떠난다. 따라비오름부터 큰사슴이오름까지 가는 길은 잣성길이라고 하는데... 날이 좋아서인지, 시간대가 맞아서인지 길 자체가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참 환상적인 길이다.

잣성길
 잣성길
ⓒ 임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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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풍차가 있는 북유럽의 어느 길은 걷고 있는 듯하다(물론 북유럽을 가보진 못했는데 사진에서 보던 막연한 환상을 가진 그런 길이 현실로 펼쳐진 것 같다). 억새의 흔들거림과 느린 화면으로 보는 것 같은 풍력발전기의 회전하는 모습 그리고 노란빛으로 굳건하게 서 있는 둔탁한 오름의 경사면. 그 옆의 가로수 길을 편안하게 걷는다.

잣성길에서 대록산 가는 길
 잣성길에서 대록산 가는 길
ⓒ 임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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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탄하고 한가로운 길을 걷다보니 큰사슴이오름 밑의 국궁장이 나온다. 역시 시간의 흐름이 늦어진 것 같은 고즈넉한 모습이다. 넓은 터에 정자가 있고 그 옆으로 오름의 둘러서 가는 길이 나를 유혹한다. 한 낮을 조금 넘긴 시간대의 빛의 예술인가 모르겠다. 농익은 햇살이 오름의 사면을 황금색으로 비추고 억새 사이로 외로운 길이 이어져 있다.

대록산(큰사슴이오름)의 둘레길
 대록산(큰사슴이오름)의 둘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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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큰사슴이오름의 옆 사면을 타고 오른다. 바람이 소슬하게 불어와 서둘러 걷지 말라고 속삭이고 넉넉한 오름은 완만하게 굽어있어 지친 다리를 풀어준다. 큰사슴이 오름의 경관은 자연풍경에 대한 생각의 지평을 훨씬 넓혀주는 듯하다.

부드러움과 느림, 풍만함의 느낌 속에 어떤 쓸쓸함도 같이 지니고 있다. 가시리는 억새의 고향인 것 같다. 어디로 눈을 돌려도 벗어날 수 없는 억새의 흔들거림 속에 큰사슴이 오름이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

대록산의 정상
 대록산의 정상
ⓒ 임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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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이와 넓이 풍경, 완벽에 가까운 볼거리를 제공하는 큰사슴이오름이 세삼 사랑스럽다. 대록산은 오름 중에서도 큰편이라 가까이 서서는 크기가 한눈에 안 들어온다.

대록산을 단독으로 탐방하려면 정석항공관이라는 곳의 주차장에 차를 두고 탐방로를 따라 다녀오면 되는데, 이렇게 갑마장길로 오면 가시리 방향쪽 사면으로 접근하게 된다. 능선과 나무가 막아주어서인지 바람도 잦아들고 고요하기만하다.

완만한 능선을 타고 오르다보니 분화구를 한바퀴 도는 길 중간에 이상한 것이 있다. 푸른잎이 유난히 많이 나 있는 구덩이 같은 곳에서 수증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다. 다가가 보니 자연동굴이다.

입구에 접근도 하기 전에 직감적으로 따뜻한 수증기일 것을 알 수 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두컴컴한 동굴이 입을 벌리고 있다. 수증기가 따뜻한 정도가 아니라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거의 한증막 수준의 따뜻함이다.

동굴 벽에는 사우나실처럼 물방울이 맺혀 흐르고 있다. 둥굴 내부 온도도 15도는 넘는 듯하다. 참 신기하기만 하다. 호젓한 오솔길을 거쳐 정상을 지나 북쪽 사면으로 넘어오니 서쪽으로 기울어 가는 햇살에 탁 트인 전망이 펼쳐진다.

대록산 정상에서 정석항광관 가는 길
 대록산 정상에서 정석항광관 가는 길
ⓒ 임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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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록산은 약간 늦은 오후 정도에 올라오는 게 더 멋진 풍경을 불 수 있는 듯하다. 대록산을 내려와 가시리 방향으로 돌리니 이제 이 쫄븐 갑마장길도 얼마 안 남았다. 10km가 넘는 길인데 정말이지 밋밋한 풍경이 하나도 없다. 숲길·들판·오름·개울 등등 다양하고 멋진 퐁광들로만 가득하다. 해가 기울어가며 대록산이 더욱 노랗게 변해간다.

대록산에서 꽃머체 가는 길
 대록산에서 꽃머체 가는 길
ⓒ 임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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쫄븐갑마장길의 끝 포인트는 꽃머체라는 곳이다. 돌무더기 위에 꽃들이 한가득 피어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큰 돌덩이에 뿌리를 박은 나무들이 위태로운 듯 솟아있다. 생명력의 끈질김이 느껴지기도.

이렇게해서 쫄븐갑마장길 탐방이 끝난다. 겨울이라 하지만 좋은 날씨에 편안한 트레킹을 하며 무엇보다도 눈이 엄청 호강했다. 좋은 트레킹에 감사하며 드는 단한가지 생각은 '봄이 되면 반드시 다시 와야겠다'는 것.

이렇듯 제주에는 숨겨진 트레킹 코스가 많이 있다. 흔히들 제주의 속살이나 숨겨진 비경 등을 말한다. '속살'이나 '비경'이 멀리 있지 않다. 고개만 돌리면 제주의 은은한 속살들이 우리를 유혹한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개인 블로그에도 실린 기사입니다. 오마이뉴스는 본인이 직접 작성한 글에 한 해 중복 송고를 허용합니다.



태그:#갑마장길, #가시리, #쫄븐갑마장길, #따라비오름, #대록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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