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가족 잔혹사  

[외삼촌] 한국전쟁 당시 고등학교 학생회장이었던 그는 부농의 그러니까 공산주의자들에게 있어선 척결의 대상인 지주의 아들이었다. 피난을 떠나야 했지만 인민군의 진격 속도는 너무 빨랐다. 인민군이 고향을 점령하자 의용군에 강제 편입됐고, 학생회장이란 이력 때문에 어쩌면 지주 아들이란 죄를 속죄하기 위해서 간부(소대장쯤 되는 듯)를 역임했다.  

미군을 비롯한 UN군이 참전하고 국군의 반격이 시작되며 인민군은 퇴각하기 시작했다. 외삼촌은 공산주의자도 아니고 고향을 떠나기도 싫어 퇴각하는 진영에서 탈영, 숨어 지내다 국군이 진격하고 나서야 안도하며 집에 돌아왔다.

하지만 자유대한민국은 그를 포용하지 않았다. 국군 진입 며칠 후 의용군에 편입됐던 많은 젊은이들이 '빨갱이 척결'이란 미명하에 재판 없이 공개 총살당했다.

[외할머니] 세상을 떠나신 지 어언 20여 년이 되어 가지만 그 분을 생각하면 여전히 마음이 아프다. 참 심술이 많아 외가살이하는 형제들에게 많은 구박을 가하셨지만 유독 나에게는 많은 애정을 베푸셨다. 나중에야 알게 된 일이지만 내가 외삼촌을 빼어 닮았기 때문에 사랑을 받은 것이라고 했다.

외할머니는 정말 모진 시집살이를 하셨다고 한다. 고된 시집살이 중에 하나뿐인 아들의 존재는 그녀에게 보람이자 기쁨이었고 모든 것이었다. 그야말로 이름조차 닳을까 함부로 부르지 않던 귀한 아들이었다. 그 사랑스런 아들이 눈앞에서 총살을 당했다. 그것도 인민군이 아닌 국군의 총에. 당시에는 너무 무서워서 남들 앞에서 소리 내어 울지조차 못했다고 한다.

그 분은 평생 고춧가루가 들어간 음식을 들지 못했다. 아들을 잃은 한이 너무 커 화가 된 탓이다. 호적조차 없는 분이니 얼마를 사셨는지 정확히 모르지만 그 분의 삶은 임종까지 가혹했다. 신체의 모든 기능을 상실해 눈이 먼저 멀고도 낮과 밤이 바뀐 채로 무려 4년 이란 시간을 벽을 긁으며 먼저 떠나보낸 아들의 이름을 부르다 세상을 떠나셨다.

"우리 어무이는 참 심술도 많어, 장사(장례)날 떠나면서까지도 심술을 부리네.."

장대비가 쏟아지던 날 치러진 장례식에서 실신 직전까지 통곡하던 내 어머니의 독백이었다.

난, 1980년 광주에 투입된 계엄군이었다 

1980년 5월 광주 '서울의 봄' 당시 나는 소위 충정부대의 군인이었다. 혼란한 시국 탓에 군사훈련보다는 시위 진압 훈련을 더 고되게 받았고 마침내 서울에 출동했고, 다시 광주행 열차를 탔다. 애초 송정역에서 광주시내로 진입할 예정이었으나 시민과의 격돌로 상무대에서 다음 임무를 기다리고 있었다.

"폭도(당시 그렇게 불렀다)들에게 계엄군 4명이 살해됐다"는 소식이 들리는가 하면 전남 도청을 접수할 예정이던 대대의 선발대가 탄 헬기가 "총격을 당했다"는 소식이 들리고 피투성이의 부상병들이 후송되는 모습을 보니 긴장이 고조됐다.

마침 포로로 잡힌 폭도들이 실려 왔다. 십수명이 포승줄에 줄줄이 묶여 건물 안으로 끌려들어가고 있었다.

"빨갱이 새끼들, 모두 죽여야 해..." 

누군가가 소리치며 달려들자 우루르 무리지어 소위 폭도들에 대한 폭행에 가세했다. 그 후 있었던 광주에서의 기억은 참으로 참혹했다. 이어지는 피난 행렬, 그리고 총격에 의해 사살된 주검들. 공포스럽고 혼란스럽기도 했지만, 당시 나는 무정부 상태나 다름없는 광주를 공산화의 위협으로부터 지켜내는 데 기여했다는 긍지도 느꼈다.

광주와 군 생활에 대한 기억은 트라우마로 남았다. 전역 후 30년이란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군대 꿈을 꾼다. 총 맞아 썩어가던 시신들, 훈련 중 사망한 동기병 그리고 억울하다고 소리치고 싶은데 소리마저 나오지 않는 재징집의 병영생활. 깨어보면 모두 꿈이다.

때론 긍지마저 느꼈던 광주에 대한 기억에 죄책감을 느끼게 된 건 전역 후의 일 때문이다. 당시 군의 발포나 진압작전이 군의 본연의 임무였고, 시민에 대한 총격이 자위권 발동이나 혼란한 상태에서 있을 수 있는 불상사라는 나의 항변에 대학 재학 중이던 후배는 이렇게 말했다.

"형, 그건 죄악이에요. 형은 현장에 있었지만 진실에 대해서는 우리만큼도 몰라요."

그리고 그 때 보지 못했던 수많은 억울한 죽음과 참극의 주범이 전두환을 위시한 신군부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내가 충정이라고 믿고 행한 일들이 정부를 전복시키는 반역과 민주주의 말살에 실질적으로 공헌한 것이다.

영화 <26년>

80년 5월 광주에서 수많은 양민을 학살한 '그 사람'. 영화 <26년>의 한 장면
 80년 5월 광주에서 수많은 양민을 학살한 '그 사람'. 영화 <26년>의 한 장면
ⓒ 청어람

관련사진보기


영화 <26년> 대한 반향이 회자되고 있음에도 난 영화를 보고 싶지 않았다. 그 끔찍한 기억을 내 기억에 반복해 주입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보셔야 해요. 아픈 기억이겠지만 한 사람이라도 더 봐줘야 이런 아픈 역사가 반복되는 것을 막을 수 있어요." 

친구의 말이 내 마음을 움직였다. 그날 광주의 죽음들에 대한 애니메이션 처리는 나에게는 제작자의 배려로 느껴졌다. 그리고 거기서 부모와 형제를 잃은 많은 상처 입은 영혼을 만나게 되었다.

복수라고 했지만 복수가 아니었다. 수많은 생명을 학살하고 피해자와 유족들에게 죽음으로도 씻기 어려운 상처를 주고도 호의호식하며 천수를 누리는 학살의 수괴를 처단하는 것은 복수가 아니라 '심판'이라고 하는 것이 옳은 표현이다.

영화 <26년>에서 시민을 학살한 계엄군 김갑세(이경영분).
 영화 <26년>에서 시민을 학살한 계엄군 김갑세(이경영분).
ⓒ 청어람

관련사진보기


내가 영화 <26년>에 등장하는 계엄군 김갑세(이경영 분)였다면, 그 상황에서 시민과 마주쳤다면 아마도 같은 잘못을 저질렀을 것이다. 당시 작전에 투입된 우리는 실탄을 장전하고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고 있었다. 비록 시민과 폭도를 구분하기 어렵다는 혼란이 있었지만 작전 중 누군가 내 앞에 나타났다면 주저없이 방아쇠를 당겼을 것이다. 살아남기 위해서 또 군인으로서 명령에 충실하기 위해서 였겠지만 죽어가는 상대가, 그 가족이 평생 한으로 남을 만큼 억울할 것이라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들의 총살을 목격한 내 할머니가 30년이 지나도록 한을 삭히지 못하여 죽음의 문턱을 넘어서는 순간까지 한을 안고 가셨듯이 원통하게 사랑하는 사람을 빼앗긴 광주 학살 희생자 유족들 역시 그러하리라. 조국에 대한 충정인줄만 알고 행했던 일들이 누군가에게는 차마 지워지지 않는 원한을 심어 주었다는 사실이 뼈저리게 아프게 느껴지는 밤이다. 이 악몽이 내겐 평생 떨쳐버리지 못할 업보로 다가올 것 같다.


태그:#26년, #전두환, #광주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34,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영화와 음악 오디오 사진 야구를 사랑하는 시민, 가장 중시하는 덕목은 다양성의 존중, 표현의 자유 억압은 절대 못참아,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