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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의 상징인 까만 돌담은 용도가 참 다양하기도 하다.
 제주의 상징인 까만 돌담은 용도가 참 다양하기도 하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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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다도(바람, 여자, 돌)에서 삼무도(도둑, 대문, 거지)까지 제주도를 특징짓는 말들은 다양하다. 풍경도 날씨도 워낙에 다채롭다보니 사람마다 느낌이 달라서 일 거다. 이번 늦가을 제주 여행(육지는 초겨울)에서 내게도 그런 특징을 세 가지만 꼽아보라면 오름, 포구, 숲속 길을 말하고 싶다.

육지의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제주도만의 너른 평원과 독특한 풍경을 느낄 수 있는 360여개의 오름들. 따사로운 햇살이 수면에 반짝거리는 바닷가의 작은 어선들이 어울려 늦가을과 초겨울 사이의 고즈넉하고 쓸쓸한 분위기가 발길을 붙잡는 어촌마을과 포구들. 후두두 날아가는 새들에 놀라고 금방이라도 노루가 튀어 나올듯한 고요하고 짙은 숲속 길….

올레길 중 최근에 생겨난 19코스는 이러한 제주섬의 세 가지 특징이 골고루 섞이고 배인 코스가 아닐까 한다. 거기에다 옥빛 푸른 바다는 그 특징들의 멋을 더욱 빛나게 해주는 배경색으로 톡톡히 역할을 하고 있어 지난 주말(12월 1일) 올레길 걷는 기분을 신나게 해주었다.

해안가에서 마주친 옛날 등대 등명대와 제단, 제주의 옛 모습이 상상된다.
 해안가에서 마주친 옛날 등대 등명대와 제단, 제주의 옛 모습이 상상된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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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안길, 포구길, 돌담 골목길... 정겨운 올레길 

제주시 시외버스터미널에서 버스를 타고 조천읍 조천만세동산에 내리면 총 18km의 올레길이 시작된다. 올레길 19코스는 초반엔 해안가와 어촌 포구, 중반은 바다 옆 오름, 후반은 숲속 오솔길로 걷기 좋게 이어진다. 올레코스들마다 특징이 있고 모두 좋지만 이 코스는 어느 코스보다도 제주섬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 길이다.    

조천읍 주민 500여 명이 독립만세를 외쳤던 곳임을 기리고자 조성한 조천만세동산에서 제주항일기념관 옆을 지나 바닷가로 향한다. 제주올레 표지리본이 부는 바람에 몸을 흔들면서도 길을 잘 가리키고 있다. 조천읍 해안가는 새까만 현무암 돌담과 바닷바람에 춤추는 억새들로 특별한 해안 풍경을 지니고 있다.

그러다 돌담을 우리삼아 사육하는 소들을 만나게 되는데 외지인에 대한 호기심과 경계심이 뒤섞인 소의 순수한 눈망울에 웃음 짓기도 한다. 집담, 밭담, 무덤가의 산담, 가축의 우리까지 아무튼 제주의 돌담은 섬의 상징답게 다양하게도 쓰인다.

조천읍 조천리와 함덕리 마을의 정겨운 돌담길과 대문없는 집들.
 조천읍 조천리와 함덕리 마을의 정겨운 돌담길과 대문없는 집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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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천읍은 수년 전 처음 제주 자전거 여행을 하다 들른 첫 동네이기도 하다. 보통 서쪽을 향해 자전거 페달을 밟는데 당시 자전거 여행 초보자였던 난 거꾸로 동쪽으로 달리다 조천읍동네를 만난 것이다. 매년 찾아올 적마다 이 동네가 고향처럼 느껴지는 건 풍경들과 사람들의 사는 모습에 변함이 없어서다.

작은 어선들을 품은 소박한 포구, 바닷가에 피어난 억새들, 까만 돌담을 두른 대문 없는 집들과 함께 조천리 마을에서 아침 겸 점심으로 먹은 제주의 향토음식 '몸국'은 고향이 없는 내게 이곳을 더욱 고향삼고 싶게 한다.
   
파도가 거세게 들이치는 제주의 울돌목 '관곶', 해녀들이 물질하기 전후로 잠수복도 갈아입고 불도 쬐며 쉬는 둥근 돌담 쉼터인 '불덕', 그 옛날 포구로 들어오는 배들의 등대역할을 한 '등명대'와 어민들의 풍어와 무사귀환을 빌었을 제단…. 올레길 19코스를 걸으며 새로이 발견하게 된 흥미로운 것들이 제주를 한층 깊이 알게 해주었다.
 
서우봉에서 보이는 풋풋한 해안가, 왼쪽의 작은 섬이 다려도.
 서우봉에서 보이는 풋풋한 해안가, 왼쪽의 작은 섬이 다려도.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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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면한다고 잊혀질 수 없는 일

고향마을 삼고 싶은 조천리를 지나면 큼직한 포구와 마트, 호텔, 놀이공원이 있는 관광지가 나타나는데 제주에서도 유명한 함덕국민관광지다. 길쭉한 바위섬에 걸쳐진 구름다리를 따라 걸으며 곱고 아름다운 옥빛으로도 잘 알려진 함덕리 앞바다에 잠시 빠져본다. 아름다운 색깔의 바다만큼이나 유명한 것이 부근에 있다. 바로 '서우봉'이 그곳으로 제주 북쪽 바다를 향해 혹처럼 툭 튀어나온 그래서 전망이 좋은 오름이다.

지금껏 해안가 바다 옆을 걸었다면 이제 바다를 발아래 두면서 바다 저 멀리를 조망할 수 있다. 함덕리 바닷가 끝 '서우봉 산책로 입구' 팻말을 따라 오르막길을 슬금슬금 오른다. 오름 중턱의 정자에 앉아 함덕 해안의 아름다운 바다를 실컷 눈에 담고 정상에 올라서니 이름도 예쁜 작은 섬 다려도와 함께 해안가가 정답게 펼쳐진다. 이 계절 눈을 부시게 하는 제주섬 특유의 따사로운 햇살과 함께….

제주 4.3사건의 비극, 북촌리 너븐숭이 애기무덤.
 제주 4.3사건의 비극, 북촌리 너븐숭이 애기무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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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 이외에 둘레길을 따라 한 바퀴 둘러볼 수 있는 서우봉을 내려서면 북촌리 마을의 작은 포구가 올레꾼을 맞이한다. 북촌리는 제주땅 어느 곳에서나 마주칠 수 있는 제주 4·3사건의 비극이 발생한 동네이기도 하다. 마을에 있는 '너븐숭이 4·3 기념관'은 북촌리 마을에서 벌어진 주민학살의 전모를 목도할 수 있는 곳이다.

당시 제주 인구의 1/5 이상이 희생된 사건이면서도 철저하게 외면 받고 숨겨져 왔던 현대사의 비극을 잊지 말자고 조용히 외치는 듯하다. 제주 4·3 희생자 원혼 위령비 앞에 보존된 '너븐숭이 애기 무덤'은 올레꾼의 가슴을 먹먹하고 울적하게 한다. 제주의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벌어진 일들이라 더욱 가슴이 아프다.

아직 눈도 떠보지 못한 아기들일까
제대로 묻어주지도 못한
어머니의 한도 함께 묻힌 애기 돌무덤
사람이 죽으면 
흙 속에 묻히는 줄로만 알았던 우리 눈이
너무 낯선 돌무덤 앞에  
목이 메인다
목이 메인다

- 너븐숭이 애기무덤 앞 비석의 글 가운데 

새들의 지저귐과 고요한 적막이 절로 명상에 빠져들게 하는 동복리 숲길.
 새들의 지저귐과 고요한 적막이 절로 명상에 빠져들게 하는 동복리 숲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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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들도 심심했는지 지나가는 올레꾼에게 눈을 맞추며 다가온다.
 말들도 심심했는지 지나가는 올레꾼에게 눈을 맞추며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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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 정적으로 가득한 숲속길 


올레길은 이제 바닷가와 포구, 어촌마을을 벗어나 내륙의 동복리 마을 쪽으로 인도한다. 올레길의 가이드 간세다리가 가리키는 곳은 무성하다 못해 컴컴한 숲사이 길. 동복교회, 동복리 마을운동장을 지나 김녕농로의 들판에 이르기까지 깊고도 짙은 숲길을 내내 혼자 걸었다. 

밀림 같은 숲 속에서 이러다 길을 잃으면 어쩌나 걱정이 들 때마다 빨갛고 파란 올레리본이 안심시켜 주는가 하면, 꿩들의 원시적인 울음소리가 적막함을 날려주고, 숲속 작은 말목장의 말들이 심심했는지 여행자에게 눈을 맞추고 다가온다. 

걸음을 멈추고 명상을 해도 좋고 하염없이 상념에 빠져도 좋을 고요한 정적으로 가득한 숲, 시간이 아주 천천히 흐르는 숲속을 터벅터벅 걸어간다. 날씨마저 흐려 어두운 숲은 더욱 그런 기분에 젖어들게 한다. 민가로 보여 반가웠던 아담한 동복교회, 천연잔디가 깔린 동복리 마을 운동장도 한껏 한갓진 모습들이다.

나뭇가지가 얼굴을 쓰다듬고 덩굴이 발목을 붙잡는 우거진 숲이 나타나기도 하고, 산담에 둘러싸인 단정한 무덤을 깊은 숲속에서 불쑥 마주치기도 한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두려움이 생기거나 우울해지지 않는 건 동복리 숲길에서 내내 느껴지는 솔향기 은은한 맑은 기운 때문이 아닐까 싶다.

숲길 한가운데 용암이 파도처럼 흘렀던 자국이 보이는 넓은 공터가 나타난다. '벌러진 동산'이란 안내 팻말의 재미있는 이름에 풋~ 웃음이 터진다. 두 마을로 갈라지는 곳, 혹은 넓은 바위가 번개에 맞아 벌어진 곳으로 나무가 우거져 있고 용암이 굳어 만들어진 넓은 공터와 아름다운 옛길이 남아있는 지역으로 제주어다운 생생하고 잊기 힘든 지명이다.   

푸릇푸릇 마늘밭 사이에 무덤들이 들어선 인상적인 김녕의 너른 들판.
 푸릇푸릇 마늘밭 사이에 무덤들이 들어선 인상적인 김녕의 너른 들판.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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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복리의 무성한 숲길을 터널 빠져오듯 나오는데 같은 색상의 점퍼를 입고서 걸어오는 중년의 남녀와 마주쳤다. 한두 시간 사람을 못 봤다고 그새 그리워졌는지 반갑게 인사를 건네니 부부지간의 아저씨, 아주머니는 올레길 지킴이란다. 혼자 숲속을 헤쳐 오느라 수고했다며 바로 앞길 너머의 김녕농로 가는 길을 알려주신다. 동복리 숲속길이 왜 그리 우거졌나했더니 근래에 난 길이라 아직 사람들이 많이 안 다녀서란다.

광대한 평원지대가 많은 제주 구좌읍의 마을답게 김녕의 밭과 농토들은 검은 돌담을 경계로 드넓게 펼쳐진다. 가을에 심어 다음 해 봄에 캔다는 마늘이 들어있는 푸릇푸릇한 밭이 계절을 잠시 잊게 한다. 밭 사이로 돌담을 두른 채 떡하니 한 자리 차지하고 들어서 있는 무덤 들을 보니 생(生)과 사(死)가 순환하는 자연스러운 섭리를 깨달을 수 있을 것 같다. 오름, 숲, 바닷가 어디든 흔하게 마주치는 무덤들 덕분에 제주에 올적마다 평소엔 전혀 생각지 못했던 죽음에 대한 단상에 빠져본다.

다시 제주시로 돌아올 땐 김녕 백련사 앞 버스정류장에서 제주종합시외버스터미널 가는 동회선 일주 시외버스를 타면 된다. 매일 05:40~21:00까지 운행하며 20분 간격으로 운행한다.

바닷가, 포구, 오름, 어촌마을, 숲길이 이어지는 제주 올레 19코스
 바닷가, 포구, 오름, 어촌마을, 숲길이 이어지는 제주 올레 19코스
ⓒ 제주 올레 누리집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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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제주도, #올레길, #조천읍, #서우봉, #4.3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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