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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24년, 신라의 2대 임금 남해왕이 사망했다. 다음 왕위는 당연히 태자인 유리의 몫이었다. 하지만 덕망이 높은 탈해가 자신보다 더 임금 역할을 잘 할 것으로 믿은 유리는 왕위를 그에게 사양하였다. 그러자 탈해는, "임금이라는 자리는 보통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훌륭하고 지혜로운 사람은 이가 많다고 들었습니다"
하고 말했다.

두 사람은 떡을 깨물어 누가 더 이가 많은지를 확인하였다. 이가 많은 사람에게 임금 자리를 넘기자는 제안은 정치적 사회적 경험이 많은 이가 왕위에 올라야 한다는 뜻이었다.

유리가 왕위에 올랐다. 당시는 왕을 '이사금'이라 불렀다. '이사금'은 '이의 자국'을 뜻하는 말이다. 남해왕이 죽음을 앞두고, 아들 유리와 사위 탈해에게 '내가 죽은 뒤에는 너희들 '박'과 '석' 두 성을 가진 사람 중에 나이 많은 자가 왕위를 이으라'고 말했었다.

경주이씨 탄강 유적인 표암 뒤 산중턱에 있는 경주이씨 유허비 오르는 길에서 바라본 탈해왕릉과 숭신전. 숭신전은 탈해왕을 모시는 집.
 경주이씨 탄강 유적인 표암 뒤 산중턱에 있는 경주이씨 유허비 오르는 길에서 바라본 탈해왕릉과 숭신전. 숭신전은 탈해왕을 모시는 집.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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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탈해도 왕이 된다. 유리 이사금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삼국사기>는 탈해가 즉위하는 해를 서기 57년으로 전한다. 당시 탈해의 나이는 62세. 그는 재위 24년째인 80년, 나이 85세에 사망한다.

삼국사기에 나오는 탈해왕 때의 기록 중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알지의 출생이다. 65년(재위 9) 봄 3월, 탈해왕은 금성 서쪽 시림(始林)의 나무 사이에서 닭[鷄] 우는 소리가 나는 것을 듣는다. 날이 샐 무렵에 호공을 보내 알아보니 나뭇가지에 작은 금빛 상자가 걸려 있었고, 흰 닭이 상자 아래에서 울고 있었다. 상자 속에 어린 사내아이가 들어 있는 것을 본 왕은 기뻐하며 측근들에게,

"이 아이는 하늘이 나에게 아들로 준 것이다!"

하고는 거두어 길렀다. 아이는 총명하고 지략이 뛰어났다. 이름을 알지(閼智)라 정하고, 금(金)빛 상자에서 나왔다고 해서 성은 김(金)씨가 되었다. 그리고 시림도 계림(鷄林)이라 고쳐 부르고, 그 이름을 국호(國號)로 삼았다.

계림의 야경
 계림의 야경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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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대 임금 석탈해왕은 알지를 얻어 '이 아이는 하늘이 나에게 아들로 준 것'이라며 기뻐했다고 하지만, 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사람은 5대 파사왕(3대 유리왕의 차남, 박씨), 6대 지마왕(파사왕의 장남), 7대 일성왕(3대 유리왕의 장남), 8대 아달라왕(일성왕의 장남)으로 4대에 걸쳐 모두 박씨였고, 다시 9대 벌휴왕(탈해왕의 손자), 10대 내해왕(벌휴왕의 손자), 11대 조분왕(벌휴왕의 손자), 12대 점해왕(조분왕의 동생) 4대에 걸쳐서는 모두 석씨였다. 김씨가 신라 역사상 처음으로 임금 자리에 앉은 것은 262년, 13대 미추왕(김알지의 후손) 때였다. 알지 탄생 이후 거의 200년이나 지난 뒤의 일이었다.

알지 출생 후 200년이나 지나야 김씨 왕 탄생

그런데 어째서 알지가 태어날 때 숲[林]에서 닭[鷄]이 운 것을 기념하여 나라 이름을 계림(鷄林)으로 바꾸었을까? '알지는 하늘이 내게 준 아들'이라고 탈해왕이 그렇게 좋아했는데 알지는 왜 왕이 되지 못했으며, 그 후손들은 200년이나 지나야 왕위에 오를까? 또, 탈해왕의 아들은 왜 왕위에 오르지 못했을까? 삼국사기는 아무 언급이 없다.

 탈해왕릉. 소나무 한 그루가 땅에 누운 모습으로 절을 올리듯 왕릉을 향해 자라고 있는 모습이 이채롭다.
 탈해왕릉. 소나무 한 그루가 땅에 누운 모습으로 절을 올리듯 왕릉을 향해 자라고 있는 모습이 이채롭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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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 174호인 탈해왕릉은 백률사 주차장에서 소금강산 옆을 따라 계속 300m쯤 나아가면 있다. 높이 4.5m, 지름 14.3m 크기의 탈해왕릉은 둥글게 흙을 쌓아올린 봉토무덤이다. 무덤 외에는 아무런 설치물도 없다. 붕괴와 도굴을 막기 위해 봉분 하단에 두르는 호석도 없고, 상석이나 문인상, 무인상 등도 없다.

그저 평범한 왕릉 정도로 보이는 탈해의 무덤. 그러나 한 바퀴 빙 돌다 보면 눈이 번쩍 뜨이는 광경을 목격하게 된다. 거대한 소나무 한 그루가 왕릉을 향해 엎드려 절하는 모습으로 자라고 있다. 소나무도 저렇게 몸을 땅에 반쯤 묻은 채 자랄 수 있는 나무인가? 식물학적 지식이 얕아 그것은 알 길이 없지만, 어쨌든 희귀한 풍경이다. 어떻게든 사진 한 장을 잘 찍어보려고 갖은 노력을 기울인다.

월성에서 이곳으로 옮겨온 숭신전

왕릉 옆에는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255호인 숭신전이 있다. 경주시 동천동 350-7번지라고 자신의 소재지를 밝히는 이 건물은 1898년에 건축되었는데, 탈해왕을 제사지내는 집이다. 본래 월성 안에 있던 것을 1980년에 이곳으로 옮겨왔다.

그런데 숭신전 왼쪽에는 그보다 훨씬 더 웅장한 건물들이 보인다. 특히 건물 뒤로 기이한 형태와 빛깔을 뽐내면서 산자락에 걸려 있는 거대 암석에 저절로 눈길이 간다. 거대 기암괴석 위에는 정려각도 보인다. 그리로 가는 나무 계단도 층층으로 놓여 있다.

경주이씨 유허인 표암이 건물 사이로 보인다.
 경주이씨 유허인 표암이 건물 사이로 보인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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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단은 경상북도 기념물 54호인 표암(瓢巖)으로 사람을 인도한다. 경주이씨의 조상인 알평공이 하늘에서 내려온 곳이다. 표암 맨 꼭대기에 있는 유허비와 비각 앞에 서면 경주 시내가 시원하게 내려다보인다. 알평공이 이곳을 골라 하강한 까닭을 알 만하다.

단군신화에도 '인간 세상을 탐내는 아들 환웅의 뜻을 알고 아버지 환인이 태백산을 내려다보니 사람들을 널리 이롭게 할 만했다'는 대목이 나온다. 탈해도 토함산에 올라 가장 살 만한 곳이 어디인가를 살핀 끝에 호공의 집을 빼앗았다. 모름지기 전경이 잘 확인되는 곳에서 내려다보아야 최적의 주거지를 찾을 수 있는 법, 알평공도 그래서 이곳 표암에 내려온 것이다. 

탈해왕릉과 표암 사이로 난 계단을 줄곧 오르면 경주이씨 조상의 유허비가 나타난다. 이곳에서 내려다보는 경주 시내 경치가 일품이다. 경주이씨의 조상이 어째서 이곳에 처음 출현했는지, 이곳에 올라보면 바로 알 수 있다.
 탈해왕릉과 표암 사이로 난 계단을 줄곧 오르면 경주이씨 조상의 유허비가 나타난다. 이곳에서 내려다보는 경주 시내 경치가 일품이다. 경주이씨의 조상이 어째서 이곳에 처음 출현했는지, 이곳에 올라보면 바로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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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천 건너 분황사가 보이는 솔숲의 헌덕왕릉

표암 바로 아래에 웅건하게 자리잡고 있는 악강묘(嶽降廟) 등 경주이씨 재실을 둘러본 뒤 500m 정도 남하한다. 사적 29호인 헌덕왕릉을 찾아가는 길이다. 809년부터 826년까지 재위했던 41대 임금 헌덕왕릉의 주소는 경주시 동천동 80번지. 북천을 건너는 구황교에서 왼쪽으로 보문관광단지를 향해 들어서면 소나무들이 울창하게 우거져 있는 솔숲 속에 있다.

안내판에는 헌덕왕릉이 '경주시 북쪽을 흐르는 북천의 북안 평지에 위치'한다고 설명되어 있다. 보문호수에서 흘러내려오는 북천은 알천이라 부르기도 한다. 그래서 강변에 조성되어 있는 잔디 구장에는 '알천 축구장'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삼국사기에 보면 헌덕왕은 재위 6년(814) 봄 3월, 숭례전에서 여러 신하들에게 연회를 베푼다. 왕은 즐거움이 최고조에 이르자 스스로 거문고를 연주한다. 이찬 충영은 자리에서 일어나 춤을 춘다.

헌덕왕릉
 헌덕왕릉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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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헌덕왕릉 앞의 안내판은 왕의 당대가 그렇게 태평천하는 아니었다는 사실을 증언해준다. 헌덕왕은 '김헌창의 반란을 평정하였으며, 당나라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였고, 국방에 힘써 패강장성(浿江長城)을 쌓았다.' 패강은 대동강을 말하니 외적과의 싸움 이야기이고, 김헌창은 내란이 일어났다는 말이니, 모두가 전쟁이나 군사와 관계되는 내용들이다.

김헌창의 반란으로 골머리를 앓은 헌덕왕

김헌창의 반란은 왕의 가장 큰 골칫거리였을 것이다. 사건의 발단은 선덕왕에게까지 연결된다. 선덕왕이 죽을 때(785년) 아들이 없었다. 선덕왕의 조카 주원이 후계자로 옹립되었다. 그러나 그는 마침 내린 비 때문에 알천을 건너지 못해 궁궐로 오지 못했다.

그 사이에 '임금 지위는 사람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이다. 지금 때맞춰 폭우가 내린 것은 하늘이 주원을 왕으로 세우려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해준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주원이 왕이 되는 것을 반대하는 쪽에서 조직적으로 그렇게 여론을 모아갔을 것이다. 결국 임금 자리는 선덕왕의 아우 김경신이 차지했다.

공주의 공산성. 헌덕왕 때 김헌창이 반란을 일으킨 곳이다.
 공주의 공산성. 헌덕왕 때 김헌창이 반란을 일으킨 곳이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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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2년(헌덕왕 14), 김주원의 아들 헌창이 반란을 일으켰다. 헌창은 자신의 아버지가 왕이 되었어야 마땅하다고 주장했다. 웅천주(지금의 충남 공주 일원) 도독이었던 헌창은 나라의 이름을 '장안'이라 내세우고 한때 기세를 떨치지만 결국 패전 끝에 자살했다. 825년(헌덕왕 17), 김헌창의 아들 범문이 또 반란을 일으켰다가 잡혀서 죽는다.

헌덕왕릉은 아늑하다. 주위에 건물 하나 없고, 사방으로 솔숲 향기가 가득한 평지에 왕은 평화롭게 누워 있다. 반란 등으로 나라의 운명이 나날이 쇠약해지는 가운데 잔뜩 고민에 사로잡힌 채 왕좌에 앉아 있었을 헌덕왕, 죽고 나서야 비로소 마음과 몸의 평화를 찾은 것이다. 소나무 사이로, '향[芬]기로운 여왕[皇]'이 지어남긴 분황사가 보이는 헌덕왕릉.
영천에서 경주로
연재 졸고 '경주 여행'은 21회, 22회의 '포항에서 경주로'에 이어 '영천에서 경주로'를 소개합니다. 경북 영천에서 경주로 들어오면서 살펴볼 만한 답사지에 대한 해설이 될 것입니다.

고려 시대 탑으로 착각하기 좋은 정혜사지 석탑(국보), 지상 최고의 사랑을 남긴 흥덕왕의 (괘릉보다) 아름다운 무덤, 천년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흰빛을 뽐내고 있는 나원리 5층석탑(국보), 당나라에 아부하는 글을 남겨 치욕적 이름을 역사에 새긴 진덕여왕의 무덤, 효자 손순 유적, 최제우 유적인 동학 성지 등이 중요 답사지입니다.

경주는 어디나 그렇지만 이 길 역시 볼 만한 것들이 정말 많습니다.



태그:#탈해, #표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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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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