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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갤러리 3관에서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는 최재은 작가
 국제갤러리 3관에서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는 최재은 작가
ⓒ 김형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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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도쿄와 독일 베를린을 거점으로 작업하는 최재은(1953-) 작가는 '오래된 시(詩 Verse)'라는 제목으로 11월 22일까지 소격동 '국제갤러리(신관)'에서 개인전을 연다. 1993년 국제갤러리와 2007년 로댕갤러리 이후 5년 만에 국내전이다.

그는 1976년 의상디자인에 관심이 보이며 도일했다가 일본의 전통꽃꽂이인 '이케바나(生花)'에 매료된다. '소게츠(草月)' 화랑이 그가 활동한 근거지였는데 이곳은 또한 당대 위상이 높아 존 케이지, 보이스, 백남준, 라우센버그, 내쉬(D. Nash) 등 거장도 초대되었다. 그는 거기서 서구의 전위미술을 접했고 자연스럽게 작가가 된다.

최 작가는 영화감독만 아니라 조각, 설치, 건축, 사진, 영상, 사운드와 같은 여러 매체를 통해 작업을 해왔는데 생성하고 소멸하는 자연의 순환성과 시간의 영원성을 정중동의 이미지 속에서 시각화했다. 그의 이력 중 놀라운 건 1995년 제46회 베니스비엔날레에 일본대표작가로 선정되어 국제미술계에 데뷔했다는 점이다.

공간예술에 시간예술 융합시도

최재은(Jae-Eun Choi) I '환영의 이면(The Other Side of Illusion)' 비디오작품 2010. 이 작품은 인도를 통일한 아소카왕이 초기엔 난폭한 군주였으나 후에 불교를 통해 깨달음을 얻고 나무를 심어 백성을 구한다는 감동적 이야기가 그 주제다
 최재은(Jae-Eun Choi) I '환영의 이면(The Other Side of Illusion)' 비디오작품 2010. 이 작품은 인도를 통일한 아소카왕이 초기엔 난폭한 군주였으나 후에 불교를 통해 깨달음을 얻고 나무를 심어 백성을 구한다는 감동적 이야기가 그 주제다
ⓒ 최재은(Jae-Eun Cho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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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은 "나폴레옹이 영토(공간)를 뺏을 수는 있지만 시간을 빼앗아 올 수는 없다"는 말을 인용해 비디오아트의 중요한 법칙을 재치 있게 설명했는데 이는 미술이 공간의 예술이면서도 시간의 예술이 될 수 있음을 암시한 것이다.

최 작가도 백남준처럼 시간의 흐름 속에 순환하는 우주질서를 공간예술에 끌어들이려 한다. 위 작품은 2010년 일본 도쿄 하라(原)미술관에서 선보인 것으로 현대미술의 난제인 공간과 시간의 흐름을 긴밀하게 융합하는 미학이라 할 수 있다.

우주의 무한성과 인간의 유한성 대조

최재은(Jae-Eun Choi) I '시_이탈리아 풀리아(Verse_Puglia, Italy) C-프린트 총 50점 2012
 최재은(Jae-Eun Choi) I '시_이탈리아 풀리아(Verse_Puglia, Italy) C-프린트 총 50점 2012
ⓒ 김형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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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층 전시실에서 볼 수 있는 위 작품은 이탈리아의 남동부 위치한 풀리아 바닷가에서 작업한 것으로 새벽에 솟아오르는 태양을 1분 간격으로 110컷을 찍어 그 중 50컷을 선별한 것이다. 우주의 무한성 앞에 선 인간의 유한성을 대조시키고 있다.

이 작품을 통째로 보면 작은 액자 하나하나가 큰 점으로 보인다. 50개의 점은 마치 나무가 모여 숲이 되듯 순간의 시간이 모여 영원의 공간을 연출한다. 이런 작품은 기존 것과는 질적으로 다른 회화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리고 우주의 시간성과 작가의 시간성과 관객의 시간성이 서로 중첩됨을 교감하게 한다.

전후세대, 비물질적 사유의 시각화

최재은(Jae-Eun Choi) I '시_이탈리아 풀리아(Verse_Puglia, Italy)' 잉크젯(Ink jet lamination) 2.5×62cm 2012. 이 작품은 이탈리아 풀리아에서 찍은 것으로 1분에 1컷을 찍는 방식으로 1440컷을 찍고 건진 3컷이다
 최재은(Jae-Eun Choi) I '시_이탈리아 풀리아(Verse_Puglia, Italy)' 잉크젯(Ink jet lamination) 2.5×62cm 2012. 이 작품은 이탈리아 풀리아에서 찍은 것으로 1분에 1컷을 찍는 방식으로 1440컷을 찍고 건진 3컷이다
ⓒ 김형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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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생인 최재은 작가는 당시 유행한 카뮈, 카프카, 사르트르, 하이데거 등 유럽의 실존주의 세례를 받은 전후세대다. 일출 장면을 숭고미에 담아 인간존재의 유한성을 부각시킨 위 작품은 그런 특성을 잘 보여준다. 이 작품을 보고 있으면 하이데거의 시 '존재를 묻으며(The question of Being)'가 생각난다.

"신에게 우리는 너무 늦게 왔고 / 존재에게는 너무 일찍 왔네 / 존재에서 비롯된 시(詩)가 인간이라네 / 하나의 별을 향해 다가서는 것, 단지 이것뿐이네 / 사유는 마치 하나의 별처럼 / 일찍이 세상의 하늘에 걸려 있는 하나의 사상일 뿐이라네"

그는 기자간담회에서 "한국인은 무한성의 깊이를 추구하는 경향이 강하다"며 자신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사물의 본질이 뭔지를 꿰뚫어보는 작가가 되고 싶다"고 말한다. 그가 이렇게 본질적이고 비물질적인 것을 추구하며 맑은 심성과 풍부한 정서를 간직할 수 있었던 것은 오히려 아무것도 없었던 세대였기에 더 가능했는지 모른다.

삶의 단상을 묵혀둔 시처럼 드로잉하기

최재은(Jae-Eun Choi) I '만물상(The Myriad of Things)' 낡은 종이와 목탄(Old paper and Charcoal) pencil Dimensions variable 2012. 여기엔 "이슬방울을 보고 강물을 생각하는 시인, 소멸해가는 자신, 1001년을 살아온 노송나무와 붉은 사슴, 서울의 10월 하늘과 정원의 일몰, 달의 시샘, 순환이 지속되는 집, 진리를 자각한 부처" 등등과 같은 시구들이 적혀 있다
 최재은(Jae-Eun Choi) I '만물상(The Myriad of Things)' 낡은 종이와 목탄(Old paper and Charcoal) pencil Dimensions variable 2012. 여기엔 "이슬방울을 보고 강물을 생각하는 시인, 소멸해가는 자신, 1001년을 살아온 노송나무와 붉은 사슴, 서울의 10월 하늘과 정원의 일몰, 달의 시샘, 순환이 지속되는 집, 진리를 자각한 부처" 등등과 같은 시구들이 적혀 있다
ⓒ 김형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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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전시주제가 '가장 오래된 시(Verse)'인 건 이번 전시를 시간을 묵혀 쓴 시로 봤기 때문인가. 지금은 텍스트로 시를 쓰는 시대가 아니라 이미지로 시로 쓰는 시대가 되었다. 작가도 그런 개념으로 작업실에서 작업을 하다 떠오른 단상이나 사물과의 관계성을 통해 얻은 깨달음을 단시나 문장을 그림처럼 보여준다.

독일에서는 다 읽은 책을 집 앞에 나둬 필요한 사람이 가져가도록 하는 미풍양속이 있는데 작가는 문 앞에 버린 1900-1920년대 인쇄된 책, 책도 책이지만 그 오랜 세월이 묻은 백지에서 엄청난 상상력을 자극받는다. 하드커버 뒤에 글자 없는 백지가 있다는 걸 알고 그 누렇게 바랜 빈 여백에 목탄화처럼 적어나간다.

최 작가는 "나무가 종이가 되고 종이가 책이 되고 다시 어느 집 책장에 꽂혀 있다가 미술재료가 되는 과정을 추리하면서 그런 긴 시간의 흔적이 묻은 종이를 만질 때 마음이 설레고 거기에 말할 수 없는 감동을 받았다"고 털어놓는다.

독일 베를린에서 하늘을 재발견

최재은(Jae-Eun Choi) I '유한성(Finitude)' Video installation with sound 8 hours 2012. 베를린 근교 스토르코프(Storkow)에서 작업
 최재은(Jae-Eun Choi) I '유한성(Finitude)' Video installation with sound 8 hours 2012. 베를린 근교 스토르코프(Storkow)에서 작업
ⓒ 김형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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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전시의 하이라이트는 1층 전시실 입구의 처진 커튼 속으로 들어가면 칠흑 같은 어둠 속을 들어가면 볼 수 있는 비디오작품이다. 커다란 밤하늘의 은하수가 보이는 대형영상이 3개나 된다. 베를린 근처 '스토르코프'에서 해질녘부터 새벽녘까지 8시간 동안의 하늘을 찍은 것이다. 물론 이런 작업은 영화처럼 많은 사람이 동원된다.

깜깜한 밤하늘에 작가의 발자국 소리도 들려와 관객의 시각과 청각을 자극해 마치 관객이 사진을 찍은 곳의 숲 속을 걷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한다. 또한 그걸 리얼타임으로 체험할 수 있으니 그 현장감이 더 강하게 느껴진다.

최 작가는 독일 베를린에 체류하면서 "너무 일찍 해가 지는 북유럽에서 처음으로 햇빛의 소중함을 느꼈다"며 "숲이 있는 작업실에서 생태적인 환경을 접하면서 경이로운 하늘의 웅장함을 발견했다"고 말한다. 독일에서 하늘을 재발견하다니 뜻밖이다.

그는 또한 위 작품에 대해 "하늘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열려 있는 공간이며 사색의 대상이기에 사람들로 하여금 삶의 좌표나 존재이유를 계속 묻게 만든다"며 "유한한 인간과 무한한 하늘이 충돌할 때 생기는 감동을 전하고 싶었다"라고 덧붙인다. 이런 밤하늘의 웅장함을 보고 있으면 절로 우리인간의 왜소함도 돌아보게 된다.

지상에서 천상으로 가교 잇기

최재은(Jae-Eun Choi) I '환영의 이면(The Other Side of Illusion)' 비디오작품 2010. '아소카의 숲' 중 한 작품으로 나무를 통해 작가는 시간을 초월한 생명의 이미지와 영원에 도달한 영혼을 상징적으로 그리고 있다
 최재은(Jae-Eun Choi) I '환영의 이면(The Other Side of Illusion)' 비디오작품 2010. '아소카의 숲' 중 한 작품으로 나무를 통해 작가는 시간을 초월한 생명의 이미지와 영원에 도달한 영혼을 상징적으로 그리고 있다
ⓒ 최재은(Jae-Eun Cho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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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맥락에서 도쿄 하라미술관에서 선보인 위 작품은 흥미롭다. 최 작가는 1986년부터 지층에 덮인 생명체를 테마로 한 '지하세계(world underground)' 연작을 해왔는데 이 작품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 여기서 나무는 지상과 천상을 잇는 가교 같다.

이번 전시를 개괄적으로 보면 어둔 시대에 별을 그리워하며 하늘을 대한 부끄러움을 노래한 윤동주의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혹은 "별 하나에 추억과 사랑과 쓸쓸함과 동경과 어머니, 어머니" 같은 시구가 연상되는 게 사실이다.

하여간 그는 이런 개념미술을 통해 수천 년간 우리의 정신세계를 지배해온 하늘을 동경하고 하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돌아왔다. 60대를 앞둔 그에게 이런 주제는 잘 어울린다. 그리고 작품전반에서 작가의 이런 체취가 진하게 풍긴다.

개념미술가 최재은(Jae-Une Choi)은 누구인가
최재은 작가
 최재은 작가
ⓒ 최재은 국제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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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서울 태생으로 1970년대 중반 일본으로 건너가 활동하다가 1976년 일본 꽃꽂이양식에 매료되었고 거기서 일본 아방가르드 예술의 거장인 테시가하라 히로시(1927-2001)로부터 사사했고 '소게츠 화랑'에서 백남준, 보이스 등 플럭서스 대가들을 만나 자연스럽게 작가가 된다.

1985년 이사무 노구치 조각에 작업한 설치 작품을 선보인 첫 개인전 이래, 1988년 국립현대미술관에 '과거-미래'와 1990년 건축가 김수근의 대표작인 장충동 경동교회 옥상에 3,000개의 대나무와 조명 등을 이용한 '동시다발'을 선보였고, 1991년 이탈리아의 '갤러리아 밀라노'와 제21회 '상파울로비엔날레'에 초대받았다.

1993년 '국제갤러리' 개인전이 있었고 같은 해 대전엑스포에 참가하여 4만여 개의 빈 병으로 재생조형관을 설계했다. 같은 해 파리 유네스코건물 옥외에서 열린 다실축제에 외국건축가들과 공동 작업도 했고 1994년 삼성의료원에 설치미술 '시간의 방향'을 선보였다.

1995년 제 46회 베니스비엔날레에 일본대표(커미셔너 이토 준지)로 나갔다. 1998년 해인사의 성철스님 사리탑 '선의 공간' 등 굵직한 대형조형물을 설치했다. 2012년 제7회 서울국제미디어아트 비엔날레에도 참가했다. 국립현대미술관, 삼성미술관 리움, 삼성의료원, 프라하 국립미술관, 도쿄 하라미술관 등에 그의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덧붙이는 글 | 국제갤러리 02) 2735-8449 www.kukjegallery.com 입장무료



태그:#최재은, #개념미술가, #전후세대, #오래된 시, #유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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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중 현대미술을 대중과 다양하게 접촉시키려는 매치메이커. 현대미술과 관련된 전시나 뉴스 취재. 최근에는 백남준 작품세계를 주로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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