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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몽유병자들의 나라를 만들었다. 세상의 문제를 둘러보며 그것이 없어지기를 간절하게 소망해도, 문제는 끈질기게 지속된다. 그러면 우리는 결국 일종의 도덕적 환상에 빠져든다."(19쪽)

얼마 전 읽은 책, <더 나은 세상을 위한 꼼꼼한 안내서>(동녘, 2012년, 이하 '꼼꼼한 안내서')는 이렇게 시작한다. 나는 '도덕적 환상'이라는 말에, 마치 내 벗은 몸을 들킨 것처럼 화들짝 놀랐다. 그리고 집에 돌아가서 내가 지금껏 했던 일, 하고 있는 일, 그리고 하고 싶은 일들을 천천히 끄집어내 공책 위에 적어보았다. 했던 일은 많지 않고, 하고 있는 일은 참으로 보잘 것 없으며, 하고 싶은 일이란 게 딱히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 한 마디로 말하자면 지금껏 별 생각 없이 살아온 게 아닌가 하는 반성만이 빈 종이 위에 가득 적혔다.

나는 성북구 정릉에서 태어났고 오래 전 거길 떠나 지금은 다른 곳에 산다. 정릉은 고작 어린 시절을 보냈던 정도로 짧은 기간 동안 살았던 것인데(그나마도 태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강원도 태백으로 옮겨 산 것을 빼면 그 기간은 더 짧아진다), 내가 태어난 곳이라는 느낌 때문인지, 그리고 개발제한구역으로 묶여 지금껏 별다른 변화 없이 늘 그대로인 동네 모습 때문인지 가끔 거길 가면 마치 어머니 품같이 편안한 느낌을 준다.

말하자면 내가 지금 사는 곳은 일산, 일하는 곳은 은평, 태어나고 자란 곳은 성북동인 셈이다. 갑자기 이게 무슨 상관이냐고 누군가 되물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내겐 대단히 중요한 문제다. 나는 지난 10년 가까지 컴퓨터 회사에 다니면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이십대를 보냈고(그 회사는 강남에 있다), 더 이상 그렇게 못 살겠다는 생각에 거길 그만두고 헌책방을 차려 일한 지 6년이 됐다. 직원이 많아서 다 기억하지도 못하고 딱히 그래야 할 필요도 없을 만큼 큰 회사에 다니던 것에 비하면 지금 나는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한가하게 일한다.

남는 시간이 많다보니 일하는 것 외에 여기저기 기웃거리거나 한참동안 딴 생각에 빠져있어도 아무도 뭐라 하는 사람이 없어서 좋다. 그 즈음부터 시간이 나면 하루 종일 시간을 빼서 정릉에 다녀오곤 했다. 회사를 그만두기 얼마 전부터 그렇게 정릉에 왔다 갔다 했으니 벌써 십년이 훌쩍 넘는 시간 동안 짝사랑에 빠져있는 셈이다. 다시 정릉으로 집을 옮겨볼까 생각도 했지만 뭔지 모를 복잡한 생각에 사로잡혀서 아직 그러지 못하고 있다.

그 생각이 무얼 뜻하는지 얼마 전 정릉에 다녀와서 조금 짐작했다. 몇 해 전부터 서울에, 그리고 이제는 거의 전국에 '마을 만들기'라는 이름으로 여러 가지 일들이 생기는 걸 본다. 아마도 좋은 일인 것 같고, 특히 도시에서 마을이라는 개념이 사라지고 있으니 그걸 되살려 보자는 취지인 것 같고, 같은 지역에 있는 사람들끼리 팍팍하게 사는 모양을 바꿔보자는 말인 것 같고, 어쨌든 나쁜 일 같지 않다. 지금까지 그렇게 믿었고, 그런 일에 깊이 관여하지는 않았지만 나름대로 이것저것 지원을 보내며 산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정릉에 다녀와서 생각을 조금 달리하게 되었다.

그것은 아주 사소한 것으로부터 시작됐다. 정릉은 내가 태어난 곳이고 또래 아이들과 함께 하루 종일 돌아다니며 놀았던 곳이기 때문에 골목 곳곳을 잘 안다. 나는 특히 골목과 높은 계단을 좋아한다. 거기서 친구들을 만났고, 마주치는 어른에게 인사했으며, 맘에 두고 있던 여자애와 우연을 가장하여 마주치기 위해 일부러 기다렸다. 정릉에 갈 때마다 나는 그 골목과 계단을 천천히 느끼며 도시에 나가 살며 닳아버린 감정이 치료되는 걸 느꼈다.

그날도 바로 그것을 예상하며 갔는데 분위기가 조금 달랐다. 정릉에도 이제 마을 만들기, 만을 문화 가꾸기 운동을 하고 있는 모양이다. 나는 거기서, 내가 너무나도 좋아했던 골목 담벼락이 화사한 색깔로 다시 칠해진 것을 보았다. 어릴 적 사방치기를 하며 놀던 바닥이 깔끔한 시멘트로 발라진 걸 보았다. 모두 마을 문화 가꾸기 사업 중 하나라고 한다.

올해 이 길 바닥이 전부 시멘트로 바뀌었다.어렷을 적 이 길에서 사방치기를 하던 기억도 전부 시멘트 밑으로 깔린 것 같아 마음이 무겁다.
▲ 작년 이즈음 정릉 골목길 올해 이 길 바닥이 전부 시멘트로 바뀌었다.어렷을 적 이 길에서 사방치기를 하던 기억도 전부 시멘트 밑으로 깔린 것 같아 마음이 무겁다.
ⓒ 윤성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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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해서 낙서 가득한 담벼락과 울퉁불퉁한 길이 예쁘게 변했을지는 몰라도 내 속에 있던 어릴 적 추억 한 덩어리는 사라지고 말았다. 마을 사람들에게 얘길 들어보니까 여기도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마을 도서관이나 센터 같은 것을 짓고, 평생학습관에서 강연을 열고, 마을카페와 청소년 쉼터 사업 같은 것도 계획 하는 모양이다. 나는 생각에 잠겼다. 그렇게 하면 마을 문화 일구는 것에 도움이 될까? 여기 사는 사람들은 더 나은 삶을 살게 될까? 결론을 말하자면, 좀 비관적인 생각이 들었다.

마을은 사람이 사는 곳이다. 문화는 사람과 사람이 어울려 만들어낸 것이다. 나는 문화를 일부러 만들 수는 없다고 믿는다. 한 사람이나 단체가 마을에 문화를 만들 수 없다. 설령 무척 괜찮은 어떤 것을 만들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문화라기보다 '사업성과'라고 표현해야 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마을에 문화를 일구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과연 그 노력은 무엇을 위한 노력인지 깊이 생각해보아야 할 일이다. 앞서 책에서 말한 '도덕적 환상'은 아닐까.

순서가 있다면, 마을 문화는 만드는 것이 아니라 없애는 것부터 해야 된다. 마을 사람들을 지배하고 있는 고단한 삶과 그걸 얽매고 있는 사슬을 먼저 없애면 마을 문화는, 제발 만들지 말라고 해도 이미 자유롭게 된 사람들이 스스로 나서서 만드는 것이다. 삶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그 위에 만드는 마을 문화는, 그저 보기 좋고 여러 사람들에게 도덕적 환상을 심어주는 멋진 이벤트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꼼꼼한 안내서>는 '참여하고 행동해서 우리가 세상 만들기'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책 내용은 다분히 미국적인 것이라 우리 실정에 맞추기 어려운 부분도 더러 있다. 하지만 대부분 여기서 말하는 내용이 거창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한두 사람이라도 뜻이 맞으면 해볼 만한 것들로 가득하다. 또 이렇게 '참여하고 행동'하는 것 거의 전부가 한두 번 행사로 끝나는 게 아니라 우리의 생활 속에 자리 잡은 사소한 부분을 건드려서 개선하려는데 의미가 있다. 이것은 마을에 북카페를 만들거나 청소년 센터 같은 걸 짓고 대규모 축제를 기획하는 일에 대한 것이 아니다.

영화감독이자 동물보호 시민단체 [카라]의 대표인 임순례 님이 추천사를 썼다.
▲ [꼼꼼한 안내서] 표지 영화감독이자 동물보호 시민단체 [카라]의 대표인 임순례 님이 추천사를 썼다.
ⓒ 윤성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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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면, 우리가 사는 데 가장 기본이라고 배운 것 – '의식주' 문제에 대해서 마을 사람들이 지금 어떤 상태인지 알아내고 거기에 묶여있는 매듭을 풀어야한다. 사람들 생활가운데 가득 쌓인 쓰레기 같은 삶의 불순물을 없애는 것이 마을 문화 운동의 시작이다. 이것에 대해서는 <꼼꼼한 안내서> 245쪽부터 시작되는 제 2부, '공동체' 부분을 참고할 만하다.

활동가들은 마을에 센터 짓는 일 대신 마을 사람들이 지금 적정한 주거지에서 살고 있는지, 혹은 생활하기 적당한 임금을 받고 있는지, 부당한 노동이나 고용 때문에 삶이 노동에만 매여 있지 않은지 확인하고 이런 일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라고 말한다. 청소년들이 공부에만 몰두하지 않아도 되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것은 센터가 아니라 어른들의 관심과 참여다.

아침 일찍 일 나갔다가 밤늦은 시간에 집에 와서 고작 텔레비전 한두 시간 보고 잠들어버리는 사람들은 마을 카페에 나와서 한가하게 차 마실 시간이 없다. 피 말리는 경쟁에 내몰린 아이들의 현실이 그대로 존재하는 한 청소년 쉼터가 무슨 필요가 있나? 문제없는 집에서 살고 정당한 노동시간 동안 일하며 그에 맞는 임금을 받는다면 이것으로부터 마을 문화가 시작된다. 청소년과 어린이들이 자유로워지면 동네 골목 어디든 청소년 쉼터가 된다.

지난 2010년 겨울, 은평구에서 '우리 동네 노동자 인권 찾기 모임'이라는 이름으로 이 지역 사람들이 어떻게 일하고 있는지 설문조사 했던 것을 기억한다. 내가 알기로 몇몇 활동가와 뜻을 같이하며 돕는 이들이 동네를 돌아다니며 600명이 넘는 노동자들을 만났다. 조사를 끝낸 다음 정리하고 통계를 내서 보고회까지 했는데 그 내용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 결과를 조금이라도 관심 있게 훑어본 사람이라면 우리 마을 사람들이 얼마나 빠듯한 생활을 하는지 짐작하고 놀랐을 것이다. 사실은 이런 활동이야말로 마을 문화를 살리고 가꾸는데 밑거름이 되는 귀중한 일인데 묻혀버린 것 같아 마음이 씁쓸했다.

600명이 넘는 마을 사람들이 일하는 모습을 관찰하고 일일이 이야기를 나누며 만든 꼼꼼한 설문지를 모은 후 책자로 만들었다.  나는 이것을 여전히 소중히 갖고있다.지금껏 이렇게 우리 삶 가까이까지 들어와서 조사하고 통계 낸 자료는 어디에서도 보지 못했다.
▲ 노동실태조사 보고서 600명이 넘는 마을 사람들이 일하는 모습을 관찰하고 일일이 이야기를 나누며 만든 꼼꼼한 설문지를 모은 후 책자로 만들었다. 나는 이것을 여전히 소중히 갖고있다.지금껏 이렇게 우리 삶 가까이까지 들어와서 조사하고 통계 낸 자료는 어디에서도 보지 못했다.
ⓒ 윤성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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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저런 행사나 건물 짓기를 통해서 마을 문화를 만들려는 노력은 단지 그 행사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만 효과가 있을 뿐이다. 게다가 행사에 참여하지 못하거나 그럴만한 시간적 여유도 없이 사는 사람들이 마을에는 너무도 많은데 그들은 대부분 소외되고 만다. 소외된 사람들은 참여하고 행동할 권리마저 활동가들에게 빼앗기는 상처를 받기도 한다. 마을에는 축제기간 가족 단위로 밖에 나와 즐거운 한 때를 보내는 사람들보다 더 많은 이들이 살고 있다는 걸 먼저 생각해야한다.

더불어 <꼼꼼한 안내서>는 '돈'이나 '음식', 그리고 '개인'이라는 장을 통해 넓은 영역이 아니라 바로 내 주위를 먼저 둘러보라는 조언을 한다. 다시 말하지만 마을은 사람이 사는 곳이다. 그 사람은 바로 나이고 당신이다. 다른 별에서 온 외계인이 아니라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바로 마을의 주체이고 이 주체들이 빠짐없이 주인이 될 때 마을 문화가 싹 틀수 있다. 누가 모래 속에 모종을 심고 시멘트 바닥에 씨앗을 뿌리는가? 마을 문화는 사업(business)이 아니다. 일을 벌이고 성과를 거두려는 마음가짐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참여와 행동을 통해 먼저 우리 사는 모양새가 나아져야한다. 문화는 그렇게 다져진 위에서만 아주 작은 떡잎을 내민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은평시민신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더 나은 세상을 위한 꼼꼼한 안내서 - 참여하고 행동해서 우리가 세상 만들기

엘리스 존스.로스 핸플러.브렛 존슨 지음, 장상미 옮김, 동녘(2012)


태그:#마을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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