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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가족과 함께 런던 시내에서 전철을 타고 오다가 같은 표로 경전철, DLR(Dock Line Railway)을 갈아탔다. DLR은 약 15분 동안 런던 동쪽의 템즈강 남안에 자리한 그리니치(Greenwich)로 우리를 안내하고 있다. 우리는 그리니치 천문대(Greenwich Observatory)를 가기 위해 DLR 커티삭(Cutty Sark) 역에서 하차했다. DLR 출구에는 출입구가 없지만 벌금을 물지 않기 위해서 오이스터 카드(Oyster Card)를 교통카드 판독기에 찍어서 교통요금을 결제했다.

런던의 경전철로 런던 시내와 그리니치를 연결한다.
▲ DLR 런던의 경전철로 런던 시내와 그리니치를 연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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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니치는 런던 시에 포함되는 런던 외곽이지만 마치 영국 지방의 한 소도시에 온 것 같이 포근하다. 우리는 그리니치 공원 쪽으로 방향을 잡고 걷다가 과거의 왕립 해군사관학교였던 그리니치 대학 구내로 들어섰다. 템즈강 선착장에는 런던 시내를 연결하는 유람선이 자리하고 있고 그 뒤편으로 런던 금융가의 고층건물들이 스카이라인을 자랑하고 있다.

런던에 속해 있지만 한적하고 마음이 편안해지는 곳이다.
▲ 그리니치 런던에 속해 있지만 한적하고 마음이 편안해지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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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풍스러운 그리니치 구 해군사관학교 건물은 현재 그리니치 대학 건물로 사용되고 있다. 채플(Chapel)과 같은 구조로 나란히 마주 서 있는 회화의 홀(Painted Hall)로 들어섰다. 나는 이 거대한 홀 안에서 예상치 않은 놀라움을 만났다. 나는 높은 장방형의 천장을 올려다보고 쏟아질 듯한 벽화의 장관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홀의 벽면과 정면에 가득히 담긴 벽화는 사람들을 압도하고 있다.

과거에 영국 해군사관학교로 사용되었다.
▲ 그리니치대학 채플 과거에 영국 해군사관학교로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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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니치 대학 뒤편의 나지막한 언덕에 그리니치 공원(Greenwich Park)이 펼쳐진다. 수백년 된 공원이라 푸른 잔디밭 주변으로 늘어선 고목들이 아름답다. 정원 가꾸기를 좋아하고 조경산업이 발달한 영국답게 공원은 풍성하고 아름답다. 많은 것을 꾸미지 않고 억지로 드러내 보이려 하지도 않으면서 여유 속에 자유로움이 느껴진다. 그리니치 공원은 참으로 여름에 산책하기 좋은 곳이다.

홀의 벽면과 천장은 거대한 회화로 황홀하다.
▲ 그리니치 대학 회화의 홀 홀의 벽면과 천장은 거대한 회화로 황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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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니치 천문대(Greenwich Observatory)는 이 그리니치 공원 한가운데에 있다. 1675년에 세워져서 영국의 왕립 천문대로 이용된 그리니치 천문대로 가려면 공원의 경사진 언덕길을 올라가야 한다. 그리니치가 바로 영국왕실이 소유하던 망루가 있던 곳이기에 천문대가 세워진 후에도 그리니치 왕실 천문대라는 이름이 붙었다.

오랜 나무와 잔디밭으로 평화롭다.
▲ 그리니치 공원 오랜 나무와 잔디밭으로 평화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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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싱그러운 잔디밭과 로즈 가든이 펼쳐진 언덕길을 천천히 산책하면서 올라갔다. 작은 언덕길이지만 긴 여행에 지친 다리로 오후에 이 언덕길을 오른다면 약간은 피곤할 수 있다. 여행길에 만난 한국의 한 할아버지는 손자들을 데리고 많이 걸었기 때문인지 얼굴에 피곤함이 엿보인다.

그리니치 천문대 입구에서 많은 여행자들이 한곳에 몰려 사진을 찍고 있다. 얼핏 보기에 평범해 보이는 큰 시계지만 세계에서 가장 유명세를 치르는 시계이다. 이 시계는 세계의 기준이 되는 표준시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 아날로그 시계의 정식 이름은 왕립 그리니치 천문대의 셰퍼드정문 시계(Shepherd Gate Clock)이다. '셰퍼드(Shepherd)'는 1852년에 발명가 '찰스 셰퍼드(Charles Shepherd)'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세계 시계 시간의 기준이 되는 시계이다.
▲ 그리니치 시계 세계 시계 시간의 기준이 되는 시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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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보면 위엄이 느껴지는 이 시계가 지구의 표준시를 담당하고 있다. 이 시계를 기준으로 지구의 시간을 정하기로 약속을 했기 때문에 이 시계는 가장 정확한 지구의 시계이다. 지구를 대표하는 상징성 앞에서 많은 여행자들이 카메라를 빼어들고 있다.

표준시계 아래쪽을 자세히 보니 약간 녹이 슨 검은 철판 위에 흰 글씨로 'british yard', 'two feet', 'One Foot'가 적혀 있다. 그리니치 천문대 정문의 시계가 세계의 표준시를 나타낸다면 이 작은 글씨들은 영국을 포함한 세계의 도량형 기준을 나타낸다. 이 표준길이 도량형도 여러 사람들의 약속을 통해 통일한 것이니 이 작은 표지판은 영국의 산업발전의 시작점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그리니치 천문대 내부의 본관과 별관은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리니치 천문대가 천문대의 기능을 하고 있던 당시와 별로 달라진 것이 없어 보일 정도로 박물관 건물들은 중세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이 천문대가 1949년에 천문대의 임무를 마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런던이 극심한 산업화로 인한 스모그로 이 언덕에서 별을 관측하는 것이 더 이상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세인트 폴 대성당을 지은 건축가 크리스토퍼 렌(Christopher Wren)이 설계한 본관과 별관은 왕립 천문대 당시 모습 그대로 남아있다. 여전히 자리를 지키며 대영제국 당시의 영화를 자랑하는 이 건물들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박물관 안에는 경도의 발견과 관련된 유물이 전시 중이다.
▲ 그리니치 박물관 박물관 안에는 경도의 발견과 관련된 유물이 전시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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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니치천문대 박물관 내부로 들어섰다. 천문대의 역사 뿐만 아니라 시대를 선도했던 귀중한 천문학 도구들과 각종 천체 관측 자료가 가지런히 전시되어 있다. 천문대를 처음 만들 당시의 오랜 관측기계들은 세계의 과학역사에서 국보급 유물들이다. 시계박물관 안의 시계의 진화는 바로 전 세계 시계의 역사를 보여준다. 오랜 시간이 지난 기계들이지만 지금 봐도 사용해보고 싶을 정도로 탐스럽다. 박물관 벽면의 그림들은 대항해 시대. 바람에 몸을 맡긴 범선들이 끝도 없는 바다를 항해하고 있다.

돌고래의 꼬리가 만나는 부분의 그림자가 시간을 나타낸다.
▲ 돌고래 해시계 돌고래의 꼬리가 만나는 부분의 그림자가 시간을 나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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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 밖으로 나오니 박물관 남쪽의 안마당에 1977년에 제작된 돌고래 동상이 있다. 이 돌고래는 해시계인데 두 마리의 돌고래 꼬리 그림자가 함께 모여서 가리키는 지점이 현재 시간을 표시하고 있다. 얼마나 신기한 작품인지 나는 돌고래의 꼬리를 한참 관찰했다. 동판 위에는 10분 단위의 물결 무늬 선이 그어져 있어서 꽤 정확한 시간을 가리키고 있었다. 과학적이지만 돌고래의 움직임을 표현한 예술작품이다.

그리니치 천문대 건물 중앙에는 본초자오선이 빨간색 선으로 가로지르고 있다. 그리고 이 자오선은 박물관 앞 바닥에까지 연결되어 표시되어 있다. 자오선은 공식적으로 지구의 동서를 가로지르는 선으로서 지구의 세로선인 경도 0°, 경도의 기준선이다. 경도 원점을 그리니치 왕립 천문대로 하기로 한 것은 1884년 워싱턴의 국제회의에서였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선이지만 사람들은 이 선을 형상화하여 바닥에 표시하였다. 이 자오선을 사진기에 담기 위해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있다. 그들이 줄을 서 있는 이유는 지구를 동반구와 서반구로 나누는 본초 자오선(本初子午線), 즉 그리니치 자오선 위에 양 다리를 걸쳐 놓고 사진을 찍기 위해서이다.

그리니치 자오선 위에서 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이 줄을 서 있다.
▲ 그리니치 자오선 그리니치 자오선 위에서 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이 줄을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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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신영이도 본초자오선 위에 발을 걸치기 위해서 줄을 섰다. 자오선 바닥을 보니 세계 주요 도시의 경도가 표시되어 있고 관광객들은 자신의 나라의 도시 이름이 있는 곳에서 다리를 벌리고 사진을 찍는다. 우리는 당연히 서울이 이 지구상의 대도시들 사이에 이름을 넣고 있는지 찾아보았다. 역시 우리의 서울도 당당히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본초자오선 바닥에 표시된 서울은 'Seoul 127°00′ E', 즉 동경 127도라고 표시되어 있다.

이곳은 세계의 공간과 시간의 기준이 되는 곳이다. 대항해 시대에 이 그리니치 기준선은 바다를 항해하는 선박들에게 나아갈 방향을 알려주던 선이었다. 사막을 지나던 근대의 모험가들도 이 그리니치 기준선을 기준으로 삼아 발걸음을 나아갔다. 그리고 세계의 천문학자들도 한동안 그리니치 천문대를 위치 측정시의 기준으로 생각해 왔다. 이 그리니치 기준선은 지구의 역사발전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연결고리였다. 나는 책에서만 보던 지구의 역사 위에 서 있음에 기분이 미묘했다.

그 명성에 비해 작은 건물과 한적함. 그리니치 천문대가 있는 그리니치 공원은 나무들 속에서 바람이 시원하다. 이곳이 런던인가 싶을 정도로 공기가 깨끗하다. 나는 런던여행에서 그리니치를 놓치지 않은 것을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피카딜리에서 뮤지컬을 보기 위해 발걸음을 서둘렀다. 아쉬움을 남긴 채 그리니치 언덕을 내려왔다. 나는 다시 런던의 하늘을 올려 보았다. 파란 하늘은 먹구름 사이로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 있었다. 나는 런던 시내로 돌아가는 시간 동안 비가 내리지 않기를 바랐다. 하루 내내 걸어 다리가 피곤했지만 나는 런던의 뮤지컬을 보기 위해 가족을 데리고 발걸음을 서둘렀다.

덧붙이는 글 | 오마이뉴스에만 송고합니다. 제 블로그인 http://blog.naver.com/prowriter에 지금까지의 추억이 담긴 세계 여행기 약 280편이 있습니다.



태그:#영국, #런던, #그리니치, #경도, #자오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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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와 외국을 여행하면서 생기는 한 지역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는 지식을 공유하고자 하며, 한 지역에 나타난 사회/문화 현상의 이면을 파헤쳐보고자 기자회원으로 가입합니다. 저는 세계 50개국의 문화유산을 답사하였고, '우리는 지금 베트남/캄보디아/라오스로 간다(민서출판사)'를 출간하였으며, 근무 중인 회사의 사보에 10년 동안 세계기행을 연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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