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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봄부터 시작된 <피디수첩>은 성역 없는 취재보도로 한국의 대표 탐사보도 프로그램으로 자리 잡았다.
 1990년 봄부터 시작된 <피디수첩>은 성역 없는 취재보도로 한국의 대표 탐사보도 프로그램으로 자리 잡았다.
ⓒ <피디수첩>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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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월 어느 날 밤, PD수첩 편집실

누군가 눈에 모래를 한 줌 뿌려 넣은 것 같은 밤이었다. 나는 이틀째 편집실에 갇힌 채로 100권 가까운 테이프들과 씨름하고 있었다. 말이 쉬워서 100권이지, 1권에 60분 분량 촬영 영상을 꼬박 100시간 동안 앉아서 봐야 하는 '고행'. 그러나 작가도 사람인지라, 하다 보면 요령도 생기고 꾀가 생겨 보통 그냥 흘러가는 그림은 빠른 배속으로 돌려보곤 한다. 하지만 이번은 그럴 수가 없었다. 미친 듯이 찾고 싶은 것이 있었다. '용역'이었다. 나는 그때, 2009년 새해 벽두에 벌어진 '용산 참사' 관련 방송을 준비하던 중이었다.

현장에 나간 PD들이 취재한 바로는 경찰특공대 진압 전부터 용역이 철거민들을 괴롭혀 왔다고 했다. 토끼몰이하듯 빈 건물에 불을 질러 연기를 피워 올리고, 심지어 경찰과 함께 물대포를 쏘며 강제 진압을 거들었다는 증언도 나왔다. 하지만 경찰도, 정부도, 언론도, 철거민을 '화염병 투척'과 '도심 테러'의 원흉이라고 바라볼 뿐, 그들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참사 전날부터의 현장 모습이 담긴 모든 매체의 촬영 테이프들을 모아들여 산처럼 쌓아놓고, 나는 테이프 한 권 한 권 돌려가며 그 속에 담긴 영상들을 주시했다. 현장의 증언이 사실이라면, 분명 어딘가에 증거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진실의 꼬리는 쉽게 잡히지 않았다. 12시간... 24시간... 36시간... 눈은 충혈되고, 흔들리는 화면에 멀미가 몰려왔다. 문득, 이게 지금 뭐하는 짓인가, 밑 빠진 독에 물을 채워 넣는 콩쥐도 아니고···. 바닥난 체력에 오만가지 회의가 밀려왔다.

영화 <두개의 문> 한 장면.
 영화 <두개의 문> 한 장면.
ⓒ 영화 <두개의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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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밤, 그 여자. 장형운 작가

잠시 찬바람이라도 쐬자 싶어 편집실을 나섰다. 그 야심한 밤, 어둑한 편집실 복도에서 나는 어깨가 잔뜩 구부러진 그림자와 마주쳤다. 다음날 나갈 PD수첩 방송을 준비 중인 장형운 작가였다. 우직해 요령이라곤 모르는 후배. 연이은 밤샘 작업으로 안 그래도 하얀 얼굴이 투명해져 유령처럼 창백해 보였다. '편집실 좀비'라고 불리는, 딱 그 몰골이었다. 내일 방송이 민감한 내용이어서 '방송정지 가처분 신청'이 들어올지도 모른다, 대본 한 글자 한 글자가 조심스럽다, 진도는 안 나가고 방송 시간은 다가오니 심장이 타들어 가는 것 같다... 그녀는 빨갛게 짓무른 관자놀이를 더욱 꾹꾹 누르며 두통약이 있느냐고 물었다.

작가들 사이에서 이럴 때면 흔히 하는 농담이 있다. 시사 작가 10년이면 '돈· 명예· 권력' 빼고 모든 걸 얻는다고. 두통, 불면증, 근육통, 위염, 장염, 할부가 끝나지 않은 노트북... 그 밤 새삼스레, 그런데도 우리들은 왜 이 '짓'을 하고 있는가... 해묵은 고민이 안 그래도 지친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그 밤, 그 남자. 정재홍 작가

형운 작가에게 두통약이나 찾아주자고 들어선 한밤중의 사무실. PD수첩 자리에서 막 촬영을 마치고 돌아온 PD들과 정재홍 선배가 회의 중인 게 보였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걸 보니, 취재가 순탄치 않은 모양이었다. 잠시 후, 무거운 침묵을 깨고 재홍 선배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괜찮다. 다시 찾으면 된다. 뭐 이런 일 한두 번 겪나." 

재홍 선배는 동료 피디를 위로하며 짐짓 미소까지 지어 보였다.

그러니까 지금 선배네 팀은 '아이템을 접는' 순간이었다. 며칠 공들인 취재를 포기하고 새로운 주제를 찾아야 하는, '위기'의 시간이 찾아온 것이다. 그런데도 재홍 선배는 어깨가 축 처진 리서처들을 다독여 집으로 돌려보낸 후 홀로 책상을 정리했다. 방금 접은 아이템 관련 자료인양 산더미처럼 쌓인 신문 자료, 논문 자료, 프리뷰 노트들을 일일이 뒤져보고는 혹시나 다음에 쓸 것들은 남기고, 필요 없는 것들은 이면지 함에 추려냈다.

PD수첩만 (당시) 10년째 집필하고 있던 정재홍 작가를 두고 피디 작가들 사이에선 사람이 아니라는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 일본어로 '가미상(神님)' 혹은 '부처'라고 불리기도 했다. 매일 매주가 전쟁 같은 PD수첩을 그리 긴 세월 했으니 그가 죽어 화장하면 부처님보다 사리가 많이 나올 거다, 우리끼리 우스갯소리도 했었다.

'가미상' 재홍 선배가 이번엔 노트북을 켰다. 혼자서 이 밤에 새 아이템을 찾는 건가, 싶어 봤더니 가부좌를 튼 채 바둑을 두고 있다. 나는 선배한테 힘들어 죽겠다며 엄살이나 떨어보려던 마음을 접고 조용히 돌아섰다. 방송은 체력전이라며 담배를 끊고, 쉬는 날엔 등산을 가고, 행여 PD수첩에 누가 될까 은행대출조차 한 번 받지 않은 남자. 그의 유일한 '오락'이 바둑이었다. 선배의 머릿속이 얼마나 복잡할지, 이 야심한 시간 차마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바둑돌을 놓는 속은 또 얼마나 쓰릴지, 그저 짐작만 할 뿐이었다. 나는 끝내 두통약을 찾지 못한 빈손으로 사무실을 나왔다.

'PD수첩 작가'이게 하는 것들

새벽을 향해 가는 시각. 돌아와 다시 편집기 앞에 앉았다. 오늘은 집에 들어가 푹 자고 싶었는데, 나는 왜 아직 여기 있는 걸까. 저들은 왜 이 힘든 프로그램을 떠나지 못하나. 서로 술잔을 기울여도 그런 쑥스러운 이야기는 오간 적이 없기에, 우리는 서로가 이곳에 머무는 이유를 다 알 수 없었다.

낮게 한숨을 쉬며 다시 편집기 플레이 버튼을 누르는 순간, 형운 작가가 자판기 커피를 손에 든 채 편집실 문을 열고 나타났다.

"방송 직전도 아니면서 언니는 힘이 남아돌아요? 왜 벌써부터 밤샘이에요. 적당히 하고 집에 좀 가요." 

짐짓 너스레다.

그때 화면 속에선 용산 철거민들이 주저앉아 통곡하고 있었다. 대한민국의 모든 언론이 취재를 나오고, 여야 정치인들이 앞다투어 현장을 방문하고, 이례적으로 담당 검찰이 현장 조사하고, 정부는 신속한 사건 규명과 처리를 선언했지만, 사고 발생 하루가 저물도록 망루에 올라갔던 철거민 가족들은 아빠와 아들, 형제의 생사조차 확인 못 하고 있었다. 혹시나 살아 있을까, 희망과 절망을 오가며 이 병원 저 병원 헤매는 모습이 고스란히 화면에 담겨있었다.

말없이 함께 보던 형운 작가가 내 등을 툭툭 두드렸다.

"그래 언니. 오늘도 저랑 같이 밤새셔야겠네요." 

한마디를 남기고 그녀는 사라졌다. 그랬을 것이다. PD수첩 작가라면 그 화면 앞에서 모두가 같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우리에게 들려오는 아프고, 약하고, 억울한 사람들의 하소연. 그것을 못 들은 체할 수 없고, 그들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위로하고 싶은 마음. 그것이 '고행수첩'인 PD수첩을 3년씩, 5년씩, 12년씩 할 수 있게 만든 각자의 이유였을 것이다. 

그날 새벽이 끝나기 전 나는 결국 물대포를 쏘는 용역 영상을 찾아냈고, PD들은 지독하고도 끈질긴 추적 끝에 그가 모 용역업체의 과장이란 사실을 밝혀냈다. 용역과 전혀 관련 없다 발뺌하던 경찰의 거짓말이 드러나고, 급하게 수사를 마무리 지으려던 검찰은 1차 수사발표를 뒤로 미루고 보충 조사를 약속했다.

'PD수첩 방송의 파장' 'PD수첩이 밝혀낸 진실'... 신문지상을 장식한 큼지막한 활자들을 보며, 나는 뿌듯하기보단 착잡했다. 몇 날 며칠 몇 번이고 반복해 보았던 영상 속 망루 위의 철거민들. 건물 아래 기다리던 가족들을 향해, 취재진을 향해 하트를 그려 보이던 참사 전날 그들의 모습이, 그 후로도 오랫동안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용산참사 문제 해결을 위한 전국 순회 촛불문화제'가 2009년 8월 17일 저녁 부산 서면에서 열렸다. 사진은 용산 참사 희생자 부인들이 상복을 입고 촛불을 들고 참석한 모습.
 '용산참사 문제 해결을 위한 전국 순회 촛불문화제'가 2009년 8월 17일 저녁 부산 서면에서 열렸다. 사진은 용산 참사 희생자 부인들이 상복을 입고 촛불을 들고 참석한 모습.
ⓒ 윤성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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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8월. 이제는 말할 수 없습니다.

그로부터 3년 후 여름. 용산 철거민 문제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두개의 문>을 '한때 PD수첩 작가'들과 함께 봤다. 영화가 끝나고, 자리에서 일어나 극장 문을 나서는 내내 우리는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그날의 영상들이 생생히 떠올랐고, 한편으로는 입이 꽁꽁 묶여버린 지금의 방송 현실이 실감 났다. 누군가 무심한 듯 한마디 툭 뱉었다. "지금 다시 이런 일이 생긴다면, PD수첩에서 할 수 있을까?" 다시 '말할 수 있기' 위해 시작된 파업이 겨울과 봄을 지나 세 번째 계절을 보내는 중이었다.

6개월 가까운 파업기간 동안, 작가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며 지내는지, 밥은 먹고 사는지, 서로의 안부가 궁금해도 빤한 형편을 생각해 술자리 한 번 갖지 못했다. '다시 일 시작하면, 원고료 나오면, 그때 가서 회사 앞 포장마차에서 회포나 풀지' 미뤄왔던 만남··· 우리는 일터인 MBC가 아닌, 'PD수첩 작가 해고 규탄' 기자회견장과 폭염이 쏟아지는 집회현장에서 항의 피켓을 든 채 재회했다.

그 해를 넘긴 이듬해, 나는 3년을 채운 끝에 PD수첩을 그만뒀다. 빈자리는 후배작가로 채워졌다. 정재홍 선배는 올해 12년째 한결같은 'PD수첩 작가'다. 장형운 작가는 PD수첩 두 번째 고참 작가가 되었다. 파업이 종료되자마자 그들은 사전 통보 한마디 없이 전원 해고됐다. 이글거리는 아스팔트 위에서 마이크를 들고 눈시울을 붉히는 재홍 선배와 형운 작가의 모습 위로, 그날 밤 편집실의 그녀가, 사무실의 그의 모습이, 자꾸만 겹쳐 떠올라 나는 한동안 가슴이 먹먹했다.

PD수첩 작가들이 거리로 내몰린 지 어느덧 한 달이 지나고 있다. 이 순간에도 PD수첩은 결방 중이다. 아직도 PD수첩은 '말할 수 없다'.

덧붙이는 글 | 장은정 작가는 2007~2009 3년 간 PD수첩 집필했으며, '용산 참사, 그들은 왜 망루에 올랐을까''봉쇄된 광장 연행되는 인권''욕망의 땅 강남 재건축' 등을 집필했습니다. 현재 MBC <휴먼다큐 그날>을 집필 중입니다.



태그:#PD수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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