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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봄, 해묵은 살림살이를 정리하겠다며 온 집안을 뒤적이다가, 창고 선반에 올려둔 큼지막한 상자 앞에서 또 손이 멎고 말았다. 그 속엔 20여 년 전 한 방송 프로그램을 녹화해둔 VHS 테이프 100여 권이 들어있다.

당시 나는 그 프로그램의 작가였는데, 본 방송을 챙겨 볼 시간은 안 되고, 모니터는 해야겠기에 집에서 예약 녹화하기 시작한 것이 거의 4년을 이어갔다. 녹화 테이프는 한 번 보고 나면 사실 다시 들추게 되지 않는다. 그렇게 십수 년을 묵혀왔으니 보관상태가 좋지 않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난 그 테이프들을 차마 버리지 못하고 있다. 방송작가 일을 하면서 가장 설레고, 치열했고, 보람 있었던 시절의 놓치고 싶지 않은 기록이기 때문이다. 그 프로그램은 바로 <피디수첩>이다.

1990년 봄 문을 연 <피디수첩>의 성역 없는 도전

 1990년 봄부터 시작된 <피디수첩>은 성역 없는 취재보도로 한국의 대표 탐사보도 프로그램으로 자리 잡았다.
 1990년 봄부터 시작된 <피디수첩>은 성역 없는 취재보도로 한국의 대표 탐사보도 프로그램으로 자리 잡았다.
ⓒ <피디수첩>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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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디수첩>이 첫 방송을 시작한 1990년 봄. 당시 시청자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고 있던 교양프로그램은 <인간시대>라는 휴먼 다큐멘터리였다. 평범한 사람들의 성실하고 순박한 삶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진한 감동을 주곤 했다. 나 역시 가슴이 먹먹해지는 경험을 여러 번 체험했다. 그러면서 드는 의문 하나!

'왜 좋은 사람들은 대체로 가난하고 힘들고 사기도 잘 당할까. 그런데도 자신의 힘든 처지를 타고난 팔자려니, 아니면 한 때의 불운으로 탓하며 혼자서 삭여만 내는 것일까.'

그런 의미에서 '건강하고 상식이 통하는 사회를 위해 발로 뛰며 만든다'는 모토 아래 그해 막 문을 연 <피디수첩>은 내가 관심 있게 지켜보는 프로그램이 됐다.

그리고 이듬해, 나는 <피디수첩>의 작가로 팀에 합류했다. 군사정권의 체제가 약화되던 시절, 억울함을 호소하는 이웃들의 사연이 쌓여갔고, 한꺼풀만 벗기면 카메라를 들이댈 만한 우리사회의 일그러진 구석들은 곳곳에서 발견되곤 했다. 광주 민주화항쟁 이야기, 군과 쿠데타, 정권의 비자금과 같은 권력의 핵심에 닿아있는 문제부터 장애인 특수학교 건축을 반대하는 지역 이기주의, 외국인 노동자들의 인권 침해 실태, 세입자 울리는 주택문제, 학교를 자신의 소유물처럼 운영해온 어느 사학재단의 비리, 아동학대 실태, 한국전쟁 당시 수백 명이 학살·매몰됐던 금정굴에 대한 최초의 발굴 작업, 그리고 난립하는 사이비 종교단체의 폐해에 이르기까지 <피디수첩>은 성역 없는 도전을 이어갔다.

<피디수첩>의 정신, 압력을 이겨내다

다루는 사건과 사안들의 파장이 크다 보니 프로그램에 가해지는 압력도 만만찮았다. 송사에 휘말리기도 하고, 이권을 지키려는 가진 자들의 협박도 적지 않았다. 종교단체의 신도들이 방송국을 에워싸고 며칠씩 숙식하며 시위를 벌이는 곤혹스러운 경우도 있었다.

그런데 주목할 만한 것은 사태에 임하는 제작진의 태도였다. 문제가 생기면 취재PD들은 물론이고 팀장과 때론 국장님까지도 함께 대처방안에 대한 논의에 조곤조곤 의견을 모아가곤 했다. 이유야 어떻든 이런 상황을 만들어낸 PD들에 대한 질책이 있었을 것이고, 논의 과정 중에 언쟁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는 <피디수첩>이라는 이름을 걸고 취재에 나선 PD들, 그들에 대한 신뢰가 더 앞서있었기에 크게 얼굴 붉히지 않고 사태를 잘 방어하곤 했었다.

사실 탐사보도 프로그램을 만들다 보면, 이런 후폭풍은 기획과 취재단계에서 이미 예견되는 경우가 많다. 그럼에도 방송이 나갈 수 있었던 것은, 냉정한 관찰자의 시선으로 진실을 들여다보겠다는 <피디수첩>의 정신에 모두가 공감했기 때문이었을 게다.

20년 후, <피디수첩>의 '달라진' 제작 현장

 170일간 진행된 MBC노조 파업이 끝난 뒤 사측이 '분위기 쇄신'을 이유로 PD수첩 작가 6명을 전원 해고시킨 가운데, 6일 오전 서울 여의도 MBC 사옥 앞에서 한국방송작가협회 소속 작가들이 결의대회를 마친뒤 김재철 사장의 면담과 성명서를 전달하기 위해 이동하고 있다. 이날 집회는 지난 1970년 협회가 설립된 이후 최초로 드라마, 예능, 교양, 라디오 등 모든 부분의 방송작가들이 대거 참여해 PD수첩 작가들의 전원복귀와 책임자 문책 등을 요구했다.
 <피디수첩>의 PD들은 지금 자리를 잃었다. 프로그램의 한 축을 떠받치고 있던 작가들마저 일시에 모두 해고되고 말았다. 소통과 합의, 시대정신과의 공감을 내세우던 <피디수첩>은 설 자리를 빼앗겼다. 사진은 지난 6일 오전 서울 여의도 MBC 사옥 앞에서 한국방송작가협회 소속 작가들이 결의대회를 마친뒤 김재철 사장의 면담과 성명서를 전달하기 위해 이동하고 있을 당시.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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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최근 몇 년 사이 들려오는 제작 현장의 모습은 완연히 달라 보인다. 기획단계서부터 마찰이 빚어지고, 아이템 결제가 거부되는 빈도도 높아졌다고 한다. 한미FTA, 한진중공업 등 논란이 많았던 기획들은 권력이 불편해할 만한 아이템들이고, 방송이 되면 외압에서도 자유롭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국민들은 궁금하다. 전후관계를 분명히 알고 싶다. 그리고 탐사보도 프로그램은 그 사실을 시청자에게 알려주어야 할 임무가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필요한가. 문제에 등 돌리고 목소리 높이기 이전에 진중하게 검토하는 일이 우선일 것이다. 검증에 검증을 거듭해서 불편부당하게, 누구로부터도 책잡힐 일 없는 프로그램이 만들어지도록 힘을 모아주는 것 말이다. 내가 몸담았던 <피디수첩>은 그랬다. 논란이 예상되는 아이템이어도 사전에 기획을 폐기하거나, '이건 안 된다, 하지 마라'라고 데스크로부터 검열을 당해 본 기억이 거의 없다.

살인사건의 피의자가 무죄판결을 받았을 때의 일이다. 그는 경찰의 가혹 수사로 허위자백을 할 수밖에 없었는데, PD와 나는 그가 당했던 고문의 정도를 어떻게 영상화할까 의논하다가 크로키화로 그려보기로 했다. 한두 장의 스틸 컷이 아니라, 20여 을 촬영 편집해서 움직임의 효과를 내보기로 한 것이다. 편집본을 시사하던 팀장이 이것을 걸고넘어졌다. '한두 장의 그림으로도 충분히 의미를 전달할 수 있는데, 굳이 이런 장치를 써야겠느냐'는 입장이었다. 승강이 끝에 스틸 컷이 확정되고 방송은 나갔다. 내가 기억하는 데스크와의 마찰은 이런 정도의 수위가 전부였던 것 같다.

서로 간에 소통과 합의, 그리고 시대정신에 공감하고자 하는 자존심, 이는 <피디수첩>이 뿌리를 내리고, 오늘날까지 탐사보도 프로그램의 대표주자로 자리 잡게 만든 힘의 원천이었다. 그런데, 그 힘의 원천이 20년 후 지금은 모두 사라진 것인가.

내가 사는 세상을 밝게 만든다는 자부심

당시, 취재내용에 대한 조율보다 더 힘들었던 건 사실 열악한 제작 환경이었다. 네 명의 PD와 작가 두 명이 조를 이뤄 PD는 2주에 한 편, 작가는 매주 한 코너씩 20분 분량을 소화해야 했다. 현장을 뛰어다니는 PD의 노고는 말할 것도 없고, 작가 역시 한 주 방송분을 제작하면서 다음 주 아이템까지 동시에 챙겨야 했다. 말 그대로 강행군. 기획과 구성, 편집과 대본 작업까지 마치면 다음 주 방송이 코앞에 닥쳐온다. 그러다 보니 8~9회 정도 연속으로 방영이 될 즈음엔, 제작진 입에서 먼저 '어디 한 번쯤 결방되는 일 없을까' 푸념 아닌 푸념을 주고받기도 했다.

얼마 후 PD 인력은 3주, 4주 간격으로 충원되고, 작가도 2주에 50분 한 편씩을 담당하게 됐지만, 아는 사람은 다 안다. 사건의 원인을 심층 분석하고 그 대안을 제시하는 탐사보도 프로그램을 그 일정에 맞춰 제작한다는 것이 얼마나 강한 노동 강도를 필요로 하는지.

내게 <피디수첩> '종신작가'로 일해보자는 제안이 온다면 분명 손을 휘저을 것이다. 떠날 때 몸 성하게 잘 추스르고 나오면 다행이라며 후배들에게도 충고도 했으니... 그럼에도 꼬박 6년을, 매번 새로운 <피디수첩>을 만들어내는 데 기꺼이 동참했던 까닭은, 내가 사는 세상을 보다 밝게 만드는데 기여했다는 자부심, 그것 하나 때문이었다. 22년을 이어오면서 <PD수첩>을 거쳐 간 수많은 PD와 작가들의 심정도 그와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프로그램에서 PD와 작가는 제작과정 전반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동반자 관계다. PD가 지휘해야 할 부분이 있고, 작가들이 더 세세하게 챙겨야 할 부분들이 있다. 이 두 부분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려야 프로그램은 제대로 된 모양새를 갖춘다. 경험이 쌓여 숙련되면 될수록 좋을 것이다.

그런데, PD들은 지금 그 자리를 잃었다. 프로그램의 한 축을 떠받치고 있던 작가들마저 일시에 모두 해고되고 말았다. 절차와 명분의 부당함에 대해 벌어질 논란을 예상 못 했을 리 없다. 그런데도 작가들을 전원 방출해버린다는 것은 <피디수첩>이 아예 빈 공간으로 남아있어 주기를 바라는 나름의 셈법이라고 할 수밖에.

멈춰서 있는 <피디수첩>, 해답은 프로그램 '정신'에 있다

 <피디수첩> PD와 작가들은 더 이상 이 프로그램이 기능하지 않는 시대가 오길 바란다. 하지만 현재 <피디수첩>은 7개월째 멈춰서 있다.
 <피디수첩> PD와 작가들은 더 이상 이 프로그램이 기능하지 않는 시대가 오길 바란다. 하지만 현재 <피디수첩>은 7개월째 멈춰서 있다.
ⓒ MBC 누리집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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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디수첩>을 거쳐 온 PD와 작가들 역시 진심으로 바랄 것이다. <피디수첩>이 기능하지 않는 때가 하루속히 찾아오기를. 물론 지쳐서, 포기해서가 아니다. 더 이상 파헤칠 어두운 구석이 없어, <피디수첩>이 존재 이유를 잃어버린 세상이 오기를 진심으로 원하기 때문이다. 그런 세상이 아직은 요원해 보이는데 <피디수첩>은 7개월째 여전히 멈춰서 있다.

평행선을 달리듯 끝이 보이지 않는 싸움. 하지만 그 해답은 프로그램이 이미 말하고 있다.

'1990년 5월 8일 첫 방송 된 <피디수첩>은 20여 년간 진실과 정의, 상식과 민주주의를 위해 우리 사회 구석구석을 누벼왔습니다. 앞으로도 우리 시대의 정직한 목격자로 시청자 여러분을 찾아가겠습니다.'

프로그램 누리집에는 이 프로그램이 자랑하는 이 문구가 지금도 선명하다. 부디 그 약속이 지켜지길 기대해본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를 쓴 송미현 작가는 <피디수첩>이 시작한 다음 해인 1991년부터 1997년까지 6년간 <피디수첩>에 몸담았습니다. 그 외 대표 프로그램으로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연속기획 10부작 '미국'> 등이 있습니다. 이 글은 미디어오늘에도 중복게재되었습니다.



태그:#PD수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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