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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의원이 1969년 효창공원에서 박정희의 3선개헌을 규탄하는 연설을 하고 있다. 연설 제목은 '3선개헌은 국체의 변형이다'였다.
▲ 효창공원 연설(1969년) 김대중 의원이 1969년 효창공원에서 박정희의 3선개헌을 규탄하는 연설을 하고 있다. 연설 제목은 '3선개헌은 국체의 변형이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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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자 박정희가 되살아나고 있다. 그의 딸 박근혜가 아버지 박정희를 불러냈다. "5·16은 불가피한 최선의 선택"이라는 평가와 함께 박정희의 부활은 시작됐다. 그는 박정희의 딸에 그치지 않고 박정희의 후계자임을 천명했다.

같은 군인 출신으로 박정희의 후계자들인 전두환, 노태우도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박정희와 5·16을 평가하여 논란을 일으키지는 않았다. 그러나 딸은 달랐다.

이 논쟁 이후 새누리당은 박정희의 행적과 치적에 대한 비판이 가해지면 방어하기에 급급하다. 보수언론들은 박정희 미화까지는 주저하면서도 특유의 양비론으로 그 논란을 희석시키고 있다. 그들에게는 박정희, 5·16은 '불편한 진실'이다.

김대중은 박정희의 최대 정적이었다. 8월 18일로 김대중 서거 3주기를 맞은 지금, 박정희의 부활을 보는 마음은 착잡하기만 하다. 김대중은 박정희에 의해 납치 살해위협, 망명, 감옥생활, 연금을 강요당했다. 박정희는 무덤에서 살아나오고, 40년 민주화 역사는 무덤에 묻히는, 이 기가 막힌 현실에 현충원에 누워 있는 김대중은 어떤 심정일까.

김대중은 1971년 7대 대통령 선거에 신민당 후보로 출마해 공화당 박정희 후보와 싸웠다.
▲ 1971년 대선 포스터 김대중은 1971년 7대 대통령 선거에 신민당 후보로 출마해 공화당 박정희 후보와 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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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가 대통령이 되는 순간, 역사 교과서는 다시 쓰여질 것이다. 군사 쿠데타 5·16은 '구국의 결단', '불가피한 최선의 선택'으로 수정돼야 한다는 논의가 시작될 것이다. 박정희에 의한, 박정희를 위한, 박정희의 역사. 상상하기 싫은 일들이 현실에서 나타날 것이다. 광화문 이순신 장군, 세종대왕 동상 곁에 '박정희 장군'의 동상을 세우자는 논의가 나올지도 모르겠다.

'대통령 박근혜' 치하에서 그의 아버지 박정희를 폄훼하는 역사와 기록들은 감춰져야 하고, 이런 글을 쓴 수많은 사람들은 숨죽여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박근혜 정권은 박정희 정권을 부정하는 순간, 그 존재 의미를 잃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박근혜 정권은 결국 국가적, 정부적 차원에서 박정희 복권 부활운동을 전개해야 할 운명에 처하게 될 것이다. 10·26 박정희의 시해일에 지금처럼 박근혜는 사인(私人) 딸로서 현충원을 참배하는 것이 아니라, 공인(公人) 대통령으로서 국무위원들을 거느리고 참배할 게 분명하다.

'김대중 vs 박정희', 41년 만의 리턴매치

김대중은 1973년 8월 박정희 중앙정보부에 의해 일본 동경에서 납치되어 토막살해, 수장의 위기를 넘기고 5일만에 동교동 자택으로 생환했다. 납치에서 풀려난 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절박했던 순간들을 떠올리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 김대중의 생환 김대중은 1973년 8월 박정희 중앙정보부에 의해 일본 동경에서 납치되어 토막살해, 수장의 위기를 넘기고 5일만에 동교동 자택으로 생환했다. 납치에서 풀려난 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절박했던 순간들을 떠올리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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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12월 대선은 '김대중 vs 박정희'의 대결이 되었다. 1971년 대선에 이은 41년 만의 리턴매치다. <한겨레>에 실린 "김대중 vs 박정희"라는 제목의 칼럼은 상황을 에둘러 표현하지 않고 정확히 바라본 글이다.

오는 12월에 치를 제18대 대통령선거는, 김대중과 박정희가 맞붙었던 1971년 제7대 대선의 리턴매치다. (줄임) 이번 선거에서 리버럴진영의 대표로 누가 나서든, 그는 김대중의 아바타일 수밖에 없다. 그 상대가 박정희의 아바타이기 때문이다.(<한겨레> 2012. 8. 13. <고종석 칼럼> "김대중 vs 박정희")

우리가 박근혜를 문제 삼는 까닭은 그가 독재자 박정희의 딸이라는 생물학적 이유에서만이 아니다. 그가 독재자 박정희의 정책, 이념, 철학을 고스란히 이어받고 이를 다시 복원시키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민주주의를 부정하고 쿠데타를 일으킨 독재자의 유전자를 고스란히 이어받고 있기 때문이다. '박근혜는 박정희의 아바타다.' 5·16 평가발언에서 보듯이 그 또한 그 속내를 숨기지 않고 당당히 말하고 있다.

1976년 3월 1일 명동성당에서 3.1민주구국선언을 발표하고 촛불시위를 하고 있다. 이 사건으로 구속된 김대중은 2년 10개월 동안 감옥에 갇힌다.
▲ 김대중의 촛불시위 1976년 3월 1일 명동성당에서 3.1민주구국선언을 발표하고 촛불시위를 하고 있다. 이 사건으로 구속된 김대중은 2년 10개월 동안 감옥에 갇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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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년 전 7대 대선의 요점은 이러했다. 박정희는 경제발전을 위해 민주주의를 유보하려 했고, 김대중은 경제발전과 민주주의는 양립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박정희는 특권경제, 재벌경제를 지향했고, 김대중은 '대중경제'를 주장했다. 박정희는 반공, 멸공통일을 주장했고, 김대중은 남북교류와 평화통일을 주장했다.

5·16쿠데타도, 3선개헌도, 그리고 1972년 '10월 유신'도 모두 박정희는 상황논리를 들어 자신의 헌정파괴행위를 합리화했다. 그에게 4·19혁명 이후 민주화 과정의 진통은 사회혼란이었다. '북괴 위협'을 헌정중단, 헌정파괴의 명분으로 삼았다.

1971년 대선 이후 그의 야심은 여실히 드러났다. 박정희는 그 다음해 '10월 유신'을 통해 '대한민국 총통'이 되어 영구집권에 나섰다. '다시는 국민의 손으로 대통령을 뽑을 수 없는 시대가 올 것'이라는 김대중의 예언은 적중했다. 5·16, '10월 유신'은 '불가피한 선택'이 아니었다. 5·16은 집권을 위한 '군사 쿠데타', 10월 유신은 영구집권을 위한 '친위 쿠데타'에 불과했다.

'헌정수호' 세력과 '헌정파괴' 세력의 맞대결

김대중 대통령은 2009년 8월 18일 서거했다. 입관식에서 비서진들이 마지막 보고를 하고 있다.
▲ 김대중 대통령 서거 김대중 대통령은 2009년 8월 18일 서거했다. 입관식에서 비서진들이 마지막 보고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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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김대중은 민주주의와 인권, 평화를 시종일관 주장했다. 민주주의는 어떤 경우에도 유보되어서는 안 되며, '부익부 빈익분'을 낳는 특권경제가 아닌 대중이 주체가 되는 '대중경제론'을 주장했다. 당시 남북교류와 평화통일론은 시대의 족쇄를 끊어내버리려는 김대중의 혜안이었고, 용기였다. 김대중의 이런 가치는 지금도 그 실현 도상에 있으며, 이 점에서 김대중의 주장은 비전이었고, 미래가치였다. 민주주의, 인권, 평화, 복지 등 김대중은 인류 보편가치에 서 있었다.

그러나 민주주의, 대중경제, 평화통일이라는 김대중의 가치가 현실에서 받아들여지기까지는 많은 세월이 필요했다. 김대중은 1979년 박정희의 죽음으로 그의 사슬에서 벗어나는 듯했다. 그러나 그의 충실한 또 다른 군인 후계자 전두환에 의해 사형선고를 받아야 했다. 김대중이 목숨을 걸고 지켜내려던 가치는 1987년 6월 민주항쟁으로 씨앗이 뿌려져, 1997년 12월 '최초의 평화적인 정권교체'로 그 실현의 길을 찾게 된다.

박근혜와 새누리당은 자신의 정체성을 감추기 위해 여러 가지 색깔로 덧칠하고, 여러 겹으로 포장을 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처럼 박정희와의 단절이 없는 한, 즉 박정희와 전두환을 독재우파세력으로 입장을 분명히 하지 않는 한, 보수우파 정치세력으로서 존재도 부정당하게 될 것이다.
한겨레 신문 2012.8.13일자 신문. 이 칼럼은 "12월 대선은 김대중과 박정희의 리턴매치이며, 공화파와 왕당파의 대결"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 고종석 칼럼 "김대중 vs 박정희" 한겨레 신문 2012.8.13일자 신문. 이 칼럼은 "12월 대선은 김대중과 박정희의 리턴매치이며, 공화파와 왕당파의 대결"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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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를 찬양하는 우파는 진짜 우파가 아니다. 파시즘이나 나치즘을 찬양하는 우파와 대화하고 경쟁할 수 없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박근혜 후보와 새누리당이 5·16 쿠데타와 박정희에 대해 평가하는 것을 볼 때, 박근혜 주변에 들어선 박정희-전두환 시절의 인물군을 볼 때 그 단절은 기대하기 힘들 것 같다.   

이런 점에서 앞에서 인용한 <한겨레> 칼럼은 또 한번 정곡을 찔렀다.

이번 선거의 본질은 공화파와 왕당파의 대결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헌정수호세력과 헌정파괴세력의 대결이다. (줄임) 12월 대선에서 수치스러운 왕정복고가 이뤄지지 않도록, 헌정파괴세력이 집권하는 일이 없도록, 외치고 또 외치자. 헌-정-수-호!

민주주의를 위해 평생을 위해 '행동하는 양심'으로 살다가 저세상으로 간 김대중. 박정희의 부활은 김대중의 눈물이다. 정적으로서 한이 아니라, 자랑스런 민주주의 역사를 가진 대한민국의 수치이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 필자 최경환은 김대중 대통령을 보좌한 마지막 비서관이었으며, 지금은 김대중평화센터 공보실장 겸 대변인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태그:#김대중, #박정희, #박근혜, #최경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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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대통령을 보좌한 마지막 비서관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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