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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염에도 불구하고 거리로 나와 콘서트를 즐기는 시민들.
 폭염에도 불구하고 거리로 나와 콘서트를 즐기는 시민들.
ⓒ 한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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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동부 버지니아 주 해리슨버그. 지난주 이곳 날씨는 낮 최고 기온이 연일 세 자릿 수(100°F=38°C)를 기록하는 폭염이 기승을 부렸다. 미국 내 다른 동부와 중서부 지역도 최고 40°C를 오르내리는 살인적인 폭염으로 일부 지역에서는 사망자가 발생하기도 했다. TV에는 폭염 경고 사인이 자막으로 떴고, 인근 노약자들의 건강을 잘 챙기라는 안내방송도 반복해서 나왔다.

이런 폭염 가운데 이곳 해리슨버그에서는 여름 연례행사인 '광장의 금요일 (Fridays on the Square)' 축제가 열렸다. 한여름밤 축제로 벌어지는 이 행사는 음악과 영화가 어우러진 문화 향연이다. 올해로 벌써 22번째를 맞이하는 이 축제는 6월 8일부터 8월 24일까지 3달 동안 매주 금요일, 음악 공연과 영화 상영이 교대로 이루어진다. 

해리슨버그는 강원도 철원 정도의 인구(약 5만)를 가진 작은 도시다. 하지만 지난 22년 동안 여름마다 시민을 위해 문화 청량제를 제공해왔다. 상당히 감동적이다. 어떻게 가능했을까. 우선 폭염에 지친 해리슨버그 시민이 어떻게 한여름밤 축제를 즐기고 있는지 현장으로 가 보자.

한여름밤 축제 '광장의 금요일'... 음악과 영화가 어우러진 문화 향연 

여름마다 음악과 영화의 한마당 축제가 벌어진다. 올해가 벌써 22번째.
 여름마다 음악과 영화의 한마당 축제가 벌어진다. 올해가 벌써 22번째.
ⓒ fridaysonthesqua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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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식사나 테이크아웃을 준비하셔서 광장으로 피크닉 나오세요"

한여름밤의 축제를 알리는 포스터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 있다. 6시에 시작되는 금요 광장 축제에 야외 도시락을 싸 가지고 와서 준비된 향연을 즐기라는 것이다. 바닥에 깔 자리와 접이용 의자를 챙겨 온 가족 단위 피크닉족은 준비해 온 저녁을 펼치고 '풀밭 위 식사'를 즐긴다. 야외 피크닉을 즐기고 있는 이들 앞에 기타와 베이스, 키보드, 드럼, 하모니카, 콩가 등이 어우러진 블루스 밴드의 화음이 입맛을 돋워준다.

열정적으로 노래하는 가수의 목소리가 음유시인 밥 딜란과 닮았다. 뒤에서 연주하는 이들의 주름진 얼굴에서도 관록이 느껴진다. 생음악을 들으며, 한여름밤을 즐기는 사람들의 표정도 넉넉해 보인다.

관록을 자랑하는 블루스 밴드 'Fatty Lumpkin & the Love Hogs'.
 관록을 자랑하는 블루스 밴드 'Fatty Lumpkin & the Love Hogs'.
ⓒ 한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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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이 벌어진 곳은 서울시청 앞 잔디광장처럼, 오래된 다운타운의 법원 잔디광장이다. 법을 집행하는 건물답게 건물 맨 꼭대기 탑에는 정의의 여신 '테미스'의 우아한 자태가 보인다. 한 손에 천칭을, 다른 손에 칼을 쥔 여신 '테미스'도 20년 넘게 광장 음악에 귀를 기울여 왔을 것이다.

한여름밤의 축제가 벌어진 곳은 법원 잔디마당. 석조건물인 법원 꼭대기에 정의의 여신 테미스가 서 있다.
 한여름밤의 축제가 벌어진 곳은 법원 잔디마당. 석조건물인 법원 꼭대기에 정의의 여신 테미스가 서 있다.
ⓒ 한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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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밤의 축제를 즐기는 연령층은 다양하다. 부모를 따라온 어린 아이부터 청소년, 청년, 중년, 나이 지긋한 노년까지 보인다. 그야말로 남녀노소 구별이 없다. 백인 청중이 대부분이지만, 이따금 흑인과 히스패닉도 보인다. 아시안은 우리 가족이 전부인 듯하다. 다들 어디로 갔을까.  

이들은 큰 나무 그늘에 앉거나 잔디밭 또는 법원 계단 쪽에 앉아 음악을 즐긴다. 만국 공통어인 음악 앞에 모두가 흥에 겨워 박수를 치기도 하고, 춤을 추기도 한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아이들은 어색한 첫 만남을 뒤로하고 끼리끼리 손에 손을 맞잡고 '강강술래'를 돈다. 천진한 모습이 귀엽기만 하다.

천진한 어린이들의 강강수월래.
 천진한 어린이들의 강강수월래.
ⓒ 한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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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이 나는 건 아이들뿐이 아니다. 20대 아가씨도 30대·40대·50대 아주머니도 용기 있게 앞으로 나가 신나게 팔을 흔들고 엉덩이를 흔들면서 춤을 춘다. 재미있는 것은 춤추는 무리 가운데 남자는 한 사람도 보이지 않는다. 수줍은 남자들? 

눈에 띈 인상적인 춤꾼은 연두색 티셔츠를 입은 40대 아주머니. 현란한 춤솜씨를 선보여 좌중을 사로잡았다. 또한, 한쪽 팔이 없는 흰색 블라우스를 입은 키 큰 아주머니도 곁에 멀뚱멀뚱하게 서 있던 남성과 파트너가 되어 춤을 추면서 열정을 불태웠다.  

음악에 맞춰 흥겹게 춤추는 어른들. 앗싸~
 음악에 맞춰 흥겹게 춤추는 어른들. 앗싸~
ⓒ 한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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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밤 축제에 나온 건 사람뿐만이 아니다. 사람의 친구이자 가족이기도 한 견공들도 무더위를 피해 주인과 함께 콘서트장에 나왔다. 이들도 공연 도중 여느 연인들처럼 다정하게 스킨십을 주고받으면서 콘서트를 즐겼다. 

주인과 다정한 스킨십을 나누고 있는 개.
 주인과 다정한 스킨십을 나누고 있는 개.
ⓒ 한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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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염이 기승을 부리는 날, 시원한 옷차림은 필수! 엄마를 따라 온 예쁜 두 딸이 등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과감한 드레스를 입었다. 세 모녀의 시원한 차림새만 봐도 절로 시원해진다.   
폭염이 기승부리는 날, 시원한 옷차림은 필수!

세 모녀의 시원한 옷차림이 눈길을 끈다.
 세 모녀의 시원한 옷차림이 눈길을 끈다.
ⓒ 한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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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블루스 밴드에 맞춰 춤을 추는 사람도 있고 박수 치는 사람도 많지만, 공연 도중 한눈을 파는 아저씨도 카메라에 잡혔다. 키 큰 나무에 기대어 연신 아이패드와 대화를 하는 아저씨는 참 바빠 보인다. 고개 들어 공연 보랴, 다시 고개 숙여 아이패드 터치하랴. 바쁘다 바빠. 아저씨 귀에 대고 이렇게 외쳐주고 싶다.

"아저씨, 오늘만큼은 제발 그놈의 테크놀로지를 멀리하면 안 될까요? 손을 좀 떼시지요."

콘서트 관람하랴, 아이패드 보랴, 아저씨는 바쁘다.
 콘서트 관람하랴, 아이패드 보랴, 아저씨는 바쁘다.
ⓒ 한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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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콘서트에 집중하고 있는데 잔디광장 옆으로 잘 생긴 말 두 마리가 모습을 드러낸다. 말이 이끄는 흰 마차 속에는 관광객처럼 보이는 이가 느긋하게 주변을 둘러보고 있다.

두 마리 말이 끄는 하얀 마차도 광장 옆을 지나갔다.
 두 마리 말이 끄는 하얀 마차도 광장 옆을 지나갔다.
ⓒ 한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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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이 벌어지고 있는 잔디 광장을 벗어나 법원 뒤쪽으로 향했을 때 벌어진 나무 틈 사이에 스마트폰이 놓여있는 걸 발견했다.

'어라, 저게 뭐지? 저 비싼 폰이 왜 저기에?'

누가 놓고 갔나 싶어 주위를 둘러보니, 저만큼 떨어진 곳에 소녀 둘이 보인다. 아하, 너희가 바로 아이폰 임자로구나. 

스마트폰도 시원한 나무 그늘을 찾아서
 스마트폰도 시원한 나무 그늘을 찾아서
ⓒ 한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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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잔디광장에서 공연을 관람하고 있는데 두 소녀는 공연과 상관없이 자기들만의 시간을 즐겁게 보내고 있다. 누가 보거나 말거나 개의치 않고 길에서 묘기를 부리는 소녀들. 학교 치어리더들?

방학을 맞아 한가하게 거리에서 놀고 있는 소녀를 보고 있노라니 희멀건 모습으로 형광등 불빛 아래서 '열공'하고 있을 우리나라 청소년들이 떠올랐다. 어렸을 때는 저렇게 마냥 뛰어놀아야 하는데….

곡예를 부리는 소녀가 바로 스마트폰 임자.
 곡예를 부리는 소녀가 바로 스마트폰 임자.
ⓒ 한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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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저나 인구 5만 정도의 작은 도시에서 세 달 동안이나 계속되는 한여름밤 축제 행사가 어떻게 22년 동안이나 가능했을까. 폭염에 지친 시민에게 한줄기 소나기 같은 청량제 문화를 제공할 수 있었던 데는 지역 스폰서들의 도움이 컸다. 스폰서들은 유명 대기업이 아닌 지역의 상권을 담당하는 소규모 가게들이다. 이들은 '십시일반'으로 금요일 문화행사의 스폰서를 맡았다.

대학 도시인만큼 이 지역의 두 대학도 스폰서를 맡았고, 레스토랑과 아이스크림 가게, 가전제품 스토어. 또한 시민운동을 하는 '점령하라'(Occupy Harrisonburg)도 스폰서 가운데 하나로 이름을 올렸다.

문화 축제는 대도시에서만 가능한 게 아니다. 또한, 책정된 정부 예산이 있어야만 가능한 게 아니다. 문화를 사랑하는 마음만 있다면, 의지만 있다면, 무더위에 지친 지역 주민에게 신나는 문화 한마당을 제공할 수 있다. 지난 22년 동안 해리슨버그 시가 해왔던 것처럼 말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금요일 한여름밤의 축제를 만들면 어떨까. 찜질 더위로 온 가족이 고생하고 있을 때 집을 벗어나 음악 공연도 즐기고 영화 감상도 할 수 있는 그런 문화 금요일 말이다. 식구들이 모처럼 오순도순 앉아 얘기를 나누며 저녁도 함께 먹으면서 넉넉한 금요일밤을 보낼 수 있다면 한여름 불쾌지수도 내려가지 않을까.

모든 행사는 공짜! 스폰서를 제공한 분들께 많은 감사를.
 모든 행사는 공짜! 스폰서를 제공한 분들께 많은 감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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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한여름밤의 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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