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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강정마을 주민들과 문화예술인들이 7일 '강정마을 4.3해원상생굿'을 벌인 후 거리행렬에 나서고 있다
▲ 강정마을 해원상생굿 제주도 강정마을 주민들과 문화예술인들이 7일 '강정마을 4.3해원상생굿'을 벌인 후 거리행렬에 나서고 있다
ⓒ 양김진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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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인가 보이지 않는 장막으로 먹구름 드리우는 자는/
누구인가 우리 눈을 암흑의 안대로 가리는 자는/
누구인가 바다와 하늘과 사람을 가로막는 자는/누구인가

보이네 강정바다가 보이네/
강정바다 너럭바위 구럼비가 보이네/
구럼비 너머 강정천이 보이네/
강정천 흘러 물 맞은 범섬이 보이네/
마을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보이네...' -김경훈 '강정마을에서' 중-

해방 직후 섬땅 제주도민들에게 씻지 못할 상처를 남긴 제주4.3사건. 그리고 반세기를 훨씬 넘긴 오늘 제2의 4.3 처럼 해군기지 건설사업으로 느닷없이 찾아온 서귀포시 강정마을.

5년 넘게 해군기지와 사투를 벌여온 강정마을과 4.3이 비로소 만났다.
강정마을 일대에서 마을 주민과 예인들이 한 데 어우러진 '4.3해원상생굿'과 '위령 거리굿'이 열린 것.

(사)민족예술인총엽합 제주도지회(지회장 박경훈.이하 제주민예총)가 7일 마련한 현장으로 찾아가는 4.3해원상생굿의 열번째 터는 해군기지 건설로 정부와 첨예한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강정이었다.

제단에는 4.3 당시 희생당한 105명의 신원들이 걸려 있다.
▲ 강정마을 의례회관 앞 마당에서 열린 해원상생굿 제단에는 4.3 당시 희생당한 105명의 신원들이 걸려 있다.
ⓒ 양김진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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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원상생굿은 (사)제주민예총이 지난 2002년부터 4.3학살의 원이 서린 곳을 찾아 '예기(藝氣)'로서 풀어내는 한바탕의 굿판형식의 문화예술판극. 4.3의 상흔이 서려있는 구좌읍 다랑쉬굴을 시작으로 10곳의 현장을 찾아 위무해왔다.

한마디로 무참하게 삶이 짓이겨진 '학살의 터'를 찾아 인간의 영혼뿐만 아니라 상처받은 장소, 즉 죽임의 장소였던 자연까지도 함께 치유하자는 상생의 굿이자 생명의 굿이다.
나아가 관주도의 공식적인 기념의례에서 벗어나 현재의 문화예술과 전통적 연희인 굿을 버무려 죽은자와 죽은 땅에 보시하는 본풀이이자 땅풀이의 의미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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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민족예술인총엽합 제주도지회장 박경훈 .
ⓒ 양김진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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맺힌 죽음과 맺힌 땅을 풀어주는 '풀어줌의 미학'인 것이다. 해원상생굿은 "인간과 자연이 동시에 치유되어야 할 대상임을 일깨우는 일이자, 죽음의 터전에서 기억하기 싫은 몸서리치는 죽은 땅을 살리는 제의라고 볼 수 있다"고 4.3해원상생굿 기획단측은 덧붙였다.

이날 강정마을 의례회관 앞마당을 비롯한 현장에는 열두 돌까마귀 솟대, 4·3해원거욱대, 만장, 영개제웅 등 설치 미술을 통해 죽은 넋을 달래는 갖가지 조형물이 세워졌다. 주요학살터엔 소리없이 사라진 4.3원혼들의 넋을 달래는 설치미술과 사진, 풍물패 신나락과 놀이패 한라산의 거리굿이 신명나게 치러졌다.

유족들과 마을 주민들이 삼삼오오 의례회관으로 모여들자 민요패 소리왓의 노래 보시로 굿판을 열었고, 시(詩)보시(布施), 춤보시, 굿보시가 이어져 막혔던 4.3원혼들의 넋을 달래고 강정마을의 평화를 기원했다.

박경훈 제주민예총 지회장은 "강정마을은 제주에서 가장 평화롭게 살던 마을인데 그 마을이 5년 만에 가장 살기 힘든 곳이 됐다. 4.3 당시 강정마을에서 희생당한 분이 105명으로 학살의 광풍이 비켜가지 않은 곳이다. 아직도 구천에서 떠도는 4.3 영령들과 유족을 위로하고 오늘 해군기지로 고통받고 있는 주민들의 마음고생을 풀어내는 자리"라고 이번 행사의 의미를 부여했다.

마을 곳곳을 돌며 사악한 액을 쫓고 있다.
▲ 4.3 거리굿 마을 곳곳을 돌며 사악한 액을 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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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순실 큰심방을 비롯한 몇몇 심방들이 악한 기운을 물리치는 액막이굿을 단체로 하고 있다.
▲ 4.3해원상생굿 서순실 큰심방을 비롯한 몇몇 심방들이 악한 기운을 물리치는 액막이굿을 단체로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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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년 전에 불어닥친 4.3의 광풍

실제 64년 전 강정마을에서도 많은 주민들이 무참하게 목숨을 잃었다. 큰당밧, 왕대왓, 메모루 동산 등 세 곳에서 100여명이 넘는 주민들이 죽임을 당했다.

바다와 인접한 마을임에도 불구하고 이토록 많은 이들이 학살당한 것은 해군기지가 몇몇 마을 유지와 전직 도지사의 꼼수로 발단이 된 것 처럼 당시에도 한 주민의 개인감정과 모략 때문이라고 마을 주민들은 증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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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정마을 4.3유족회장 조용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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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디깊은 바윗돌 잘도 견뎌왔구나/갯메꽃, 뫼메꽃 살가운 것들 껴안고/잘도 견뎌왔구나/억세게 땅을 움켜쥔 채 늙은 뿌리는/늙은 노래를 부르며 삶을 견뎌왔으니/우린 놀랍게도 무르고 헐은 상처도 싸매며/메꽃, 달개비꽃 보드라움을 노래해 왔구나"
-허영선 '뿌리의 노래' 중-

400여년 설촌유래를 가진 강정은 일제시대부터 1905년 초까지 1구와 2구로 나뉘어 현재의 용흥동을 아우르는 마을이었다. 그러나 4.3의 광풍이 제주전역을 휩쓸 즈음 숱한 주민들이 학살되고 무장대의 습격을 막는다는 이유로 축성을 쌓으면서 350여 호가 사는 비교적 작은 마을로 변모해 지금의 마을 모습을 띠게 되었다.

마을 곳곳에 4.3의 상흔이 서려 있는 마을 강정. 그 마을에 반세기가 훨씬 지난 지금 다시 4.3의 광풍을 떠올리게 만드는 해군기지 건설로 마을 주민들의 삶은 사실상 황폐화 되다시피 할 정도로 몸과 마음이 무너져가는 상태다.

"오손도손 살던 마을이었는데 너무 안타깝다"는 조용훈 강정마을 4.3유족회장은 "마을에서 4.3위령제를 지낸 것은 처음 있는 일"이라며 "그동안 4.3원혼들이 응어리진 마음이 막혀 있어 흉사가 많았던 게 아닌가 싶다. 오늘 4.3원혼들의 마음을 달래준 것을 계기로 주민들간에 화합과 단합이 잘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해군기지 문제로 강정 마을이 전 세계에 널리 알려진 것 같다. 제주예술인이 모처럼 마련해준 해원상생굿으로 이때까지 다하지 못했던 한이 한꺼번에 풀어졌으면 한다"고 이어 마음을 보탰다.

제2의 4.3 해군기지...재판 200여 명에 벌금만 2억원 넘어

평화롭던 강정마을에 여지없이 불어닥친 4.3처럼 해군기지 역시 대다수 주민 의지와는 상관없이 정부와 행정의 공권력에 의해 느닷없이 찾아온 불청객이었다.

그리고 해군기지 건설을 위한 절차의 정당성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한채 정부의 밀어붙이기식 군사기지 추진은 결국 숱한 생채기를 남겼다. 정부와 해군의 강압적이고 강제적인 방식은 결국 해녀와 주민들의 어업권을 빼앗고 생업공간인 바다를 한도끝도 없이 내어주는 상황으로 치닫고 있는 형국이다.

한동한 구럼비를 든든하게 지켜왔던 해군기지 반대 깃발은 이제 구럼비에선 찾아볼 수 없다
▲ 강정 구럼비 바위 한동한 구럼비를 든든하게 지켜왔던 해군기지 반대 깃발은 이제 구럼비에선 찾아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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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각지의 경찰들이 마을 곳곳에 진을 치고 있는 것도 당시 서북청년단과 육지부 경찰이 들어와 무자비한 진압과 토벌을 일삼았던 4.3의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현재 200여 명 이상의 주민과 시민운동가들이 '법 준수'란 이름아래 '재판'에 걸려 있으며 벌금만 2억원이 넘는다. 해군기지 공사진행을 위해 조금이라도 저촉되는 행위는 모두 '불법'이란 미명 아래 공권력에 무차별 휘둘리고 있는 상황이다.

3대가 살아왔다는 한 강정주민은 "지금도 시도때도없이 울려대는 사이렌 소리를 들을때마다 머리가 쭈뼛해지곤 해서 우리 부모들의 심정이 이랬을까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며 "나라가 하면 무조건 옳고 힘없는 백성이 하면 무조건 불법이라는 현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다"고 말했다. 그는 "주민들의 입장을 조금이라도 헤아린다면 이렇게 무조건식의 공사강행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통탄해 했다.

"한번도 해군기지 싸움을 진다고 생각해본적이 없어요"
▲ 강정마을 회장 강동균 "한번도 해군기지 싸움을 진다고 생각해본적이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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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은 물론 세계 각지에서 강정마을 주민들을 응원하기 위해 끊임없이 오가는 사람들이 발길이 더해지면서 정신없이 하루 일과가 돌아가는 강정은 현재 소리없는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하루가 멀다하고 매일 집회가 열리고 경찰과 몸싸움을 하다보니 하루에 수차례 충돌이 빚어지는 곳. 강정 주민들도 점점 지쳐가는 듯 보였지만 해군기지를 받아들 일 수 없다는 결연한 의지는 확고해 보였다.

여기에 간간히 터져 나오는 시민단체들의 구호와 노래말 역시 결코 공권력에 물러설 수 없다는 강정천의 맑은 기운을 북돋고 있었다.

그렇게 그 둘은 닮아 있었다.
해군기지와 4.3이 비로소 '해원상생굿'이란 이름으로 만나게 된 것도 어쩌면 역사적 필연인 셈이다.

"5년여 동안 해군기지 반대 싸움을 해오면서 진다는 생각은 한번도 해본적이 없다"는 강동균 강정마을회장의 마음도 어느때와 다름없이 강건했다.

"오늘 막힌 곳을 잘 뚫어주었으니 앞으로 해군기지 문제도 잘 풀리지 않겠느냐"는 그는 "전국을 넘어 전 세계적인 주목을 받고 있는 강정마을은 반드시 평화와 인권의 진원지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해군기지 반대의 상징물이 된 구럼비 바위에 대해서도 "구럼비 바위는 쉽지 않은 바위다. 삼성과 대림 등 공사 업체가 속도를 내려해도 더디게 갈 수 밖에 없는 곳이 바로 구럼비"라며 "현재 구럼비 바위의 파괴는 조금밖에 진행되지 않은 상태로 4.3원혼들이 잘 보살피고 지켜주실 것"이라는 바람을 전했다.

4.3과 강정 평화의 바람...세계 곳곳에 널리 퍼졌으면

방사탑은 예부터 사악한 기운이 비치는 방위에 탑을 세워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조성물이었다.
▲ 4.3해원 및 강정평화 방사탑(거욱대) 방사탑은 예부터 사악한 기운이 비치는 방위에 탑을 세워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조성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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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부터 이어진 해원상생굿은 강정포구에 있는 '4.3해원 강정평화 방사탑'에서 소지를 사르고 평화기원제를 올리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모든 참가객들은 절을 올리며 제주4.3의 역사적 교훈과 강정 평화의 바람이 세계 곳곳에 널리 퍼져 나가기를 기원하고 또 기원했다.

제주민예총 박경훈 지회장의 갈무리 말이다.

"이번 강정마을 해원상생굿은 64년전 억울하게 돌아가신 4.3영령들의 넋을 달래고 해원시키는 의미있는 굿이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막힘을 풀어주었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아울러 제2의 4.3인 강정해군기지 투쟁에 있어서 오늘의 상생굿이 나쁜 기운을 털어내고 앞으로 강정발전에 밀알이 되었으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4.3 당시 제주도민이라는 이름 하나로 예외없이 너나 없이 억울한 죽음을 당했던 제주땅. 그리고 강정.

이 곳에서 제주4.3 원혼들의 억울한 넋을 달래면 마을 일이 잘 풀릴까? 서로가 다치지 않고 평화롭게 마을을 지켜낼 수 있을까? 간절한 염원을 영혼들이 들어줄까? 그리고 과연 해군기지를 막아낼 수 있을까?

4.3의 광풍때도 그랬던 것 처럼, 강정마을회관에서 강정포구에 설치된 방사탑까지 만장을 앞세워 이어진 주민들의 꼬리행렬을 한라산은 말없이 내려다 보고 있었다.

어쩌면 이곳에서 뛰놀던 아이들에게 되물림 될 해군기지 현장. 조형물 뒤로 범섬이 보이고 있다
▲ 구럼비 바위 어쩌면 이곳에서 뛰놀던 아이들에게 되물림 될 해군기지 현장. 조형물 뒤로 범섬이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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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발치서 한라산이 말없이 지켜보고 있다.
▲ 거리행렬 모습 먼발치서 한라산이 말없이 지켜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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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강정, #해군기지, #4.3, #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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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 대자(大者)는 그의 어린마음을 잃지않는 者이다' 프리랜서를 꿈꾸며 12년 동안 걸었던 언론노동자의 길. 앞으로도 변치않을 꿈, 자유로운 영혼...불혹 즈음 제2인생을 위한 방점을 찍고 제주땅에서 느릿~느릿~~. 하지만 뚜벅뚜벅 걸어가는 세 아이의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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