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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검푸른 하늘인지 바다인지를 나는, 혹은 떨어져내리는 나비같은 꽃잎들은 누구의 영혼일까?
▲ <하해여관> 표지 저 검푸른 하늘인지 바다인지를 나는, 혹은 떨어져내리는 나비같은 꽃잎들은 누구의 영혼일까?
ⓒ 윤지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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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해여관'은 일제강점하 대구의 번화가에 실제로 있었던 고급 여관의 이름이다. 기라성 같은 독립지사들이 출몰하는 공개된 비밀 회합 장소. 그러므로 독자가 <하해여관>이라는 소설의 제목에 착안하여 조국 광복이라는 '하해'(넓은 바다)를 위해 투쟁했던 이들의 이야기라 짐작하거나, 어떤 고난과 시련도 '하해'와 같은 마음으로 받아 안았던 항일독립지사들의 이야기라 상상한다면 그건 틀리지 않은 짐작이고 상상이다.

그러나 혁명적 낭만주의가 넘실대는 통쾌한 소설인 김학철의 <격정시대>를 떠올린다면 그건 아니다. <하해여관>을 읽는 내내 나는 불편했고 답답했고 가슴이 아렸다. 분노가 치솟았다. <격정시대>가 일제강점기만을 시간적 배경으로 한데 반해 <하해여관>은 해방 공간 3년과 이승만의 집권, 그리고 6·25전쟁이라는 저 전도된 혼란의 역사에 또 하나의 방점을 찍고 있었으니까. 

그러니까 소설은 일제 치하 '하해' 같은 항일독립투사들의 순정과 열정이 해방 후 어떻게 추문화되고 왜곡되며 심지어 능지처참되는가를 친일파와 '이승만들'의 야만적 득세와 미군정의 폭력적 실정을 통해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해방 공간의 내 가족사를 떠올리게 한 소설

우선 한번 묻도록 하자. 조선에서 내로라했던 경북 안동의 명문가 집안 3대가 만주로, 경성으로, 대구로 풍찬노숙하며 독립운동에 일로매진하다 모두 비운의 죽음을 맞이하는데, 그 중에서도 3대째의 한 사내는 해방된 조국, 어느 광산의 깊고 어둡고 음습한 갱에서 유언 한 마디 남기지 못한 채 3000여 명의 동포들과 함께 총살당하고 암매장을 당해 유해마저 찾을 수 없었다면…? 

고백하건데 <하해여관>을 읽는 동안 내겐 수시로 명멸한 기억들이 있었다. 6·25전쟁 전 어느 날 스물두어 살로 갓 결혼한 아버지와 둘째 외삼촌은 경찰에 끌려가 무언가 자백을 강요받으며 혹독하게 매질을 당하셨다.

살아생전 아버님은 거기에 대해 말씀을 꺼낸 적이 없으셨지만 어머님은 그 일뿐 아니라 '어질고 호방하고 진보적인 아주버님'(나의 백부)에 대해서도 말씀하셨다. 백부님은 일제 강점하 형무소 간수였지만 감옥에 갇힌 독립지사와 그 가족들을 은밀하게 물심양면으로 도왔으며, 해방 후엔 야학을 열어 마을 사람들을 가르치기도 했는데 어느 날 논에 나갔다가 누군가의 총에 맞아 돌아가셨다고 했다.

누가 백주대낮에 백부님을 죽였던가? 이른바 '좌우 대립'이 극심했던 시기. 그러나 실제로는 친일 부역자나 기회주의자들이 우익(혹은 반공)의 외피를 쓰고 설치던 때다.

양심적 지식인의 대다수가 좌익 사상 이전에 '민족주의자-항일 투사-정의파'(이런 분들을 나는 좌우익의 이분법을 넘어서 '인간'을 사랑한 '애민지사'라 부르고 싶다)였던 그런 때였으니 그 '누군가'가 누구인지는 짐작이 가고 남는 일이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시절, 백부님은 '반민자(反民者)'의 손에 의해 비명에 가신 것이다.

'항일 투쟁' 안동의 명문가 3대, 비운의 죽음을 맞다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직후 3500여 명의 민간인이 학살돼 매장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 경산코발트광산의 수평갱도 입구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직후 3500여 명의 민간인이 학살돼 매장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 경산코발트광산의 수평갱도 입구
ⓒ 오마이뉴스 이승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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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주요 등장인물인 안동의 명문가 3대란 누구를 말하는가. 퇴계 이황의 후손인 1대는 "유교법도에서 한 치도 양보를 모르는 고지식한 봉건양반"으로서 의병이 되었다가 의병운동이 실패하자 충의사(의병에 나섰던 지방 유림들과 중앙 정부 관리들이 몰락해가는 왕조를 살리기 위해 만든 언론운동 단체)에 가입하여 활동한 이규락(1850~1929).

2대는 이규락 선생의 차남인 이동하(1875~1959). 일찍이 신학문을 가르치는 학교를 세우려는 뜻을 세운 선생은 그것이 문중회의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자 "內功斥倭(내공척외 : 안으로 힘을 길러 왜적을 쫓아냄)"를 혈서로 써서 설득했던 인물로서, 3대인 아들 이병기(1906~1950)와 함께 만주에서, 경성에서, 대구에서 독립-애민 운동에 매진하다 해방 후 비운의 죽음을 맞는다.

그러면 이병기는 누구인가. 이 전기 역사 소설의 주인공이라 할 그는 조부와 부친의 영향 아래 일찍부터 독립운동과 사회주의 사상에 눈을 뜬 '애민지사'로서 수차례의 투옥과 고문, 가족 친지의 잇단 죽음에도 굴하지 않고 항일 투쟁에 매진하다 해방을 맞이한다. 하지만 이승만 치하, 6·25 전쟁 발발 사흘째 되던 날 새벽 경찰에 끌려가선 불귀의 객이 되는데, 불굴의 사회주의자 이병기는 '보도연맹원 학살사건'의 한 희생자가 되고 마는 것이다.

일제의 갖은 회유와 탄압과 고문에도 꿋꿋이 맞섰던 사회주의자 이병기가 어째서 해방 공간에서 관제 반공단체에 가입하게 되고 그로 인해 비참하고도 허망하게 죽게 되었던가? 전도된 역사의 비극적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어쨌거나 분명한 것은 그러한 그의 죽음이야말로 '친미-반공만이 살 길'이 된 친일 세력과 이판사판 권력욕에 눈이 먼 이승만의 역사적 범죄를 웅변한다는 사실이다.

(일제하 악명 높은 고등계 형사 삼인방 중의 하나였던) 서영출은 해방 후에는 경찰서장과 극우 단체 단장이 되어 테러활동을 벌였고 경찰을 그만둔 후에도 진보적인 세력을 탄압하는 등 반민족적 행위로 일관했다. 반민족 행위로 재판에 회부된 그는 고문 치사 등의 범죄 사실을 인정했으나 자신의 친일 활동을 반성하고 자숙하기는커녕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는 등 갖가지 감투를 쓰고서 지방 유지 행세를 하며 호의호식했다. 이는 나중에 체포된 (희대의 항일 투사) 이관술을 세  번이나 기절하도록 고문한 조선인 형사 노덕술이 해방 후 승승장구한 끝에 이관술의 고향이기도 한 울산 지역 국회의원까지 출마했던 것과 다르지 않았다. (173쪽)

"대통령병에 걸린 미친 늙은이"와 친일세력의 범죄 행위

한번은 (줄임) 이승만을 만난 적이 있는데 이승만은 이동하(이병기의 부친)를 보자마자 물었다. "자네 돈은 있는가? 정치를 하려면 돈이 있어야 해." 그래서 이승만은 친일파로 떵떵거리며 살던 부자들이 모인 한민당과 손을 잡고 친일파 청산이니 매국노 처단 같은 말은 꺼내지도 못하게 했다. 이승만은 어디 가나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고 떠들어댔지만 이는 친일 매국노들과 힘을 합치자는 말 외에 아무것도 아니었다. (212쪽)

정치권으로부터 "경찰청장을 맡아 달라"는 등의 회유도 일체 거절하고 낙향했던 역전의 항일 투사 이동하에게 이승만은 "대통령병에 걸린 미친 늙은이"였다.

그리고 그 "미친 늙은이"와 그 무리들(친일파)이야말로 1946년 '10월 인민항쟁'이라 불리는 총파업과 폭동, 1948년 7월 남한 단독정부 수립 과정, 같은 해 10월의 여순반란사건, 제주 4·3항쟁, 그리고 6·25전쟁 직전까지의 4여 년 동안 자행된 잇단 '우익 테러'와 '학살'의 정점에 있었음을 소설은 곳곳에서 폭로하고 고발한다.

<하해여관>은 2005년 12월 1일 '진실화해위원회'가 출범, 활동을 시작하자 대구에 생존해 있는 이병기의 아내(오묘연)과 아들(이효철)이 경산 코발트 광산 유골 발굴 현장을 찾아가는 장면으로 시작하여, 오묘연의 오랜 기억과 함께 먼 길을 돌아 다시 코발트 광산으로 돌아오는 걸로 막을 내린다.

4·19혁명이 일어나자 "아버지 이병기의 죽음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학생 대표로 경산 코발트 광산 유족회에 참여,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요구"하다 5·16군사정권에 의해 "혹독한 고문과 감옥살이"를 당한 후 40년 가까이 통분의 세월만 보냈던 아들 이효철의 어머니 오묘연은 소설의 말미에서야 이렇게 말한다.

"아버님(이동하)이 하해여관 이름을 지을 때 생각하신 뜻처럼 '하해'와 같은 마음이 온 세상에 퍼져 나가기를 바라지예. 민족주의자건 공산주의자건 진정 나라를 사랑하고 걱정하는 사람들과 친교를 맺고 화합하신 아버님의 뜻을 새겨, 나와는 다른 사상일지라도 보듬고 안을 수 있는 사회가 된다면 얼마나 좋겠십니꺼?" (307쪽)

기억하고 싶지 않은 역사, 그러나 외면해선 안 되는 역사

산 위에서 본 경산코발트 광산의 수직갱도 입구. 당시 학살은 이곳에서 이뤄져 100미터 아래의 수직갱도로 시신을 던져넣은 것으로 추정된다.
 산 위에서 본 경산코발트 광산의 수직갱도 입구. 당시 학살은 이곳에서 이뤄져 100미터 아래의 수직갱도로 시신을 던져넣은 것으로 추정된다.
ⓒ 오마이뉴스 이승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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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김성희는 왜 저 기억하고 싶지 않은 역사를 다시 들추어 나를, 우리를 불편케 하는가? '작가의 말'에서 그는 말한다. "역사의 파란과 이념의 질곡에서 자신의 한 목숨을 버렸거나 혹은 반평생을 감옥에서 보낸" "이상주의자"이며 "사회주의자"이며 "빨갱이"인 그들은 "지나칠 정도로 유순하고 낙관적"이었던 것이 "나는 슬펐다"고.

또한 그가 만난 "친일의 행보를 걸어온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좀 더 편하게 살기 위한 생존 방식을 택한" 이들로서 문제는 "그러한 생존방식이 합리화의 명분이 되고 목표가 되고 고착화되어 자자손손 이어져 '상속'"되어 왔으며 그래서 결국 이 나라는 "부패와 비리조차 능력으로 치부하는 괴물들을 양산"하는 사회, "그 모든 것이 용서되고 도리어 자랑이 되는 징글징글한 사회"가 되어버리지 않았느냐고 반문한다. 

과연 MB정권 들어서 노골적으로 자행된 민주주의와 역사 거꾸로 돌리기는 세상이 아는 바다. 과거사위원회의 축소 및 폐지, 근현대사 교과서의 개정, 그리고 그 압권이라 할 '국부' 이승만의 복권 시도, 그 동상 건립…. 이 모든 것은 친일파와 친일파적 무리와 이승만의 아바타들이 2012년 현재, 이 땅에 건재하다는 것을 방증하고 있는 것이다.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서, 이병기의 여든 다섯 살이 넘은 아내 오묘연은 진작 사라진 하해여관의 자리에 서서 회상에 잠긴다.

누군가 자신의 손을 잡아끌었다. 그의 손을 잡은 채 눈이 휘둥그레져 넋을 빼놓고 구경하고 다니는 열일곱 살 새색시가 보였다. 한없이 여리고 약한 자신이 그 곳에 있었다. 운명도 파란도 예측할 수 없고 그럴 여력도 없이 흘러온 한생이, 낡은 필름 감개에 휘감겨 있던 한생이 다시 흐르고 있었다. 흘러가고 있었다.

어느덧 땅거미가 내려앉은 거리에 하나둘씩 가로등이 켜졌다. 오묘연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북성로의 하늘이 은방울꽃처럼 빛났다. (308쪽, 끝)

밤하늘에 빛나는 은방울꽃, 그것은 필경 저 순정했던 수많은 애민지사, 이규락, 이동하, 이병기들임을 우리는 안다. 그래서 새삼 묻게 된다. 친일파와 이승만의 아바타들이 건재한 이 나라에서 그 '애민지사'들의 영혼은 편히 잠들 수 있을까? 그분들이 아직도 그러지 못하고 계신다면 오늘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덧붙이는 글 | <하해여관> 김성희 씀, 사회평론 펴냄, 2012년 1월, 316쪽, 1만5000원



하해여관 - 제2회 고루살이문학상 수상작

김성희 지음, 사회평론(2012)


태그:#안동의 명문가 3대의 항일투쟁사, #보도연맹원 학살 사건, #이승만과 친일파, #이병기, #이동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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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서 문학과 철학을 공부했고 오랫동안 고교 교사로 일했다. <교사를 위한 변명-전교조 스무해의 비망록>, <윤지형의 교사탐구 시리즈>, <선생님과 함께 읽는 이상>, <인간의 교사로 살다> 등 몇 권의 책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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