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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 제382호 여주 고달사지. 여주군 북내면 상교리 혜목산에 자리하고 있었던 고찰이다. 이 고달사가 언제 무슨 이유로 폐사지로 변했는지는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다. 다만 임진왜란 때 절이 모두 소실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할 뿐이다. 고달사는 신라 경덕왕 23년인 764년에 봉황암이란 사명으로 창건이 되었다고 전한다.

 

고려시대에는 대찰로 왕실의 비호를 받기도 했다. 고려 광종 1년인 950년에는 원감국사가 절을 중건하였으며, 고종 20년인 1233년에는 혜진대사가 주지소임을 맡아 절을 크게 번성시켰다. 그 후 원종 1년인 1260년에는 절을 크게 확장하고 중건했다고 한다. 그러한 고달사가 그 이후로의 기록이 보이지를 않는다.

 

고달사는 도대체 언제 화를 입은 것일까?

 

고려시대의 기록에서 그 맥이 끊기고 만 고달사. 1260년대까지 기록에 보이는 고달사가, 그 이후 기록이 보이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1260년까지 보이던 기록이 그 이후 사라졌다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고달사가 나타난다고 한다. 그런 이유로 임진왜란 때 병화를 입었다고 추정하는 것이다. 그 중간에 고달사에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국보 제4호인 고달사지 부도는 고려 초기에 조성이 된 부도이다. 보물 제8호인 석불좌 역시 고려시대에 조성된 석조물이다. 보물 제7호인 원종대사 혜진탑은 고려 초기인 975년에 조성한 석조부도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을 옮겨 간 보물 제282호 쌍사자석등 역시 고려시대의 석등이다.

 

현재 고달사지에 남아있는 모든 석조문화재들의 대개는 고려 초기에 조성된 것들이다. 고달사의 명칭도 이 석조물들이 모두 '고달'이라는 장인에 의해 조성이 되었기 때문에, 절 이름을 고달사라고 했다는 설화도 전해진다. 그런데 1530년에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고달사가 나타난다는 것 하나 만으로 임진왜란 때 병화를 입어 고달사가 사라졌다고 하면, 330년 동안의 사라진 역사는 어디서 찾아야 하는 것일까?

    

 

'신 털이 봉'과 고려시대의 석조

 

고달사지가 소재하고 있는 여주군 북내면 상교리. 주암리에서 고개를 넘어 고달사지로 향하다 보면, 우측으로 참숯 찜질방으로 들어가는 길이 있다. 그 길 좌측에는 작은 흙더미 봉우리가 자리하고, 그 위에는 나무들이 자란다. 마을에서는 이 흙더미를 '신 털이 봉'이라고 부른다.

 

이 신 털이 봉은 고달사에 드나들던 스님들이, 일주문을 들어서기 전 밖에서 묻은 흙을 털어내 생겼다는 봉우리이다. 얼마나 많은 스님들이 이곳을 드나들었기에, 신발에 묻은 흙을 털어낸 것이 이렇게 흙이 쌓여 봉우리를 이룬 것일까? 그 답은 고달사 안에 남아있는 석조물 등을 돌아보면 가늠이 간다.

 

현재 고달사지 안에는 두 기의 석조가 있다. 그 규모가 작지 않다. 현재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47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고달사지 석조는 고려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경기도 내에서도 보기 드문 석조문화재이다.

 

석조는 대개 절에서 물을 담아 두거나 곡물 등을 씻을 때 사용한다. 절의 중심 공간에 석조가 있을 때는 법당을 들어갈 때 정결히 하기 위해서, 손을 씻거나 입을 행구는 데 사용한다. 그러나 고달사지에 있는 문화재로 지정된 한 개의 석조는 건물지 안에 자리하고 있다. 이런 점으로 볼 때 이 석조는 목욕을 하기 위한 석조가 아닌가도 생각이 든다.

 

색다른 이런 석조물들이 자리를 하고 있는 여주 고달사지. 아마도 이 고달사지에서 보는 것들이 색다르게 느껴지는 것들 때문에, 고달사지의 폐사가 더욱 안타깝다. 앞으로 더 연구가 되면, 속 시원한 고달사에 대한 내력이 더 나오려는지.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수원인터넷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고달사지, #여주, #사적, #신 털이 봉, #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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