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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화성은 축조 이후 조선조 말의 일제 강점기를 지나,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성곽의 일부가 파손·손실 되었으나 1975~1979년까지 축성직후 발간된 <화성성역의궤>에 의거하여, 대부분 축성 당시 모습대로 보수·복원했다.

 

세계문화유산이자 사적 제3호인 수원 화성의 둘레는 5744m, 면적은 130ha로 동쪽지형은 평지를 이루고 서쪽은 팔달산에 걸쳐 있는 평산성의 형태다. 성의 시설물은 문루 4, 수문 2, 공심돈 3, 장대 2, 노대 2, 포(鋪)루 5, 포(砲)루 5, 각루 4, 암문 5, 봉돈 1, 적대 4, 치성 9, 은구 2등 총 48개의 시설물이 있었으나, 이 중 수해와 전란으로 7개 시설물(수문 1, 공심돈 1, 암문 1, 적대 2, 은구 2)이 소멸되고 41개 시설물이 현존하고 있다.

 

 

이 중 남수문은 현재 복원 중에 있어 6개 시설물이 사라지고, 남수문의 복원과 함께 42개의 시설물을 만날 수가 있게 되었다.

 

사라진 시설물들이 아쉬워

 

일제는 강점기에 팔달문 인근의 성곽을 의도적으로 파손하였다. 그 결과 은구와 남공심돈, 암문 등이 일제에 의해 사라지게 되었으며, 그 파손한 부분에 상가 등을 건립하였다. 현재 복원 중인 남수문의 경우 아홉 개의 무지개 수문으로 축조한 '구간수문(九間水門)'이다. 북수문인 화홍문이 일곱 개의 무지개 수문을 가진데 비해, 9라는 숫자는 상당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남수문은 1846년의 대홍수 때 부서진 것을, 2년 후 다시 지었다. 그러나 1922년의 대홍수 때 또 다시 떠내려 간 후 복원이 되지 않다가, 이번에 성곽 일부를 잇는 공사를 하면서 복원을 하고 있다.

 

'은구(隱溝)'란 말 그대로 숨어있는 도랑이라는 뜻일 것이다. 성곽 밑으로 물길을 만들어 흘러 들어온 물을 연못을 만들어 저장을 하였다. 은구는 수원천과 함께 성안에서 사용할 물을 준비하는데 상당히 소중한 시설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두 곳에 있었다는 은구의 흔적은 현재 단 한 곳도 남아있지 않다.

 

 

은구와 연못 복원 서둘러야

 

<화성성역의궤>에 따르면 은구를 통한 물길 중 팔달산이 시작되는 곳에 남쪽의 남지가 자리를 하고 있었는데, 상남지와 하남지로 구분이 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 중 상남지는 너비가 사방 40보(약 48m)에 깊이 6척이고, 가운데에 작은 섬을 만들었으며 홍련과 백련을 심었다. 하남지는 너비 40보, 길이 60보(약 72미터) 깊이는 7척이고, 가운데에 섬 둘을 두었는데, 연못의 둘레에는 모두 버드나무를 심고 섬에는 소나무를 심었다.

 

화성에는 이러한 연못이 5개소가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하나도 없어 아쉬움이 크다. 그리고 또 하나의 시설물은 바로 남공심돈이다. 현재 두 곳에 남아있는 공심돈은 모두 북쪽 가까이에 자리를 하고 있다. 팔달문을 보호하기 위한 남공심돈은 일제에 의해 파괴가 되어, 아직도 복원이 되지 않고 있다. 1907년 '헤르만 산더'의 사진자료(국립민속박물관 소장)에 보면 남공심돈은 팔달문에서 동쪽으로 곧게 뻗어난 성곽이 북쪽을 향해 꺾일 때, 그곳에 자리하면서 남수문과 팔달문을 보호한 것으로 보인다.

 

사라진 화성의 시설물들. 끊어진 성곽이 이어지고, 사라진 구조물들이 제 모습을 찾는 날이 하루 빨리 오기를 고대한다. 그것만이 이산 정조의 뜻을 지키고, 강력한 국가로의 힘찬 비상을 위한 날갯짓을 시작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수원인터넷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화성, #세계문화유산, #은구, #남수문, #남공심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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