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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모두 서둘러 특급열차에 타지만, 이젠 자신이 무엇을 찾아 그리도 헤매고 있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 생텍쥐페리, <어린왕자> 중에서
 
바쁜 일상이다. 눈 뜨면 어느새 하루가 가고, '휴, 월요일이네' 한숨 쉬기가 무섭게 주말을 맞는다. 그렇게 1년, 2년 세월이 쌓이면 뒤돌아보기 두려워 다시 앞만 바라본다. 광고 속 카드회사는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라고 소비를 부추기지만 정작 떠나는 사람은 많지가 않다. 카드회사가 돈 버는 게 싫어서? 꼭 그 때문은 아닌 것 같다.
 
단순히 여행을 말하는 게 아니다. 우리의 인생과 일상에도 쉼표가 필요하다는 게다. '슬로 라이프'의 창시자, 쓰지 신이치의 <행복한 경제학>에 소개된 인디오들의 이야기는 꽤 유명하다.
 
유적 발굴 탐험가들에 고용돼 따라가던 인디오들은 정글을 앞두고 아무 말 없이 둥글게 원을 그리고 앉아 꿈쩍도 하지 않았다. 탐험가들이 급료를 높여주겠다고 어르기도 하고 윽박지르기도 하고 총으로 협박까지 했지만 소용없었다. 그런데 이틀이 지나자 이들은 갑자기 일어나서 짐을 등에 지고 다시 목적지로 향했다. 인디오들은 말했다.
 
"너무 빨리 걸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영혼이 우리를 따라올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바쁘게 일하는 당신에게도 필요한 말이다. 연말을 맞아 잘 못 쉬는 독자들을 대신해 잘 쉬는 고수들을 찾아 나섰다. 소개하는 다섯 고수들의 다양한 쉼에서 힌트를 얻어 2012년, 당신으로부터 '잘 찍은 쉼표 하나'를 소개받길 기대한다. - 기자말
 

 

종종 찾는 블로그가 있다. 그의 인터넷집(http://jminiw.blog.me)엔 직장인의 일상과 애환, 고뇌가 오롯이 담겨 있다. 가령 회사 야유회날의 피곤한 맘을 이렇게 남긴다.

 

"나는 조직에 속해있다. 팀, 실, 그 위엔 본부, 그리고 회사. 이 각각의 조직이 적게는 한 달, 길어도 반년에 한번은 꼭 모임을 갖는다. 소소하게는 회식, 크게는 1박 2일짜리 워크샵. 곱하기를 할 줄 알면 벌써 일 년에 몇 번을 회사 사람들과 놀아야 하는지 계산이 될 것이다. …회사 사람들과 노는 것은 자연스럽고 즐거운 일이 아니다.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조직생활을 영위하려면. 뜬금없이 어릴 때 소풍만 다녀오면 그날 저녁 머리가 아파 울면서 잠들었던 생각이 난다."

 

사색의 힘이 느껴진다. 깊은 생각 역시 쉬지 않고는 나올 수 없는 법. 그에게 인터뷰를 요청했다. "나처럼 못 쉬는 사람이 없는데…" 하는 그를 지난 11월 14일 무작정 만나러 갔다. 책, 야구, 사천성 게임, 사진, 여행, 미드(미국 드라마), 커피, 블로그…. 그가 좋아하고, 회사 밖 생활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그의 취미거리들이다. 이 취미거리를 따라가다 보면 '생각하는 힘'의 근원이 밝혀질까. 한 인터넷회사에서 일하는 쭈글(닉네임·여·35)씨를 통해 보통 직장인의 휴식패턴을 살펴봤다.

 

- 생산적으로 쉬어야 한다는 얘기가 있다.

"그렇게 쉬는 사람들이 잘 살더라. 그런데 쉬기 위해 계획까지 짜면 그걸로 더 스트레스 받지 않나. 행복의 기준이 다 다르듯 휴식하는 방식도 다양한 것 같다. 사람 만나는 거 좋아하는 사람들은 퇴근 후에도 계속 사람 만나는 약속을 잡고, 뭐라도 하는 게 남는다는 사람들은 스쿠버다이빙 같은 걸 배우고. 난 편안하게 쉬는 게 좋다."

 

- 블로그를 보니 퇴근 후에 혼자서 카페에 앉아 몇 시간씩 책을 읽기도 하던데...

"그건 인천에서 강남으로 출퇴근하던 몇 년 전 얘기다. 인천은 퇴근시간에 버스를 타기도 힘들거니와 타도 2시간이다. 밤 11시 넘어서 가야 빨리 가니까 시간을 카페에서 때웠다. 회사 근처에서 자취를 한 이후엔 주말 빼고 주로 집에서 읽었다. 사람이 혼자 있을 때도 자기 자신을 예쁘게 하고 있어야 한다고 하지 않나. 근데 집안에만 있는데 화장하는 게  아까워서 주말엔 카페에 자주 갔다."

 

- 책을 많이 읽는 이유가 있나.

"직장인들이 책을 안 보는 사람과 많이 보는 사람으로 나뉘는 것 같다. 많이 보는 사람들의 특징이 있다. 회사에 나오면 대학 때 품었던 정의, 진리 같은 생각들이 '잉여스러워'진다. 회사일은 영업이익률을 구하고 문서만 잘 쓰면 되니까 대학교 때 공부했던 인문적인 지식이나 사유는 필요가 없는 거다. 얼마나 허탈하겠나. 그런 박탈감을 사람들이 독서로 채우는 것 같다. 책을 읽다 보면 나름 자기 존재감을 느낄 수 있으니까."

 

- 사람들은 자기계발 차원에서 책을 일부러라도 읽으라고 권하기도 한다.

"직장에서도 책읽기를 강조한다. 우리 회사도 월 5만 원씩 온라인서점 쿠폰을 준다. 그러면 의무적으로 읽을 수밖에 없는데 실제로는 아이들 책을 사는 경우가 많다.

 

책 읽기는 시킨다고 억지로 안 되는 것 같다. 우리 회사 다른 팀에서 3,4년차 여직원들끼리 책 읽는 소모임을 만들었더라. 억지로라도 책을 읽자고 모임을 만들었다는데 모임을 하려다보니 책을 읽는 게 아니라 세미나를 하게 되는 거다. 예를 들어 피터 드러커가 쓴 책을 하나씩 정해서 스터디 해온 뒤에 발표하는 식이다. 그건 독서가 아닌 것 같다. 독서는 문장 한 줄에도 본인이 공감하고 사유하는 시간인 건데... 스터디도 경영학, 처세술 같은 건 돼도 문학은 안 된다.

 

독서도 하다보면 자꾸 관심영역이 넓어지더라. 예전엔 문학을 많이 봤는데 지금은 과학쪽 책을 즐겨 읽는다. 지금 있는 회사에 입사할 때가 다윈 탄생 200주년이었는데 그때 생물학에 약간 꽂혀서 생물, 물리 등을 보다가 경제학으로 넘어왔다. 그러다가 물리학과 경제학을 접목한 행동과학쪽 책도 보고.

 

온라인광고일을 다시는 안 해야겠다고 생각했다가 다시 하면서 수학책도 보게 됐다. 예전엔 여행가서 환율 계산도 못할 정도로 숫자와 나는 상극이라고 생각했는데 책을 보다보니 흥미가 생기더라. 수학이 그동안 전혀 생각 안 했던 분야여서 그렇지 그쪽에 관심이 있었구나 싶다. 또 영~ 아니었으면 내가 이 일을 계속 못 했을 거고."

 

"책을 읽다보면 배경이 되는 곳을 가 보고 싶다"

 

- 여행도 많이 다니던데….

"책을 읽다보면 배경이 되는 곳을 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미드를 많이 보던 시기엔 거기에 나오는 동네와 식당 찾아 미국에 가보고 싶고…. 그리고 일단 여행을 가면 난 사진 찍는 걸 좋아하니까 사진도 남고, 여행후기도 남는다. 그런 게 내가 남들과 교감할 수 있는 것들인데 여행을 안 가면 그런 것들을 할 수가 없다.

 

직장생활에 대해선 떠들게 별로 없다. 블로그에 회사에 매출보고를 했는데 매출이 10% 감소해서 어떤 대책을 세웠더니 칭찬을 받았다는 얘기를 쓸 수는 없지 않나. 자기 얘기거리를 계속 유지하려다보니 책, 사진 등 취미생활로 가게 되는데 그중에서 여행이 물리적으로 체험하는 강도가 세서 자주 여행을 간다.

 

사람들이 여행을 갈 때와 안 갈 때 블로그 글이 달라진다고 하더라. 활기차진다고. 나도 느낀다. 똑같은 열흘인데 여행을 안 가면 없는 날처럼 지나간다. 근데 여행을 가면 1년에 며칠은 인생이 다채롭고 아기자기하고 뭔가 한 것처럼 느껴지는 거다.

 

물론 여행을 안 가도 그런 게 가능한 사람들이 있다. 우리회사의 한 여자대리는 저녁에 친구랑 먹은 술안주까지 찍어서 블로그에 올린다. 그 친구는 하루하루가 여행처럼 즐거운 거다. 나 같은 경우는 일상에서 그렇게까지 의미를 못 찾으니까 다른 것들을 하는 거다."

 

- 처음 여행의 맛을 느꼈을 때는 언제인가.

"대학 졸업 후, 인터넷회사에서 광고영업을 했다. 그 일에 적응하기 힘들었다. 대행사 다니면서 잘 보이고 접대하고 돌아오면 그 내용들을 숫자로 얘기해야 하고. 회사를 그만두고 싶어서 어학연수를 간다고 핑계를 댔다. 연수를 간다고 하면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을 테니까.

 

회사를 그만둔 후에 진짜 연수를 계획해서 영국에 갔다. 영국에 있을 때 처음으로 프랑스 파리에 갔다. 첫 해외여행이어서 그런지 너무 좋더라. 일상에서 벗어나 대학생 같은 편한 복장으로 흐느적거리면서 돌아다니는 자유로움이 좋았다. 가는 장소마다 새롭고 감동이고. 지금은 매년 두 세번씩 여행을 가다보니 별로 감흥이 없다. 그런데 그걸 안하면 허전하고 뭔가 할일을 안한 느낌이 들어서 때가 되면 가게 된다."

 

- 여행을 하면 "새로운 나를 발견한다"고도 하던데 실제 그런가.

"다 뻥이다. 여행을 가면 진짜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게 되는 것 같다. 예를 들어 뉴욕만 하더라도 여기서 쇼핑 좋아한 사람은 거기 가서도 쇼핑을 하고 여기서 공연 좋아한 사람들은 거기 가서도 공연만 보러 다닌다. 나는 카페들이 좋던데 사실 나는 한국에서도 예쁜 카페만 보면 환장했다. '아, 내가 카페를 좋아하는 애구나'를 발견하게 되는 거다. 새로운 게 아니라 진짜 나를 보는 거지."

 

- 추천하고 싶은 여행은?

"대학 동기 부부와 친한 선배들과 독서여행을 간 적이 있다. 휴양림에 있는 콘도로 각자 읽고 싶은 책을 갖고 가서 책만 읽다 왔다. 요리도 최소화하고 술도 거의 안 마시고…. 책 읽으려고 그 멀리까지 가냐고 하겠지만 집에 있으면, 특히 부부들은 서로 청소해라, 설거지해라 떠미는데 바빠 책 읽기 힘들지 않나. 일부러 그런 시간을 내는 것도 좋더라."

 

- 미래를 위해 돈을 모아야겠다는 생각은 안 하나.

"한다. 그래서 통장에서 잔고를 확인할 때마다 여행 다니는 걸 정말 후회한다. 여행경비뿐만 아니라 여행 전후로 지출도 늘어나니까 타격이 크다. 후회되긴 하지만 명절 등 긴 휴가를 낼 수 있는 순간이 되면 이 돈은 회사 한, 두 달 더 다니면 모을 돈이지 싶어서 가게 된다. 나는 회사형인간인가 보다."

 

- 월급이 지금보다 많지 않아도 여행에 갔을까.

"아마도 소비를 줄이고 갔을 것 같다. 지금보다 월급이 적었던 전 직장에 있을 땐 그 때문인지 돈을 못 모았더라."

 

- 블로그 글을 보니 예전에 이력서에 10년 뒤 자기모습에 대해 "2년 동안 1개국어씩 10년 동안 5개 국어를 구사하는 글로벌 인재가 되겠노라고 뻥을 쳤다"고 했다. 지금부터 10년 뒤 자기 모습을 그려본다면?

"10년 뒤까지 생각 못하겠다. 당장 두 달 뒤에 집 옮길 문제도 해결 못 했는데... 집 주인이 집세를 올려서 이사를 가야 한다. 10년 뒤면 마흔다섯인데 그때쯤엔 회사에 안 다녀도 되는 상황이면 좋겠다."

 

- 언제쯤 회사를 그만둘 것 같나.

"당장이라도 그만두고 싶다. 지금 회사가 싫어서가 아니라 직장생활이 싫어서. 그런데 할 줄 아는 게 없고 돈도 없으니까 다니는 거고, 다닐 수 없을 때까지 다니지 않을까. 회사생활을 평생 할 수 없는 건 확실하다. 잘 해야 마흔? 냉정하게 그 전에 매니저가 되지 않으면 실무적으로는 3~4년 뒤 후배들과 내가 일하는 수준이 같아질테니 나는 필요가 없어질 거다.

 

회사를 그만둔 후엔? 모르겠다. 그것 때문에 나도 고민이다. 나와서 할 게 없으면 불안해지니까 공부같은 걸 생각하게 되는데 대학원 학비가 너무 비싸더라. 여행을 안 가면 될텐데 아직은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다."

 

- 승진, 성과급 등을 신경쓰지는 않는지.

"신경이 쓰이기도 하지만 내 생각엔 내가 회사에 그렇게 많이 기여했거나 중요한 일을 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사실 회사에 기여하고 싶은 마음도 없지만 조직 안에 있으니까 내 윗사람이나 동료들한테는 인정받고 싶다. 그 사람들이 잘 되게 도와주고. 일단 민폐가 안 돼야겠다."

 

- 최근 나라가 걱정된 적이 있었나.

"동생이 중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근데 요즘 애들은 장래희망을 쓰라고 하면 삼성, 현대 등을 쓴다더라. 우리 때는 과학자나 '달 나라에 가고 싶다'처럼 황당한 얘기들이 있었는데 지금은 기업명이 나온다고 하니 충격이었다. 애들이 삶의 질이나 꿈보다 돈만 생각하는 것 같아 씁쓸했다. 그 예쁜 입들로 그런 얘기를 한다고 하니..."

 

- 인생의 신조가 있는지. 본인이 생각하는 행복이란?

"오늘은 웃자"다. 힘든 일 생겼을 때 일단 웃고,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마음 안 다치고 사람들한테 사랑 많이 받고 많이 웃고... 그런 게 행복 아닐까."

 

그의 블로그 글에서 직장인이 일과 휴식에 대처하는 법의 단초를 찾았다.

 

"나는 닭처럼 살고 싶지 않다. (사실 닭들도 그렇게 살면 안된다.) 그러니까 최소한 회사에 가서 다른 사람을 쪼지 않을 것이며 알은 내가 낳고 싶을 때만 낳을 것이다. 나 말고도 우리 회사에 사람 많다. 그리고 아무리 부리를 잘라도 내 인간적인 감성과 지식을 지켜낼 것이고 고로 나는 닭대기리가 되지 않을 것이다. 오밤중에 닭생각에 몸서리치다 닭이 되지 말자는 선언을 남겨본다."-그의 대학선배의 "회사원들이 닭장 속 닭과 같다"는 글을 보고 쭈글씨가 쓴 글 중.

덧붙이는 글 | <노동세상> 12월호에 실린 기사를 보완했습니다.


태그:#잘 찍은 쉼표 하나, #쭈글, #여행, #독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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