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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오 돔씨
 테오 돔씨
ⓒ 민종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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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 전두환 군부독재의 칼날이 시퍼렇던 시절, 그 군부독재와 맞서 싸우는 한국의 민주세력과 노동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청계천 평화시장을 중심으로 창신동, 신당동 등 피복공장 뒷골목을 돌아다니던 독일인이 백발이 되어 다시 그곳을 찾았다.

26년 만에 우리나라를 찾은 독일인 테오 돔(74)씨는 지난 11월 21일 방한 해 11월 29일 한국을 떠난다.

독일인 테오 돔씨는 친구인 귄터 브로이덴베르크 오스나브뤼크대 교수에게 70년대 한국의 동백림사건, 김지하 사건, 김대중 사건에 대해 들어 한국의 인권상황을 알게 되었다. 그 후 그는 한국의 인권상황을 개선하는데 도움을 주기 위한 '한국위원회'에 참여하면서 부광석선생, 브라이덴슈타인씨 등과 함께 한국의 인권개선을 위한 활동을 시작했다.

그가 속해있던 NGO '인간의 대지(Terre des Hommes)'는 아동복지에 초점을 맞춘 단체였다. 프랑스 소설가 생텍쥐페리가 지은 동명 소설에서 이름을 따온 '인간의 대지'는 소설 내용처럼 휴머니즘을 표방하며, 특히 아동과 청소년 문제에 초점을 맞춘다. 70년대 홀트아동복지회를 통해 한국에 와본 그는 80년대 한국 인권을 개선하기 위한 활동을 하기 위해 K.N.C.C 목사들을 통해 프로젝트를 찾았으나, 아동복지를 위한 마땅한 프로젝트가 없었다.

이때 마침 K.N.C.C에 관계하던 최혁배 선생(현재 변호사)과 연결이 되어 한국의 노동 상황을 알게 되었다. 즉 한국에선 직접 노동을 하는 연소근로자의 문제와 저임금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는 노동자의 문제가 곧바로 노동자의 자녀문제와 연결된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한국 노동운동에 대한 자료를 모으고 평화시장 봉제공장 노동자들의 현실을 공부했다. '민중'과 같은 한국어도 배웠다. 특히 평화시장 노동자들이 대부분 10대라는 점에 놀랐다. 그가 그에게 전태일 사건은 곧 청소년 노동착취의 문제였다.

그는 코리아(Korea)라는 소책자를 발간해 독일인들에게 청계 봉제공장 노동자들의 실태를 알렸다. 그의 강연을 들은 10대 학생들은 '전태일의 뜻을 기리자'는 집회를 열었고 모금도 했다. 돔은 한국의 노동운동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했다. 그 이유로 당시 안기부의 블랙리스트에도 올랐지만 아랑곳 하지 않았다.

테오 돔 부부
 테오 돔 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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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오 돔과 필자
 테오 돔과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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돔은 1984년 청계천 평화시장 청계피복노조를 지원했다. 청계피복노조는 1970년 11월 13일 평화시장 앞길에서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외치며 분신 항거한 전태일의 뜻을 받들어 결성된 노동조합이다.

청계피복노조는 70년대 민주노조 운동을 굽힘 없이 전개해 오다가 80년 전두환정권이 들어서면서 강제로 해산 당했다. 그러나 청계피복노동자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84년 4월에 강제 해산 당한 노조를 현장에서 복구해 노동조합 본연의 임무를 수행하기로 하면서 합법성투쟁을 전개하고 있던 중이었다.

당시 당국은 노조 사무실이 있는 건물 주인에게 압력을 가해 노조를 쫓아내는 방법을 썼다. 이에 청계노조에서는 자신의 건물이 필요하다는 것을 각계에 호소했다. 돔은 이러한 청계노조의 호소에 부응하여 청계노조 사무실로 사용할 수 있는 건물을 매입할 수 있는 돈을 지원했다.

80년대 청계노조는 당국의 압력으로 노조사무실이 강제로 끌려나가기 일수였다
▲ 길 바닥으로 끌려나온 노조 사무실 집기 80년대 청계노조는 당국의 압력으로 노조사무실이 강제로 끌려나가기 일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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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5년 청계피복노조는 노학연대를 통해 합법성쟁취투쟁을 지속적으로 해 왔다
▲ 청계피복노조 합법성쟁취 투쟁 1984-5년 청계피복노조는 노학연대를 통해 합법성쟁취투쟁을 지속적으로 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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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청계피복노조는 돔의 지원으로 1985년 2월 종로구 창신동 106번지에 노조 소유의 건물을 마련하게 된다. 이것이 전태일기념관의 모체가 되었다. 이어 전태일기념사업회는 노조사물실로 사용하던 청계천 7가 사무실도 정리하여 오늘의 전태일재단을 만들었다.

청계 피복 노조와 돔을 연결했던 최혁배 변호사는 "돔 선생의 지원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전태일기념사업회도 없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밖에도 돔은 70, 80년대 민주노조 노동자들의 활동을 다각도로 지원했다. 특히 지역 여성노동자들의 자녀들을 위한 탁아소 지원을 해 왔다. 이 탁아소는 지역 탁아운동의 출발점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지역운동의 거점역할도 하게 되었다.

최혁배 변호사와 테오 돔선생
 최혁배 변호사와 테오 돔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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돔은 '인간의 대지'에서 지원하는 아동 청소년 복지의 범위를 넘는 언론운동, 환경운동, 불교운동 등 다양한 민주화운동도 지원하기위해, 이들을 함부르크의 제3세계 커뮤니케이션과 연결하는데 노력을 기울였다.

이러한 공로로 26년 만에 방한한 돔은 11월 22일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측으로부터 민주화 기여 관련 감사패를 받았다. 23일에는 70, 80년대 민주인사 40여명과 함께 환영 만찬을 했다.

26년 동안 한국에 안 온 이유를 묻자 돔은 이렇게 말했다.

"마지막 한국 방문을 마치고 돌아가는데 공항에서 갑자기 남자 두 명이 날 가로막았다. 안기부 요원이라고 하더라. 공항 내 어떤 사무실로 끌고 가서는 2시간 넘게 조사했다. 왜 한국에 왔느냐고 했고 민주화 운동가들 이름을 대면서 무슨 관계인지 캐물었다. 제일 집요하게 물었던 건 북한과의 관계였다. 아무 관계 없다 해도 소용 없었다. 독일대사관 관계자가 온 뒤 조사가 끝나 겨우 비행기를 탔다. 그 전에도 청계피복노조 관련자들 만나고 집회나 세미나에 참석할 때마다 두 명씩 미행이 붙더라. 마지막 공항 취조 이후론 '인간의 대지' 이사회가 한국 활동을 위험하다며 금지시켰다. 이후 인도 등에서 활동하다 2000년 은퇴했다."

돔과 연결되어 활동한 최혁배씨는 87년에 안기부에 체포되어 국가보안법으로 징역을 살았다. 그 후 그는 미국으로 가서 변호사 생활을 하다가 올 봄에 귀국하여 한국에 자리 잡고 있다. 24일 전태일재단을 방문한 돔에게 전태일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있냐고 물었다.

"'전태일'이라는 이름이 한국에선 노동운동과 직결되지만 나는 청소년 노동 문제에 경종을 울린 인물로 이해한다. 그리고 노동자 문제라 해도 노동자는 곧 부모라는 점에서 결국 노동자 문제는 아동과 청소년의 문제로 연결된다."

그는 26년 만에 한국에 온 소감을 묻자 "내가 왔던 그 나라가 맞나 싶을 정도로 많이 변했다"며 "도심의 건물숲에서부터 교통시스템까지, 급속한 근대화 속도가 놀라울 따름"이라고 말했다.

28일 돔과 마지막 만찬장에서 만난 환경재단 최열 총장이 그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전했다.

"공해문제 연구소 시절 도움을 주셔서 어려움을 뚫고 활동 할 수 있었습니다. 그 결과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참 감사합니다. 이제 우리도 돔 선생께서 제3세계를 지원하는 유지를 이어 다섯 개 나라의 환경단체에 지원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정신이 계속해서 퍼져 나갈 것입니다. 그 원조가 바로 돔 선생입니다."

이 말을 들은 돔은 연신 "행복합니다, 행복합니다"라고 말했다.

덧붙이는 글 | 민종덕 기자는 전 전태일기념사업회 상임이사입니다.



태그:#테오 돔 , #인간의 대지, #전태일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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