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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가 채 걷히지 않은 고요한 아침이었다. 지난 10일은 아침에는 비행기도 뜰 수 없었다. 비행기 소음이 대학수학능력시험 듣기평가에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올해 고3인 최형철군(18)의 가족도 아침 일찍 부산을 떨었다. 최군은 부모님과 인사를 하고 마지막으로 주민등록증, 수험표, 필기구를 확인한 후 7시 40분 집을 나섰다. 서울 종로구 혜화동 집에서 고사장인 동성고등학교까지는 걸어서 15분 거리다.

이미 학교는 수험생들을 실어온 차와 응원하러 온 사람들로 북적댔다. 후배들은 준비해온 현수막을 흔들고 북과 꽹과리를 치며 "수능대박"을 외치고 있었다. 최군은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뱉어냈다. 입에서 입김이 흘러 나왔지만 춥지 않았다. 긴장하지도 않았다. 사실 그는 대학에 가고 싶지 않았지만 가족의 등쌀에 못 이겨 억지로 시험을 쳤다.

수능시험을 보기 위해 동성고등학교에 도착한 최형철군.
 수능시험을 보기 위해 동성고등학교에 도착한 최형철군.
ⓒ 이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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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점, 스펙, 취업... 대학생이 좀비 같아

최군이 대학에 가지 않겠다고 처음 생각한 것은 고등학교 1학년 때인 2009년 글을 쓰면서부터다. 중학교 시절 그는 전교 성적 상위 10% 내에 꾸준히 드는 모범생이었다. 학교 수업이 끝나면 친구들과 야구를 하거나 책을 즐겨 읽었다. 특히 만화, 무협소설, 판타지소설을 좋아했다. 중학교 3년 동안 5000권 정도 읽었다. 부모님께 받은 용돈은 전부 책 빌리는 데 썼다. 하루 두어 시간만 잠을 자며 책에 빠져 지낸 날도 많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 나도 이 정도 소설은 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부터 조금씩 글을 쓰기 시작했다. 더 많은 것을 배우기 위해 소설가 권지혜, 시인 정희성 등 문학가들의 특강을 찾아 다녔다. 잘 모르는 것은 중앙대, 동국대 문예창작과 교수님께 메일을 보내 묻기도 했다.

2009년 전국 글짓기 대회에 참가했다. 전쟁기념관에서 주최하는 '나라사랑평화사랑' 글짓기였다. 처음 나간 대회에서 2등을 했다. 글을 쓰는 재미가 점점 커졌다. 이때부터 최군은 문학가의 꿈을 키워나갔다. 지난 5월에는 목포 해양대에서 열린 제16회 '바다로 세계로' 전국 글짓기 대회에 나가 4등을 하기도 했다.

그는 하고 싶은 공부를 하기 위해 무조건 대학에 갈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주변의 대학생 선배들이 고민하는 얘기를 들으니 요즘 대학생들이 좀비처럼 보였다. 다들 비싼 등록금 내가면서 학점관리, 스펙쌓기, 취업준비에만 몰두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군의 학교 친구들은 생각이 달랐다. 친구들은 아침 일찍부터 밤 늦은 시간까지 죽어라 공부했다. 대학 수시전형 기간에는 너도나도 원서를 넣었다. 최군도 불안한 마음에 담임선생님의 권유에 따라 수시원서를 썼다.

법학과, 건축과 등 성적에 맞춰 쓴 곳에 면접을 보러 다녔다. 그는 이렇게까지 해서라도 대학에 가야 하는지 의문이 들었다. 면접장에서 스스로를 인위적으로 포장해야 한다는 것에 환멸감을 느꼈다. 대학가기 위해서 하는 공부도 진짜 공부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 정답을 잘 골라 높은 점수를 받는 기술을 배우는 것에 불과해 보였다.

"대학 안 가면 도대체 뭘 하겠다는 거냐"

최군이 대학에 꼭 가야 하는지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을 때 우연히 언론 보도를 통해 '투명가방끈'에 대해 알게 됐다. '대학입시거부로 세상을 바꾸는 투명가방끈들의 모임'은 1993년생을 주축으로 대학입시와 학벌사회 경쟁위주의 교육 및 불안정한 사회 현실을 거부하는 이들이 모여 만든 모임이다.

최군은 그들을 더 자세하게 알아보려고 인터넷 카페에 가입했다. 10월 31일 홍익대 부근에서 투명가방끈들의 거리행진이 있을 예정이라는 것도 거기서 알게 됐다. 그는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가진 친구들을 직접 만나보고 싶어 거리행진에 나가기로 결정했다.

지난달 31일 홍대 ‘걷고싶은거리’에서 할로윈 행진을 하는 ‘투명가방끈들의 모임’.
 지난달 31일 홍대 ‘걷고싶은거리’에서 할로윈 행진을 하는 ‘투명가방끈들의 모임’.
ⓒ 이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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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일 오후 4시께 학교를 나선 최군은 집에 도착하자마자 옷장을 열었다. 저녁에 있을 거리행진 때 입고 나갈 옷을 고르기 위해서였다. 장례식 간다는 기분으로 검은색 정장과 검은 넥타이를 선택했다. 대학이라는 왜곡된 교육현실을 묻어버리고 좋게 보내주자는 의미에서다. 저녁 6시 지하철 2호선 홍대입구역에 도착했다.

8번 출구로 나와 행진이 시작되는 홍대 '걷고싶은거리'로 갔다. 이미 스무 명 정도의 사람들이 모여 분장을 하고 피켓을준비하고 있었다. 좀비와 마녀 등 분장도 각양각색이었다. 최씨는 그들과 함께 분장을 하거나 피켓을 들지 않았다. '홍대놀이터'를 지나 홍익대 정문을 거처 다시 '걷고싶은거리'로 돌아올 때까지 대략 한 시간을 조용히 행진을 뒤따르며 사람들을 관찰했다. 이 운동을 바라보는 주변 시민들의 반응, 사회의 시선이 궁금해서다.

"공부 못하고 대학 못 가니까 괜히 그러는 것 아니냐. 차라리 그 시간에 공부를 해라."
"저렇게 말하면서도 결국 대학 갈 수밖에 없지 않나."
"대학 안 가면 도대체 뭘 하겠다는 거냐."

거리행진을 하는 동안 최군이 직접 들은 시민들의 반응이다. 그는 시민들의 부정적, 냉소적 반응에 놀랐다. 우리 사회는 여전히 교육 현실의 문제를 지적하거나, 대학 입시체제를 거부하는 이들에게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낸다.

명문대 합격이 자랑? 학교는 입시학원일 뿐

사회의 부정적 시선, 편견을 느낀 것은 거리행진에 참가했던 뚜어찡씨(18·별명)도 마찬가지다. 뚜어찡씨는 고등학교 자퇴생이다. 31일 할로윈 거리행진 때 입고 나온 고등학교 교복도 두 달 밖에 입지 않은 것이었다. 그는 학교에서 공동체 생활 속에 여유를 갖고 조화롭게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고 싶었다. 학교는 다양한 삶의 방식이 있다는 것을 배울 수 있는 곳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 환상은 2년 전 입학식에서 완전히 깨졌다. 교장은 입학식 연설에서 고등학교는 대학을 가기 위한 중간 과정일 뿐이라며 명문대 합격생을 다수 배출한 학교를 자랑하기 바빴다. 그의 생각과 달리 학교는 입시학원일 뿐이었다.

2009년 5월, 고등학교 1학년 첫 학기 때 학교를 그만뒀다. 경쟁이 아닌 조화를, 단순한 지식의 습득이 아닌 삶을 배우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학교를 안 다닌다는 사실을 당당하게 이야기하지 못했다. 사회 부적응자라는 주변의 편견과 부정적 시선 때문이었다. 뚜어찡씨는 스스로를 '지식 주입 공장'과도 같은 학교의 부적응자이지만 사회의 낙오자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주변에서는 학교를 그만두면 큰일이 일어날 것처럼 말했다. 심지어 부모님은 학교를 그만두면 대학은 물론 취업하기 힘들고, 결혼하기도 어렵다고 했다. 그러나 아무 일도 없었다. 오히려 자신을 깊이 돌아보고 생각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책을 읽고 작곡을 배우거나 봉사활동을 하기도 했다. 학교가 아닌 혼자 보내는 시간 속에서 방황하다가도 스스로 생활에 틀을 만들고 경영하는 법을 배웠다.

할로윈 거리행진에 참가한 뚜어찡.
 할로윈 거리행진에 참가한 뚜어찡.
ⓒ 이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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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가방끈들의 모임'도 인터넷에서 우연히 알게 됐다.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가진 친구들이 있다는 게 반가웠다. 그들을 만나고 싶다는 생각에 거리행진도 참가했다. 뚜어찡씨도 참가자들과 함께 분장을 했다. 눈 밑에 다크써클을 그리고 등짝에는 '시험공부하다 과로사'라는 문구를 붙이고 거리를 행진했다.

'투명가방끈들의 모임'과 함께 행진을 했으나 뚜어찡씨는 대학을 거부하지는 않는다. 하고 싶은 공부가 있기 때문이다. 내과 의사 출신으로 현재 심리상담소를 운영하는 중국작가 삐수민의 <마음 먹는 방>이라는 책을 읽고 임상심리학자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대학진학을 선택한다고 해서 간판을 중요시하는 학벌사회, 대학 가야만 대접받는 현실에 순응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굳이 비싼 등록금을 내면서 맹목적으로 취업을 위해 학점을 관리하고 스펙을 쌓고 싶지 않았다. 하고 싶은 공부를 하기 위해 뚜어찡씨는 작년에 검정고시를 치고, 지난 10일에는 수능시험도 쳤다.

대학에 가지 않아도 차별받지 않는 사회

우리나라의 대학진학률은 80% 정도로 OECD 국가 가운데 최고 수준이다. 올해에도 69만 명 이상이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수능시험을 치렀다. 이런 수치가 보여주듯 우리 사회에서는 대학이 모두가 들어가야만 하는 필수 교육과정처럼 돼 버렸다. 그래서 대학을 선택하지 않는 사람들은 사회 낙오자로 낙인 찍히게 된다.

성열관(경희대 교육학) 교수는 "대학거부운동은 학벌위주, 무한경쟁과 같은 현 교육현실의 문제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이라며 "대학을 꼭 가야만 하는 사회구성원 다수의 보편적 생각에 반하는 사회도전적이고 숭고한 정치적 행위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또한 그는 "그 어떤 교육 정책보다도 대학을 선택하지 않는 이들에 대한 한국 사회의 인식 전환이 우선돼야 한다"고 말했다.

지난 10일 청계광장에서 대학입시거부선언 발표 기자회견을 갖는 ‘투명가방끈들의 모임’.
 지난 10일 청계광장에서 대학입시거부선언 발표 기자회견을 갖는 ‘투명가방끈들의 모임’.
ⓒ 이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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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가방끈들의 모임' 중 18명의 고3 학생들은 수능시험이 있던 10일 오전 11시 15분 서울 청계광장에서 대학입시거부선언을 발표했다. 이들은 줄 세우기식 무한경쟁교육, 지나친 학벌사회, 정답만을 강요하는 주입식교육, 교육의 목표가 입시와 취업이 되는 것에 반대한다.

또한 누구나 질 좋은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교육예산의 확보, 대학에 가지 않아도 차별받지 않고 최소한의 먹고사는 걱정 없이 배우고 싶은 것을 배우며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안정적인 사회를 요구한다. 이들은 오는 12일 청계광장에서 '경쟁과 학벌만을 강요하는 교육과 사회를 바꾸는 거리행동'을 준비 중이다. 최형철군과 뚜어찡씨도 이날 거리행동에 동참할 계획이다.


태그:#대학수학능력시험, #수능시험, #대학입시거부, #투명가방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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