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군(軍)에서 자살한 의문사가 나중에 선임병들의 가혹행위 등에 의한 것으로 밝혀진 경우 국가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 청구소송 소멸시효는 자살 사고가 발생한 때가 아니라 진상규명이 이뤄진 때부터 계산해야 한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관련 자료와 정보를 사실상 독점하고 있는 군의 특성상 내부에서 어떤 불법행위가 있었는지 여부는 군 스스로 투명하게 공개하지 않는 이상, 외부에 있는 민간인이 알기에는 원칙적으로 불가능에 가깝다는 판단에서다.

 

신병훈련을 마치고 1991년 1월25일 육군 보병 1사단에 배치된 A씨는 '입대 전 학생운동을 했던 경험이 있다'는 이유로 "군기를 잡으라"는 중대장 등의 지시로 선임병들의 구타와 가혹행위 등이 일상적으로 계속되자 자대배치 9일 만에 부대 내에서 소나무에 목을 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사고 직후 조사를 맡은 헌병수사관들은 소대원들로부터 조직적이고 일상적인 구타가 행해지고 있다는 진술을 들었고, A씨의 사체부검 결과에서도 곳곳에 구타의 흔적으로 보이는 멍과 상처가 있었음에도 A씨가 주특기 변경에 대한 실망감, 소속 대대가 GOP에 투입될 것에 대한 불안감 등으로 인해 복무부적응을 비관하고 자살한 것으로 사건을 종결했다.

 

이에 유족들은 군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 아들의 사망 경위와 동기에 석연치 않은 점이 있으니 이를 밝혀 달라고 신청했으나, 두 번에 걸쳐 이루어진 군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에서도 사고 당일 망인의 행적과 사망 동기 등을 명확히 밝혀내지 못했다.

 

이후 유족은 "망인의 학생운동 경력을 이유로 선임병들의 구타 및 가혹행위가 일상적으로 행해졌으며, 이로 인해 자살한 것으로 의심되므로 사망 원인을 정확하게 조사해 망인의 명예를 회복시켜 달라"며 진정서를 제출했다.

 

2009년 재조사 결과, 소속부대 지휘관들은 선임병들의 후임병들에 대한 일상적인 구타 및 가혹행위가 행해지는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이를 묵인했고, 망인의 사망 후에는 헌병수사관을 비롯한 외부인들에게 망인에 대한 구타 및 가혹행위 사실을 말하지 말 것을 병사들에게 지시한 사실이 밝혀졌다.

 

조사 결과, 망인은 소속부대에서 근무했던 10일 동안 선임병들에게 수시로 주먹이나 군홧발에 의한 구타는 물론 온갖 종류의 얼차려와 인격모독적인 언어폭력을 당한 뒤 목매어 사망한 채 발견된 것으로, 망인은 연일 계속되는 비인간적인 구타, 인격모독에서 벗어나기 위한 수단으로 자살 이외에 다른 방법을 찾을 수 없었던 절망적인 상태였던 것으로 판단했다.

 

이에 유족들이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하자, 국가는 손해배상청구권이 인정된다고 하더라도, 그 손해배상청구권은 시효가 이미 소멸했다고 주장했다.

 

불법행위를 원인으로 한 국가에 대한 손해배상청구권은 피해자가 손해 및 가해자를 안 날로부터 3년이 지나거나 불법행위를 한 날로부터 5년이 지나면 시효로 소멸하는데, 이 사건 소가 망인이 자살한 1991년 2월 3일부터 5년이 경과한 2009년 12월 제기됐으므로, 손해배상청구권은 시효로 인해 소멸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1심인 서울중앙지법 제34민사부(재판장 전광식 부장판사)는 2010년 9월, 항소심인 서울고법 제32민사부(재판장 김명수 부장판사)는 지난 4월 손해배상 청구소송 소멸시효를 자살한 날이 아닌 진상규명 시점으로 적용해 "국가가 유족에게 6100여만 원을 지급하라"며 유족의 손을 들어줬다.

 

사건은 국가의 상고로 대법원으로 올라갔으나, 대법원 제3부(주심 박시환 대법관)는 25일 군 복무 중 가혹행위로 자살한 A(당시 21세)씨의 유족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원고 일부승소 판결한 원심을 확정했다고 25일 밝혔다.

 

재판부는 "국가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권은 불법행위를 한 날로부터 5년이 지나면 시효가 소멸하지만, 망인이 군복무 중 자살한 사고와 관련해 유족인 원고들로서는 그것이 선임병들의 심한 폭행·가혹행위 및 이에 대해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은 부대관계자들의 관리·감독 소홀 등의 불법행위로 인해 발생한 것이라는 점을 군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2009년 3월 진상규명결정이 내려짐으로써 비로소 알 수 있었으므로, 그 전까지의 기간 동안에는 원고들이 피고를 상대로 손해배상청구를 할 수 없는 객관적 장애가 있었다고 봐야 한다"고 밝혔다.

 

이어 "병영문화의 선진화에 힘써야 할 책임을 지고 있는 피고가 오히려 그와 반대되는 후진적 형태의 군대 내 사고의 발생을 막지 못하고서도 일반사병으로 징집된 망인이나 유족에 대해 아무런 보상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피고 자신의 책임으로 빚어진 권리행사의 장애상태 때문에 소멸시효기간이 경과했다는 점을 이유로 들어 손해배상책임마저도 면하는 결과를 인정한다면, 이는 현저히 정의와 공평의 관념에 반한다"고 지적했다.

 

재판부는 그러면서 "결국, 피고의 이 사건 소멸시효 완성 항변은 신의성실의 원칙에 반하는 권리남용으로서 허용될 수 없어 이와 반대되는 원심 판결을 탓하는 피고의 주장은 받아들일 수 없어 손해배상책임을 인정한 원심 판단은 정당하다"고 판시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법률전문 인터넷신문 [로이슈](www.lawissue.co.kr)에도 실렸습니다.


태그:#의문사, #군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손해배상, #가혹행위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