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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가신 그날 밤

가을비가 허공을 밟으며 가슴을 툭툭 칩니다

살아서는 다시 밟지 못한 북녘 고향 땅

넋이 된 지금 함경북도 종성에는 닿으셨습니까

그곳에도 잘린 허리 서럽다 서럽다 울며불며

가슴 찌르는 철조망 툭툭 차는 가을비가 내립니까  

고향집 우물가 느릅나무는 안녕하십니까

그 느릅나무에 60년 한 서린 시 새기고 계십니까

이승에서'나는 시인이다'외친 영원한 시인 선생님!

가을비 내리는 저 하늘에

까맣게 몰려오는 저 먹장구름에

빈소를 들락거리는 저 가을비에

단풍물 오르는 저 나뭇잎에

남북이 발 딛고 선 이 땅 구석구석에

선생님 시가 씌어지고 있습니다

선생님은 이제 시인이 아니라 시입니다

- 이소리 시 <시인이 아니라 시다-시인 김규동 선생님 영전에> 모두 

 

시인 김규동 선생이 9월 28일 낮 2시 30분 향년 87세로 이 세상을 훌쩍 떠났다. 함경북도 종성에 고향을 두고 있는 시인은 이 세상을 떠나는 그날까지 그 고향 집 마당에 서 있는 느릅나무를 잊지 못했다. 부모님과 가족을 가슴에 묻고, 철조망에 묻었다. 넋이 되어서라도 남북통일을 앞당기는 파수꾼이라도 되려는 듯이.

 

문단 후배들을 그 누구보다도 아끼고 다독였던 노시인이었지만 문인들에게 한 치 빈틈을 보여주지 않았다. 노시인이 이승을 떠나는 그날 밤, 가을비가 한반도 허리춤을 마구 찌르는 철조망 가시를 툭! 투둑! 뭉개며 아프게 내렸다. 남북통일을 끝내 보지 못한 시인을 어쩔 수 없이 데리고 가야 하는 하늘도 가슴이 몹시 아팠을까.

 

글쓴이는 그날(28일) 밤 반지하 달셋방에서 노시인이 누워 있는 삼성의료원 빈소가 있는 쪽에 막걸리 한 잔을 올린 뒤 큰절을 두 번 했다. 그 막걸리를 노시인이 남긴 시라 여기며 밤새 마셨다. 그 막걸리에 시인 김규동 선생님을 기리는 시를 쓰고, 그 시를 마셨다. 

 

29일(목) 저녁 때 찾은 삼성의료원 빈소에는 수많은 문인들로 붐볐다. 한국작가회의 회장 구중서(문학평론가), 한국작가회의 사무총장 이은봉 시인, 소설가 현기영, 시인 강민, 이시영, 최두석, 고광헌, 나해철, 박광배, 김이하, 이행자, 조길성, 한국문학평화포럼 회장 홍일선(시인), 한국문학평화포럼 사무총장 이승철(시인) 등.

 

가랑비가 오락가락하던 그날, 시인 김규동 선생 빈소에 모인 문인들은 저마다 끝내 남북통일을 보지 못하고, 고향 땅을 마음껏 오가지 못하고, 비바람처럼 휑하니 떠나는 노 시인을 가슴에 묻고, 소주잔에 묻었다. 이제 남은 문인들이 앞장 서서 하루속히 남북통일을 앞당기는 시를 쓰자는 눈빛으로 소주를 주고받으며.

  

올 3월 끝자락 마지막 남긴 자전 에세이 <나는 시인이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특별한 그만의 재능과 소질이 있어요. 공부가 뭐 별겁니까? 자신의 재능과 소질을 극대화시켜 세상을 아름답게 하고, 사람 사는 훈훈한 사회를 일구어가는 게 공부입지요." - <나는 시인이다> 70쪽

 

고 김규동 선생님을 추모하며, 지난 3월 끝자락에 낸 자전 에세이 <나는 시인이다>(바이북스)를 다시 들춘다. 이 책에는 1950년대 시인 박인환과 김경린, 이봉래, 조향, 김차영 등과 '후반기' 동인으로 활동하며 우리 시문학을 이끌어온 시인 김규동 선생이 걸어온 삶과 시가 그대로 녹아 있다. 어린 소년 시절 초상부터 일제 강점기 때 공부, 은사 김기림과 만남, 시인이 되는 과정, 월남과 민족 분단 등.

 

1부 '유년 시절의 기억', 2부 '시인을 꿈꾸다', 3부 '대한민국에서 시인으로 살아가기'에 작가연보와 함께 실려 있는 '성적통신표를 위조하다', '기다리던 작문 시간' '경성고보 시험에 낙방하다', '시인 김기림 선생을 만나다', '한 여인의 잔향(殘香)', '해방과 함께 찾아온 이념 갈등', '피란지 부산에서의 생활', '시인 천상병과 박인환', '대한민국 시인들' 등 24편이 그것.

 

이 책은 시인 김규동 선생이 '삶'이란 먹을 찍어 '시'란 붓으로 쓴 자전적 에세이만이 아니라 우리 현대 시문학을 살펴볼 수 있는 사료로서도 아주 소중하다. 김광규 시인은 김규동 시인을 일컬어 "시대를 배반하지 않는 선비"라고 못 박았다. 선생 스스로도 실제 "시대를 배반하지 않는 선비"로 살았다.

 

어릴 땐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아픔을 가슴 깊숙이 새겼고, 청년 땐 한국전쟁과 분단을, 아버지가 되었을 땐 군사독재에 항거하며 민주화운동이란 깃발을 들었다. 나이가 들어서는 물질만능주의에 허우적거리는 우리나라 사람들 모습을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그대로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시로 썼다. 

 

김규동 시인의 어린 때를 펼쳐보자. 김규동 시인은 "동네 마당에서 노니는 당나귀를 잡아타고 달리다 떨어지고, 브레이크도 없는 자전거를 비탈길에서 타고 내려오다 신발 뒤축이 해지고, 높은 나뭇가지 위의 까치집에서 까치 알을 꺼내다 떨어지고, 소학교 1학년을 낙제해 두 번 다니고, 성적통신표를 위조해 부모님께 보여드렸다가 들통이 나"기도 했다.

 

그렇다면 공부도 잘 못하던 이 말썽꾸러기 소년이 어떻게 시인이 되었을까. 그는 "책 읽는 것이 좋아 학교에서 돌아오면 하루 종일 아동 문학 전집을 끼고 살고, 작문 시간에 선생님께 칭찬을 받고 나서는 한 달에 여덟아홉 편의 글을 쓰기도 하면서 문학인의 꿈을 품었다"고 쓴다. 시인은 "경성고보 은사였던 김기림 시인의 영향이 가장 컸다"고 되짚었다.

 

경성고보에 다닐 때에는 나중에 영화감독이 된 신상옥과 시인 이용악의 아우로 형을 미워했던 이용해, 소설가 김한길의 아버지이자 사회당 당수가 된 김철을 만났다. 이들은 시인과 가장 살갑게 어울렸던 분들이며, 시인이 늘 그리워했던 사람들이다. 그밖에도 첫사랑 진학순과 일본인 한문 선생 와타나베 등도 시인에게 많은 가르침을 줬다.

 

시인 김수영에 대한 이야기도 꽤 재미가 쏠쏠하다. 시인은 "깡마른 얼굴에 소 눈동자 같이 큰 눈, 항상 어딘가 쓸쓸해하는 모습의 김수영"이라며 "이가 나빠 30대부터 틀니를 해, 오징어를 줘도 먹을 수 없었던 사람, 생계를 위해 '양계(養鷄)'를 해야만 했던 사람, 여성과 사귀는 것에 소질이 없었던 사람, 항상 긴장하고 불안해하던 사람이 김수영"이라고 적었다.

 

올 2월 허리춤께 나온 <김규동 시전집>

 

현기증 나는 활주로의

최후의 절정에서 흰나비는

돌진의 방향을 잊어버리고

피 묻은 육체의 파편들을 굽어본다

- 시 <나비와 광장> 몇 토막

 

고 김규동 시인(87)은 올해 2월 허리춤께 시 432편을 모은 <김규동 시전집>(창비)을 펴냈다. 시인은 남쪽으로 내려온 그해(1948년) <예술조선>에 시 '강'을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인은 그 뒤 60여 년에 걸쳐 시집 9권(시선집 포함)과 평론집과 산문집 여러 권을 펴냈다.

 

<김규동 시전집>은 시인이 모더니즘을 내세운 초기시부터 민주화운동에 적극 참여하며 현실참여시를 쓰기까지 평생에 걸친 시세계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 시전집에는 <창작과비평> 2010년 겨울호에 발표한 <편지> <경고>를 포함해 고령과 폐렴 등으로 몸이 불편했어도 꾸준히 쓴 미간행 작품들도 함께 실려 있다.

 

시인은 젊을 때 <동아일보> 등 여러 신문사와 출판사에서 일하며 한동안 시를 멀리 했다. 시인이 다시 펜을 잡게 쓰게 된 때는 군사정권이 저지르는 폭압이 꼭짓점으로 치닫던 1970년대부터다. 시인은 이때부터 시국에 눈을 돌리며 소위 '투사 시인'으로 나선다. 시인은 1970~1980년대 백낙청, 고은, 박태순 등과 함께 한국문단 민주화운동에 참여하면서 자유실천문인협의회, 민족문학작가회의 고문을 맡았다.

 

젊어서는

발레리도 읽고 릴케와 에세닌도 애독했으나

정신분석이니

쉬르레알리즘 선언 따위도 흥미로웠으나

지금은

쌀을 안치고 불을 켜

군말 없이 밥 짓는 일에 애정을 바친다

(줄임)

남도 북도 없는 하나의 세상

그것은 아직도 아득히 머나

간소한 저녁상을 대하고 앉아

따뜻한 밥을 먹고 있노라면

갑자기 무엇인가 내게 다가와 있음을 느낀다

- 시 <하나의 세상> 몇 토막

 

1948년 김일성종합대학을 중퇴하고 남쪽으로 내려와 평생 고향을 가지 못하는 한을 품고 산 시인 김규동 선생. 선생은 은관문화훈장과 만해문학상을 받았으며, 올 6월에는 대한민국예술원 문학부문 수상자로 뽑히기도 했다. 선생의 장례는 10월 1일(토) 아침 8시 문인장으로 치러진다.

 

'원로시인 김규동 선생 문인장'이라 이름 붙은 이 장례식에는 시인 김정환이 사회를, 약력보고는 시인 이은봉, 조시는 시인 맹문재, 조사는 시인 민 영이 맡았다. 글쓴이가 시집을 보내면 그때마다 꼬박꼬박 글쓴이 시 몇 토막을 붓으로 적고, 그림까지 곁들인 뒤 낙관까지 찍어 보내주시던 시인 김규동 선생. 몸은 비록 사라지지만 우리들 가슴에 영원히 남을 으뜸 시인이여. 이제 시가 되어 삼라만상이 되어 다시 돌아오소서.

덧붙이는 글 | <문학in>에도 보냅니다


태그:#시인 김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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