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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산에 대한 지식이나 열정이 남다른 것도 아니고 심오한 철학을 가슴에 품은 것도 없다. 단지 심심풀이 삼아 몇 번 다녀보았을 뿐이다. 지금까지 내가 밟아 본 산을 손꼽아 보면 대충 큰 산 몇 개가 고작이다.

 

그런 내가 아들을 데리고 지리산에 간 까닭은 청소년기를 막 시작하는 때에 삶의 이정표라도 새로 만들고 정립할 수 있는 시간을 갖기 위해서다. 너무 큰 목표인가. 더 작고 세부적으로 말하면 뭘 이루고자 하는 목표가 없는 상태에서 여름방학을 무료하게 보내는 것 같은 안타까움에서 시작되었다.

 

지금까지 꽤 많은 방학을 보냈지만 내 기억속의 아이들은 숙제를 미리 한다거나 뭔가 뿌듯한 시간을 보냈다고 생각할 만큼 좋았던 시간을 갖지 못한 것 같다. 왜 그랬을까? 내가 게을렀던 걸까, 아니면 아이들에게 문제가 있었던 걸까. 많은 고민을 했고, 이제는 더 크기 전에 아이들이 세상을 좀 더 넓고, 깊게 생각할 수 있는 동기와 경험이 필요함을 절실하게 느꼈다.

 

2.

지리산 2박3일 종주를 준비한 지는 꽤 오래되었지만 막상 실천을 하려니 경험부족과 날씨 등등으로 인해 안개같은 두려움이 밀려와 강력한 실천의지를 살짝살짝 가렸다. 더구나 출발 하루 전날에 폭우가 쏟아져 내렸고, 우리의 산행예정일에는 지리산 인근에 특보가 내려질 거라는 예보도 나왔다.

 

"괜히 고생만 하고 소득도 없을 걸, 잘됐어" 하고 위안을 하다가도 또 다른 한 쪽에서는 "이럼 안되는데. 또 똑같은 시간이 되잖아" 하고 질책이 다가왔다. 그럴 때에 필요한 것이 친구다. 같이 가기로 했던 일행이 이왕 계획한거 근처라도 갔다가 아니면 다른 여행을 하자고 우겨서 마뜩찮게 출발을 했다.

 

300km가 넘는 거리를 달려서 도착했을 때는 이미 출입통제가 내려졌고, 예약된 산장도 취소가 되어 환불되었다는 통지를 받은 때였다. 고집스럽게 내일은 모르니 한적한 노상공원에서 TV에 나오는 1박2일 프로그램처럼 진정한 야생을 위해 비박을 해보기로 했지만 웬만큼 자리 좋은 곳은 사람들이 이미 다 차지해 버렸다.

 

1960~1970년대 풍경이 느껴지는 허름한 동네 구멍가게에 들러 혹시 마을에 민박할 수 있는 곳이 있냐고 묻자 할머니가 한 집을 가르쳐 주었다. 냉장고, TV, 에어컨, 심지어 선풍기도 하나 없이 농사지을 때 필요한 것부터 잡동사니가 쌓여있는 방을 허겁지겁 치우는 젊은 아낙네에게 값을 물으니 "글쎄예"하고 우리보다 더 난감하게 대답을 한다. 그리고 잠시 거실로 사라지더니 전화를 하는 소리가 들렸다.

 

젊은 부부가 집을 새로 단장하고 처음 맞이하는 손님인데 민박집 이름도 없고, 얼마를 받아야 할지도 몰랐는데 그게 아이러니 하게도 인간미가 느껴져 좋았다. 그래서 얼마를 내라 하지도 않았는데 먼저 짐을 풀었다.

 

망설이는 아낙에게 우리가 먼저 "오만원 드리면 될까요?" 하니 반가운 듯 "그럼 안되겠었예"했다. 산장에서 먹을 저녁준비 물품을 풀어 간단히 식사를 하고 동네 한바퀴를 돌았다. 내공이 많은(?) 내공리라는 동네였다. 돌아오는 길에 아까 소개해 준 가게에 가니 들마루에서 할머니 두 분과 할아버지가 뻥튀기에 맥주를 한 잔 하다가 몇 개 먹어보라고 내밀어 주셨다.

 

산 밑 경치 좋은 곳에 있는 민박촌의 인심이 폭염 햇살에 말라가는 옥수수 잎이라면 그곳은 폭우에 떨어지는 처마의 빗방물처럼 정이 뚝뚝 떨어지다 못해 흘러내려 낮선 이방인인 우리들의 마음을 금세 적셨다. 밖에서는 계곡을 훑고 지나가는 물소리와 탁자를 때리는 빗소리가 함께 어우러져 아우성쳤고, 낮선 곳에서의 어둠은 쉬 잠을 몰고 오지 못해 눈은 감고 있어도 깨어 있는 것처럼 지루하고 피곤한 밤을 보냈다.  

 

3.

아침. 비가 그쳤고, 산도 일곱시쯤 열렸다. 아들은 비가 계속와서 산에 가지 않기를 바랬고, 나와 친구 그리고 친구 아들은 어쨌든 이곳에 왔으니 가야 할 계산이 섰다. 그게 처음부터 달랐다. 산행은 체력이 아닌 의지에 좌우됨을 산행을 하면서 더욱 절실하게 깨달았다.

 

어쨌든 중산리 주차장에 도착해서 법계사 중턱까지 오르는 첫차를 타고 3km를 쉽게 올라갔다. 그때부터 법계사까지 2.8km구간은 아들과 나의 기싸움으로 정말 인내력의 한계가 느껴지는 길이였다.

 

처음부터 안 갈 계산부터 하고, 어떡하든 중간에서 멈춰버릴 구실만을 찾는 아들에겐 평범하게 보이는 비탈길도 버거운 걸음이였다. 친구와 친구아들은 앞서서 이미 자취도 보이지 않았다. 다행스러운 건 어제의 통제로 인해 사람들이 거의 없어서 열 걸음에 한 번의 휴식에도 남에게 피해가 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곰 출현에 주의하라'는 좀 낯선 현수막에서 사진도 찍으면서 생각을 바꾸려고 노력했고, 갈 수 있다고 맘먹고 가보면 좀 힘이 덜 들 거라고 달래기도 했고, 4학년짜리 초등학생보다도 의지가 약하다고 좀 자극적이고 자존심 상하는 비교법을 써가며 야단도 쳤다.

 

4.

어찌어찌 법계사까지 올랐다. 그것만으로도 성공인 것 같았다. 아들을 좀 격려해서 앞으로 더 힘들게 기다리는 산행에서 생각을 바꿔 힘 낼 수 있는 동기를 주기 위해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들이 들을 수 있는 큰 소리로 "당신 아들이 열심히 잘 하고 있다"며 너스레를 떨다가 바꿔줬다. 아내도 아들이 힘들어 하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장하다고 격려를 하는 듯 했다. 짧은 시간에 1900미터를 오르려니 가파른 나무계단과 돌계단이 연속으로 이어지는 산행이 계속 되었다. 아들은 계단이 아니라 사다리라고 했다.

 

한 떼의 안개가 밀려 왔다 밀려 가면 숲속은 냉장고 속처럼 시웠했다. 얼마나 시원한지 아들의 안경에는 볼에서 나는 열기로 인해 연신 습기가 찼다. 그렇잖아도 쉴 구실을 찾는 아들에게는 그것이 얼마나 반가운 핑계인가.

 

엄마의 격려 덕분이였는지 아님 처음과 다르게 이제는 돌이킬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더 심한 경사길에서도 아들은 힘을 내고 있었다. 체력이 아닌 인내로 산행을 하고 있는 듯 했다. 그때 아들이 자랑스러웠고, 포기하지 않고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집스럽게 산행을 강행한 친구가 정말 고맙게 느껴졌다.

 

한 고비가 남아 있었다. 300여 미터를 남겨두고 정상이 보이는 곳에 올라서니 아들이 비명을 지른다. 방금 지나간 아저씨가 격려차 10여 분만 가면 된다고 해서 위안을 삼아 기대를 했는데 마지막 '깔딱고개'가 사다리처럼 절망스럽게 보였다.

 

"아들아 뒤를 한번 돌아 봐 이렇게 높게 올라왔어, 구름이 저 밑에 있잖아. 그런데 겨우 300미터 남은 걸 못가겠니 힘을 내자"하는 격려에도 아들은 좀처럼 움직일 엄두를 못냈다. 그러다 겨우 몇 걸음씩 다시 시작했다.

 

아들이 인내는 쓰기만 한 것이 아님을 언제쯤 알게 될까? 나중에 어른이 되어서도 지금의 시간이 자랑스럽게 기억될 텐데, 방학을 마치고 친구들과 얘기하면서 조금은 거만하게 지리산을 이야기 하며 친구들에게 "넌 거기도 아직 안 가봤느냐"고 면박을 주면서 가슴뿌듯해 할 텐데.

 

하지만 지금 당장은 가쁘고, 고통스럽게 호흡을 하며 천근같은 다리를 들어 산을 올라야 하고, 뒤로 1900미터의 높이에서 휘도는 구름을 밟고 대간을 발아래 두었는데도 경치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오직 이 고통이 언제쯤 끝날까에만 관심이 있는 것 같다. 한번 휘 돌고 왔다가 사라지는 안개처럼 자꾸만 약해져 주저앉고 싶은 자신에게 기대고 싶은 욕망에 무릎 꿇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아빠는 아들이 고통속에서 생각이 풍선처럼 커지기만 바랬다. 체력이 아닌 인내로 견디길 바랬다. 가슴속의 욕망은 마주 달리는 기차처럼 아들과 아빠는 그렇게 달랐다. 하지만 많은 시간이 흐른 후엔 함께 달리는 기차에 앉아 이 시간을 얘기할 수 있으리라.

 

마침내 정상에 섰다. 천왕봉 표지석을 잡고 사진도 찍었다. 오랫동안 이 시간을 기억해 줄 수 있는 것은 그것 밖에 없을 지도 모르기 때문에 서둘렀다. 혹시라도 저 아래 세상으로 내려가 일상에서 금세 잊어버리기라도 하면 물거품 같은 일이 될까봐. 사진을 근사하게 찍어서 책상 옆에 두고두고 볼 수 있게 해주어야지.

 

5.

내려오는 길은 좀 달랐다. 버스가 기다리는 곳까지 6시에는 도착해야 하는 목표가 있었다. 그걸 타지 못하면 다시 3km를 더 걸어야 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후들거리는 다리를 보며 가끔 실소를 하는 아들을 보며 나는 웃을 수 있는 여유가 있다는 이유 때문에 다소 안심이 되었다. 그리고 그 가파른 내리막길에서 만나는 5m 남짓의 짧은 평지는 얼마나 기쁘고 편안한가. 오르는 고통을 알지 못하면 그것의 기쁨과 안락은 알지 못했을 것이다.

 

숲 속의 어둑함과 버스를 타야겠다는 생각으로 인해 하산의 고통은 어느 정도 소멸된 채 20여 분 여유있게 목적지에 도착했다. 우리들의 지리산 여행은 당초계획에 반쪽 밖에 성공하지 못했지만 인생을 살아가면서 언젠가는 아들이 만날 수 있는 힘든 상황에서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떠올릴 수 있는 첫 번째 추억이 되었을 것이라 확신한다. 그것이 아들이 지리산에 간 이유가 될 것이고, 내년에도 또 후년에도 생각을 업데이트 시키는 산행이 계속되어야 할 이유가 되었다.

덧붙이는 글 | 다음엔 가족 모두와 함께 지리산을 종주할 계획입니다.


태그:#지리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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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제천의 소소한 이야기를 전하는 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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