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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저러하게 살아온 세월이 천 년. 물론 '그러저러한 세월'이라는 표현이 천 년에 대한 예의 없음을 안다. 고작 백 년도 살지 못하는 인간이 쓸 말은 아니기에.

급한 일 없으면 잠시 눈을 감고 천 년을 계산해 보자. 한 시간이 60분, 그렇게 모인 시간 24개가 하루. 다시 24시간이 30개가 모이고, 30일이 열두 개 모여 365일이 되고, 365일이 다시 열 개가 모여 십 년이 되고, 십 년이 열 개가 백 년, 다시 백 년이 열 개가 모여 천 년이니 상상이 되나. 처음엔 세세하게 날짜를 계산해 적었더니 너무 커져서 대충 세 줄 문장으로 요약해 천 년을 적어 봤다.   

그런 세월을 살아 본 사람이 없으니 표현도 없다. 다만 살아 본 척 짐작을 적을 뿐이지. 천 년 앞에 겸손하고, 존중하고, 마땅히 높이 받들어야 함에도 적절한 표현조차 찾지 못해 그러저러하다고 뭉뚱그렸다.  
 
만세루 아래로 난 문을 통해 들어가면 계단을 오를 때마다 조금씩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는 대웅전을 만날 수 있다.
▲ 만세루 아래로 난 문  만세루 아래로 난 문을 통해 들어가면 계단을 오를 때마다 조금씩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는 대웅전을 만날 수 있다.
ⓒ 김영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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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년 고찰 봉정사를 처음 찾은 건 코로나가 기승을 부리던 지지난해 깊은 겨울 어느 날 무채색 풍경이 침묵처럼 고요했던 때였다. 이번 여름 여정에 봉정사를 다시 넣었다.

잎 떨꾼 나목에 찬바람이 짙푸른 신록과 숨을 턱턱 막는 폭염으로 바뀌었을 뿐 일주문 앞 길은 여전히 고요한 침묵의 융단이 깔려 있었다. 종교라는 엄숙함의 자발적 작동에 의한 자의식에서 비롯된 분위기는 그물처럼 덮쳐오는 습한 더위와 뒤엉켜 더욱 가라앉았다. 

잎에 부딪쳤다 뚝뚝 떨어지는 빗방울이 차라리 좋으련만 했으나, 지난 며칠 세차게 내려 다치고 잃은 사람들이 많으니 세상에 나만 좋자고 비원 하는 염치가 여기서는 좀 아닌 듯해 생각마저 접었다. 

처음 방문 때도 그랬듯이 만세루 기둥으로 다가가 살포시 안았다. 천 년을 견디며 세파에 파이고 닳아져 손에 닿는 거친 느낌이 전하는 사연과 그가 주는 위안과 평화가 내 몸속으로 스며들었다.      

만세루 밑으로 난 계단을 오르면 영화의 오프닝처럼 대웅전이 모습을 차츰 드러낸다. 빗살무늬 마당엔 폭염이 장마처럼 쏟아지고 있어 그곳을 걸어 대웅전 앞으로 갈 만큼 나는 아직 불심이 깊지 않다. 햇살을 피해 만세루 마루에 걸터앉았다. 한 장면에 멈춰있는 영화가 재미있을 리 없건만 대웅전만 바라보는 한 장면이 아름다운 영화는 봉정사가 유일하지 않을까 싶다.

오래 보고 있으니 감독의 디테일이 보인다. 코발트 빛 푸른 하늘에 뭉게구름 떠있고, 용마루 뒤로 덥수룩한 푸른 머리의 소나무와 처마 밑 빛바랜 낡은 기둥, 문창살과 어두컴컴한 그림자 뒤로 근엄한 부처님과 돌계단, 디딤돌 위의 가지런한 신발과 이름 모를 꽃들...
 
마지막 계단을 올라서면 만날 수 있는 대웅전의 모습. 온화한 자태의 대웅전은 그러저러하게 살아온 쳔 년의 삶을 담고 있다.
▲ 온화하게 쳔 년을 품고 있는 대응전 마지막 계단을 올라서면 만날 수 있는 대웅전의 모습. 온화한 자태의 대웅전은 그러저러하게 살아온 쳔 년의 삶을 담고 있다.
ⓒ 김영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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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던 풍경이 보이는 풍경이 되는 건 시간문제일 뿐이다. 지금 이 장면은 천 년 동안 상영되는 영화의 1초 컷에도 미치지 못하는 찰나에 불과하고, 나는 찰나에 서 있는 것이다.     
 
염천의 빗살무늬 마당을 가로지르는 스님은 할아버지 견을 따라가고 있다.
▲ 대웅사 마당을 가로지르는 스님과 노견 염천의 빗살무늬 마당을 가로지르는 스님은 할아버지 견을 따라가고 있다.
ⓒ 김영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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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 있으면 여름도 시원하다고 등 뒤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알려준다. 더위에 지친 시선만 이쪽저쪽 느리게 움직였다. 법당에서 스님이 문을 열고 덥수룩한 털을 뒤집어쓴 개를 앞장 세워 빗살무늬 마당을 건너간다. 잠시 후 돌아오면서 '할아버지 같이 가야지' 한다. 그러고 보니 개가 무척 늙어 보였다. 
 
만세루 마루에 앉아서 바라보는 대응전의 모습은 고요하고 그윽해 한 장면에 멈춰있는 영화같다.
▲ 봉정사 대응전 모습 만세루 마루에 앉아서 바라보는 대응전의 모습은 고요하고 그윽해 한 장면에 멈춰있는 영화같다.
ⓒ 김영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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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락전을 지나 은행나무 길로 돌아 내려갔다. 겨울에 봤을 땐 찬 바람맞는 쓸쓸한 가지가 퇴역한 노(老) 장군처럼 힘겹고 위태롭게 허세를 부리는 듯해 애처로웠는데 짙푸르게 두툼한 옷을 입고 가지가 휘어질 만큼 열매까지 주렁주렁 달린 모습이 위풍당당하게 변해 있었다. 나 아직 죽지 않았다고 항변하듯. 
 
겨울의 앙상했던 나무는 푸른 옷에 열매까지 주렁주얼 달려있어 아직 건재하고 있음을 과시하는 듯 했다.
▲ 봉정사 400년된 은행나무 겨울의 앙상했던 나무는 푸른 옷에 열매까지 주렁주얼 달려있어 아직 건재하고 있음을 과시하는 듯 했다.
ⓒ 김영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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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은 여름대로 세월을 키우고 겨울은 또 겨울대로 그 세월을 묵히며 봉정사가 살아가고 있다. 봉정사에게 내가 다녀간 시간은 별거 없는 일상이다. 내가 태어나기 전의 그 별거 없음이 그러저러했을 터이고, 내가 없어지고 난 후의 별거 없음도 그러저러할 것이다.

그러저러한 별거 없음의 시간이 쌓인 천 년이 열개, 백개가 또 끊임없이 계속되겠지. 종교적인 신성함 말고도 알 수 없는 존경스러움과 고귀함의 향기가 풍기는 봉정사는 평범하고 무심한 듯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최고의 가치를 발휘한다는 증거 그 자체다.   

이틀뿐인 휴가 중 이 하루가 다른 날 보다 길게 느껴졌던 이유가 아무것도 하지 않음에 있었던 건 아닐까. 혹은 천 년과 마주한 시간을 가만히 거슬러 생각해 본 덕분은 아닐까. 일주문을 나오는 걸음은 느리고 더뎠다.

덧붙이는 글 | 브런치에도 글을 올렸습니다.


태그:#안동, #봉정사, #은행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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