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3차 희망버스 기획단이 주최한 '하늘로 오른 사람들이 85호 크레인 김진숙에게보내는 편지와 집담회'
 3차 희망버스 기획단이 주최한 '하늘로 오른 사람들이 85호 크레인 김진숙에게보내는 편지와 집담회'
ⓒ 노동세상

관련사진보기


하늘에 매달린 사람을 위해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들이 모였다.

15만 4000볼트의 전류가 흐르는 송전탑에서, 머리 위에서 헬기가 최루탄 폭우를 퍼붓는 공장 굴뚝 위에서, 94일을 굶으며 버틴 공장 옥상에서, 동상에 걸려 잘라야 할지도 모른다는 발을 감싸며 영하 40도의 밤을 지낸 아치 위에서. 모두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철폐 등을 외치며 투쟁한 끝에 절박한 마음으로 '고공농성'을 택한 노동자들이었다.

그런 노동자들이 35개 사업장에 200여 명이나 있었다. 이중 10여 명이 지난 28일 3차 희망버스 준비단이 주최한 '하늘로 오른 사람들이 김진숙을 응원합니다' 집담회에 참여했고, 처음으로 처절했던 각자의 하늘을 나누었다. 말하고 들으면서 참가자들의 눈은 자꾸만 붉어졌다.

"외로움이 제일 무서웠다"

고공농성 경험을 이야기하며 울먹이는 기륭전자 유흥희 조합원.
 고공농성 경험을 이야기하며 울먹이는 기륭전자 유흥희 조합원.
ⓒ 노동세상

관련사진보기

기륭 노동자들은 2008년 서울시청 앞 조명탑과 구로역 CCTV철탑, 기륭전자 경비실 옥상에서 총 세 번의 고공농성을 벌였다. 94일간의 단식으로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까지 이르기도 했다.

"불법파견노동자의 정규직 전환을 요구하면서 여성 네명이 16m 조명탑에 올라갔어요. 저랑 같이 올라간 동지가 사실 정말 심각한 고소공포증이 있었어요. 그렇게 심각한 줄 몰랐어요. 올라가는 내내 울면서 '비정규직 철폐 연대가'를 부르는데… 사실 너무 미안했어요. 이런 동지를 올려야 되나. 너무 절박해서 올라가는 거지만. 너무 마음이 아팠어요."

당시 상황을 전하는 기륭전자 유흥희 조합원이 끝내 울먹였다.

"그리고 정말 많은 사람들이 취재를 왔는데, 정말 기뻤지만 한편으로는 너무 슬펐어요. 이렇게 목숨을 걸어야만 세상이 우리에게 관심을 가져주는구나…. 이 사회의 그런 무덤덤함이 한편으로 싸우는 사람들을 어렵게 하고 있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고요."

눈물을 닦으며 유씨는 덧붙였다.

"이런 심정으로 우리 노동자는 싸운다고 생각합니다. 자본이 끝까지 욕심을 포기 못하듯이, 우리도 우리의 삶을 포기 못한다는 걸 보여주면서요."

2009년 로케트전기 정리해고자 유제휘씨가 올라간 곳은 워낙 비좁아 다리조차 못 펴는 옛 전남도청 앞 CCTV 위였다. 새우처럼 몸을 굽혀서 70일을 버텼다. 해고자 복직을 요구하며 몸싸움에 단식까지 다 해봤지만, 형사처벌과 사측의 고소고발까지 겹친 상황은 더 극한 투쟁을 요구했다.   

"저랑 한 동지가 3월 7일 올라갔는데, 그때부터 1주일 동안 4계절 날씨를 다 겪었어요. 체력적으로 많이 저하돼 있었는데, 알고 지내던 박종태 동지(2009년 4월 대한통운의 78명 집단해고 사태와 관련 투쟁을 벌이다 스스로 목숨을 끊음)가 자결했다는 소식까지 접하면서 정말 힘들었어요. 거기다 고공농성을 외부에 알리지 말라는 문자까지 받아서 그날 반나절을 펑펑 울었어요." 

그래도 민주노총 지역간부 한 명이 CCTV 옆에 아시바(공사 철재 안전난간대)를 세워서 15일간 단식농성을 해준 데 큰 힘을 받았단다.

"우리는 아무것도 없는데 거긴 텐트까지 쳐서 되게 부러웠는데 나중엔 '그래도 굶는 거보단 좁은 게 낫다' 싶었습니다."  

눈물 흘리는 대우조선 하청노동자조직위원회 강병재 의장.
 눈물 흘리는 대우조선 하청노동자조직위원회 강병재 의장.
ⓒ 노동세상

관련사진보기


이야기를 듣던 대우조선 비정규직 노동자 강병재씨는 자꾸만 눈가를 훔쳤다. 지난 3월부터 6월까지 88일 간 15만 4000볼트의 전류가 흐르는 송전탑에 매달려 있었던 그는 자꾸만 감정이 북받치는 듯했다. 그는 "모든 노동자들이 단결하지 못하고 한 당사자만의 투쟁이 돼서 싸움이 더 처절해지는 것 같다"며 안타까워했다.

농성 후 시력이 많이 떨어졌다는 그는 김 지도위원의 건강을 특히 걱정했다.

"(고공농성이) 저도 심적으로는 물론이고 육체적으로도 많이 힘들었죠. 송전탑 위에 바람 많이 분다 아입니까. 사람 날아갈 정도거든요. 칸막이도 없고 아무것도 없었거든요. 잠은 좀 자야 안 됩니까. 그래도 밤에 비라도 오면 뭐든 붙들고 꼬박 새야 되는 거예요. 또 회사 측이 가족들 이용해서 협박 회유할 때…. 정말 회사 사람한테 '죽여 버린다'는 표현을 썼어요. 배터리, 건전지도 안 올려주고 그래서 밤 되면 아무것도 안 보이고 바깥과 아무 연락이 안 닿는 게 가장 힘들고 무서웠죠." 

"승리를 쟁취하는 건 고공농성자가 아니라 함께 하는 사람들"

이날 참가자들은 김진숙 지도위원의 상태를 크게 염려하면서도, 지금 그에게 필요한 것은 '무조건 내려오라'는 말보다 진정성 있게 함께하는 연대라고 했다.

2006년 코오롱 노조는 정리해고 철회와 노조탄압 중단을 외치며 두 번에 걸쳐 공장 송전탑과 청와대 앞 50m 타워크레인에서 고공농성을 진행했다. 최일배 전 코오롱 노조위원장은 현재 투쟁이 김진숙 개인의 것인양 보는 시각을 우려했다.

"고공농성 시작하면요, 제일 먼저 '가장 눈에 띄는' 장소를 찾습니다. 회사 생산량에 직접 타격 주는 장소가 아니고요. 그 의미는 고공농성자가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없다는 겁니다. 고공농성은 어디까지나 투쟁을 알리고 확대하기 위한 거점입니다. 지금 안타까운 건 현재 투쟁이 '김진숙' 개인의 영웅적 싸움인양 돼 있다는 겁니다.

한진 사태는 정리해고 문제입니다. 해고가 살인이라는 건 이제 사회적으로 관심 받는 이슈입니다. 노동계가 올인해도 문제될 일 없는 투쟁입니다. 노동계가 자본과 정말 한판 싸움을 하려면 그 거점은 부산이 되어야 합니다. 김진숙의, 한진이라는 한 사업장의 싸움이 아니라 전체 노동자의 투쟁으로, 모두가 집중하는 투쟁이 되었으면 합니다. " 

노동조합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해고를 당한 이재현씨는 지난 2003년 구 기아특수강 50m 굴뚝 위에서 복직과 비정규직법 철회를 요구하며 132일 동안 고공농성을 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땅을 보게 되더라고요. 저희 조합원들은 기본이고 밖에 연대 동지들이 있는지 없는지. 그렇게 내려다보면서 지낸 기간이, 모두들 함께 한다는 확신으로 버틴 시간이 그 132일인 거 같아요. 사실 기간은 문제가 아니에요. 요구하는 게 있어서 올라간 거니까 그 요구를 쟁취해서 내려올 수 있어야 하잖아요? 그런데 승리를 쟁취하는 건 올라가 있는 사람이 아니라, 함께 하는 사람들이더라고요. 한진 투쟁에 정말 모두가 함께 했으면 좋겠어요."

마지막 고공농성자가 당신이기를...

이날 박준성 교수는 1931년 최초의 고공농성자 강주룡을 소개하며 고공농성을 솟대에 비유했다.

"평원고무공장 여공 강주룡은 회사의 임금 삭감과 해고에 맞서 고공농성을 했고, 구속되고 단식투쟁을 하다 32살에 사망했습니다. 그렇게 될 정도로 투쟁한 진짜 이유는 뭘까요? 강주룡은 '우리뿐 아니라 평양에 있는 42개 공장 전체 노동자들의 임금 삭감 이유가 되기 때문입니다'라고 밝혔습니다. 김진숙 위원의 투쟁 역시 그렇습니다. 이 고공농성엔 솟대의 의미가 있는 거 같습니다. 절박하지만 희망을 전달하는 새와 같은 역할을 우리 사회에서 하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희망을 다시 절박하게 말하며 3차 희망버스는 부산으로 향한다. 7월 30일이다.


태그:#희망버스, #김진숙, #정리해고, #비정규직, #고공농성
댓글

노동자의 눈으로 본 세상, 그 속엔 새로운 미래가 담깁니다. 월간 <노동세상>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