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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펜던트>는 노르웨이 테러 용의자 브레이비크의 삶을 세밀하게 들여다봤다. 아래쪽 가운데가 어린 시절의 브레이비크다.
 <인디펜던트>는 노르웨이 테러 용의자 브레이비크의 삶을 세밀하게 들여다봤다. 아래쪽 가운데가 어린 시절의 브레이비크다.
ⓒ <인디펜던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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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명을 죽인 노르웨이 테러 용의자 안데르스 베링 브레이비크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사건 발생 후 브레이비크에 대한 이야기가 여기저기서 나왔지만 아직은 조각조각 흩어진 단편적인 정보 수준이다.

영국 언론 <인디펜던트>는 28일(현지 시각), 브레이비크의 삶을 조금 더 세밀하게 들여다보는 기사를 실었다. <인디펜던트>는 '브레이비크가 노르웨이 최악의 악몽을 저지르게 만든 것은 무엇인가'라는 제목의 이 기사에 브레이비크가 나고 자란 곳을 돌아본 내용과 그를 겪어본 사람들의 목소리를 담았다.

[유년기] 부모의 이혼, 그리고 의붓아버지에 대한 기억

이에 따르면, 브레이비크는 1979년 2월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직업 외교관이었고 어머니는 간호사였다. 브레이비크의 부모는 노동당 지지자였다. 브레이비크가 한 살 때 부모가 이혼했다. 그 후 브레이비크는 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브레이비크의 어머니는 파리와 런던의 노르웨이 대사관에서 일했다. 브레이비크는 아버지와 이따금 만났지만 그 만남도 15세 때 끝났다.

브레이비크의 어머니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이웃들은 "몸은 약하지만 사교적이고 방문객을 환영하는 여성이었다"고 기억했다. 또한 브레이비크의 어머니가 때때로 이방인들과 수다도 떨고 외국인에게 매혹됐다고 말했다.

브레이비크의 어머니는 노르웨이 육군 소령과 재혼했다. <인디펜던트>는 "브레이비크가 의붓아버지를 '좋은 사람'으로 간주한 것 같아 보이지만, (실제로는) '성적으로 자유분방한 노르웨이식 태도의 산물'이라며 은밀히 혐오한 것 같다"고 보도했다. 브레이비크는 "어머니를 성병에 감염시키고 이부(異父)누이 중 한 명에게 성병을 물려줬다"며 의붓아버지를 비난했다.

이와 관련, 브레이비크는 이른바 '선언문'에서 이렇게 밝혔다. "어머니와 누이는 나뿐만 아니라 그들 자신과 우리 가족을 부끄럽게 했다. (……) 페미니즘-성 혁명의 결과 파괴된 건 바로 가족이다." 또한 노르웨이의 자유주의와 성적으로 자유분방한 분위기가 자신에게 "너무 많은 자유"를 허용했고 "날 다소 여성스럽게 만들었다"고 밝혔다.

이 대목에서 <인디펜던트>는 "노르웨이 바깥의 몇몇 분석가들은 '브레이비크가 성적 부적응 감정을 깊이 느꼈다'는 이론을 제기하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이 분석가들은 성적 부적응 문제를 겪던 브레이비크가 남근을 상징하는 총 같은 무기의 도움을 받아 폭력을 행사하면서 잠재의식 속에서 보상을 추구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학창 시절] 파키스탄 이민자 가정 청소년들과 충돌하기도

브레이비크가 학창 시절에 산 곳은 노르웨이 수도 오슬로의 서부 구역인 스퀘옌이다. 이곳은 이민자들(오슬로 인구의 약 20퍼센트)이 모여 사는 퇴락한 동부 구역과 달리, 중상층이 거주하는 쾌적한 지역이다. 브레이비크는 젊은 전문직 종사자들에게 인기 있던 현대적인 주택 단지에 살면서 스퀘옌에 있는 학교를 다녔다.

브레이비크는 올해 초 이곳으로 돌아와, 병든 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브레이비크는 돈을 아끼고, "사명"(학살)을 준비할 "충분한 수단과 시간"을 마련하기 위해 돌아왔다고 선언문에서 밝혔다.

학생일 때 브레이비크는 이곳에서 평범한 노르웨이 아동으로 산 것 같다. 익명을 요구한 브레이비크의 한 학교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학교에서 브레이비크는 기민하면서도, 특별할 것 없는 소년이었다. 브레이비크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다녔다. 아웃사이더도 아니었고 뭔가 문제가 있는 것 같아 보이지도 않았다."

브레이비크가 주변 사람들의 관심을 끈 건 15세 때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때 브레이비크는 그래피티(메시지를 스프레이 물감으로 담벼락 등에 그림으로 표현하는 저항 문화) 집단에 합류하는 한편 파키스탄 이민자 가정의 청소년들과 충돌했다.

노르웨이 테러 용의자 브레이비크의 인생 궤적을 짚은 <인디펜던트>.
 노르웨이 테러 용의자 브레이비크의 인생 궤적을 짚은 <인디펜던트>.
ⓒ <인디펜던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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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 후] 9년에 걸친 범행 준비

학교를 졸업한 후 브레이비크는 짧게 군 복무를 했다. 이때 브레이비크는 외국인을 혐오하는 우익 정당인 진보당의 청년 조직에 가입했다. 브레이비크는 이 조직에 10년간 몸담았다가 "이 조직 역시 기득권층의 일부'라고 느끼고 발을 뺐다.

브레이비크는 전역 후 직업을 바꿔가며 이 일 저 일 한 것 같다. 브레이비크의 직장 생활에 대해 <인디펜던트>는 "컴퓨터 회사에서 일하기 시작해 고급 아파트에서 살 수 있을 정도의 돈을 번 것으로 보인다"면서도 "그러나 몇 년 동안 브레이비크가 임금이 적은 콜센터에서 일했다는 이야기도 있다"고 전했다.

그 후 9년에 걸쳐 범행을 준비하는 동안 브레이비크가 정확히 무엇을 하며 살았는지는 아직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2007년 브레이비크 계좌로 8만 유로(약 1억2000만 원) 상당의 돈이 들어왔고 그 덕분에 일하지 않고도 먹고살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한편 브레이비크에게 애인이라고 할 만한 존재가 있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던 것 같다.

[범행일] "너희들을 지켜주러 왔단다"... 탕! 탕! 탕!

운명의 날이던 7월 22일(현지 시각), 브레이비크는 폭스바겐 밴을 빌려 폭탄을 싣고 정부청사로 갔다. 청사 근처에 차를 세운 브레이비크는 1시간여 후에 터지도록 기폭 장치의 시간을 맞춰놓았다.

그러고 나서 택시를 타고, 노동당 청소년 캠프가 열리고 있던 우퇴위아 섬으로 향했다. 이때 브레이비크는 훔친 경찰 제복 차림이었다. 택시 기사는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억했다.

"수상쩍은 건 없었다. 브레이비크는 느긋한 경찰 같아 보였다. 그 사람은 내게 '지금 라디오에서 나오고 있는 오슬로 폭발 사건 때문에 안전 점검을 위해 가고 있다'고 말했다."

브레이비크는 선착장에서 우퇴위아 섬으로 향하는 연락선으로 갈아탔다. 이때 브레이비크는 살상 무기를 담은 커다란 여행 가방을 가지고 있었다. 가방을 옮겨준 연락선 근무자는 "정말 무거워서 조금 놀랐다"고 기억했다.

브레이비크는 우퇴위아 섬에 내린 후 청소년들을 불렀다. "너희들을 지켜주러 왔단다." 그리고 브레이비크의 총이 불을 뿜었다. 이날 브레이비크의 폭탄과 총탄의 표적이 된 건 모두 부모가 지지하던 노동당 관련 건물 및 행사였다.

<인디펜던트>는 브레이비크의 개인 생활과 성 생활 등에 관한 이러한 세세한 정보들이 범행 동기를 완벽하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학자들이 브레이비크의 뒤틀린 성격, 강박은 물론 행동 동기도 설명할 수 있는 증거가 될 수 있다고 밝혔다.

노르웨이 테러 용의자 브레이비크가 25일(현지 시각) 오슬로의 법원을 떠나고 있다.
 노르웨이 테러 용의자 브레이비크가 25일(현지 시각) 오슬로의 법원을 떠나고 있다.
ⓒ A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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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행 그 후] "브레이비크는 노르웨이의 모든 이점을 부여받았던 사람"

사건 발생 후, 브레이비크의 아버지는 "아들의 범죄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아들이 자살하는 게 나았을 것"이라며, 브레이비크를 다시는 보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노르웨이의 한 신문사 칼럼니스트는 "노르웨이 사람들은 브레이비크가 자신에게 관심이 집중되길 바란다는 것을 잘 알고 있고, 브레이비크가 원하는 것을 해주지 않겠다는 정서가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이 칼럼니스트는 브레이비크가 왜 지금과 같은 모습이 됐는지 노르웨이 사람들 스스로 물어야 한다며, "기억해야 할 것은 브레이비크가 노르웨이에서 누릴 수 있는 모든 이점을 부여받았던 사람이라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 칼럼니스트의 말처럼 노르웨이에서는 브레이비크라는 이름조차 입에 올리지 않으려는 분위기가 지배적인 것으로 전해진다. <인디펜던트>는 "25일 밤(현지 시각), 약 25만 명이 오슬로 중심가에서 희생자 가족에게 조의를 표하기 위한 가슴 아픈 시위를 했을 때도 브레이비크의 이름은 언급되지 않았다"고 전했다. 시위 참가자들이 브레이비크라는 이름 대신 "범인"이라고만 불렀다는 것이다.

또한 희생자를 추모하기 위해 노르웨이 국회의사당 바깥에 마련된 장미 카펫 사이에 있는 범행 규탄 플래카드에도 브레이비크라는 이름이 없다고 <인디펜던트>는 전했다. 이 플래카드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이 사람을 (감옥에) 21년 집어넣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이 남자가 자신이 한 일에 대해 비싼 대가를 치르게 할 것을 모든 정치인에게 요구한다. 여기 이 사람들(희생자들)의 목숨을 뺏은 사람을 영원히 (감옥에) 가둬야 마땅하다."

21년은 노르웨이에서 테러 행위를 저질렀을 때 받는 법정 최고형이다. 그러나 브레이비크에게는 너무나 가벼운 형벌이라는 비판이 일면서 노르웨이 당국은 테러 행위가 아니라 '인륜에 반하는 범죄'(최대 30년형) 혐의로 기소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태그:#노르웨이, #테러, #브레이비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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