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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산 훈련소의 훈련병들이 각개전투 훈련을 받고 있다(기사와 특정 관련이 없습니다).
 논산 훈련소의 훈련병들이 각개전투 훈련을 받고 있다(기사와 특정 관련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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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군대에 간다 하면 자동으로 논산훈련소로 간다고 떠올리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보다 훨씬 많은 병력이 일단 논산훈련소 수용연대에 집합했다 각 예비사로 흩어지거나 논산훈련소 연대로 배치돼 훈련을 받았다.

짧게는 4주에서 길게는 전·후반기 8주를 모두 논산에서 훈련받았는데 지금은 모르겠으나 당시에는 논산은 호텔이라 평할 정도로 시설이나 환경이 좋았다. 반면 예비사단이나 자대로 배치되어 훈련받는 경우에는 시설이나 환경도 열악하고 소위 말하는, 그 크기의 대부분을 폭력에 의존하는, 군기가 셌다.

그때는 논산훈련소로 입대하는 서울 병력을 한데 모아서 한양대 근처(아마도 왕십리역이 아니었을까?)에서 입영열차에 태워 한꺼번에 데려갔다. 필자도 먼저 군대에 간 가까운 친구 둘을 입영열차에 태워 영화처럼 배웅했다. 하지만 필자는 논산훈련소가 아니라 증평 37사단(일명 망통사단)으로 소집되어 갔는데, 논산훈련소로 입대하는 이들과 달리 각자 부대로 집결하는 형식이어서 영화 같은 배웅을 기대했던 필자로서는 싱겁기 짝이 없었다.

증평까지 따라오시겠다는 어머니를 거의 속이다시피 떼어놓고 혼자 부대 앞에 도착하니 혼자 어슬렁거리는 입대자는 나밖에 없었다. 다들 가족들과 함께 이런저런 걱정이나 격려들을 주고받고 있었고 모두들 부대 정문에서 일부러 조금 떨어져 그 거리만큼 겁먹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혼자 어슬렁거리자니 할 일도 없고 해서 정문 초병에게 다가가 지금 먼저 들어가도 되느냐고 물었더니, 참 별 놈을 다 보겠다는 듯이 웃기는 했지만 '시간 되면 정문 앞에 모여서 같이 들어간다'며 존댓말로 설명을 해주었다.

어마어마하게 높아 보이는 계급장을 붙인 군인에게 존댓말을 들었으니 속으로 군대도 별거 아닌가 보다 하는 생각에 공연히 다리를 떨며 돌아서는데 위병초소 옆을 돌아 조금 구석진 곳에서 한 쌍이 애처로운 이별극을 보여주고 있었다.

눈물 콧물 짜던 그 커플, '꼴값 떤다' 했더니

저런 애도 군대를 오나 싶을 정도로, 머리를 빡빡 민 남자는 호리호리한 체격보다 더 약해빠진 얼굴을 하고 있었고, 누나인지 연인인지 모를 여자는 연신 눈물을 찍어내며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있었다. 여자도 없었거니와 어머니가 따라왔으면 저랬으리라 생각하니 거짓말로 어머니를 서울역에 떼어놓고 온 스스로가 대견해서 공연히 우쭐해졌다.

근데 저 커플은 좀 심하다. '뭘 저리 서럽게 우나. 남자까지 울잖아? 진짜 꼴값들 하네' 하고 생각하는데 호각이 길게 울렸다.

"자, 모이세요."

난 또 뒤에서 어슬렁거리며 절대 앞으로 나가지 않았다. 그것은 입소 전 들은 선배의 충고 덕분이었다.

"야 인마 군대에서는 나서지도 말고 처지지도 말고 적당히 개겨야 돼. 나서면 일로 골병들고 처지면 매로 골병들어 인마 알았어?"

1978년의 대한민국 군대는, 박정희가 아무리 일본군 잔재가 아닌 현대적 유신군대라고 우겨대도, 몽둥이와 얼차려 그리고 공공연히 행해지는 고문으로 군기가 유지되던 군대였다. 군기 하면 당연히 '빠따'였고 군기교육대는 인권사각지대의 '폭력백화점'이었으며 사단 영창이라도 갈라치면 도무지 목숨 부지를 장담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정문 밖과 안은 삶과 죽음만큼이나 전혀 다른 세계였다. 필자가 정문 밖에서 어슬렁거릴때 말을 높였던 군인은 그 억지춘향 짓에 분풀이라도 하듯, 막사를 돌아 더 이상 정문이 보이지 않게 되자 욕설과 고함으로 우리를 다그쳤다.

"이 새끼들 지금 술래잡기 하나, 바지 내려!"

그때부터 그 사건이 날때까지 거의 기억하지 못한다. 어디를 뛰었던 것도 같고 좌로, 우로 굴러를 한 것도 같고 하여튼 어디서 옷을 갈아입고 어디서 저녁을 먹었는지 기억이 없다. 또렷이 기억나는 것은 그가, 여자와 눈물 떨구며 그 꼴값을 떨던 남자아이가 언제부턴가 내 옆을 따라다니고, 서 있고, 구르고 있었다는 것이며 같은 내무반, 그것도 바로 옆에 서 있었다는 것이다.

저녁 식사 후라고 기억된다. 밥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르게 먹고 우리는 내무반 침상 위에서 '삼선에 정열', '오선에 정열', '좌로 굴러', '우로 굴러'를 왜 하는지도 모르고 하고 있었다. 도대체 저 작대기 두 개는 왜 화가 나 있으며 어떻게 우리는 미리 배우지도 않았는데 삼선 오선을 정확히 자르고 있는 것일까 하고 생각하는데 갑자기 주위가 조용해졌다. 그 설쳐대던 일병이 경례하고 물러서는데 그야말로 칼같이 다림질한 군복이 멋지게 어울리는 높은 계급이 앞으로 나서는게 얼핏 보였다.

"이 새끼들 어디 병력이야! 야 애들 이 따구로밖에 못 다뤄?"

그는 군화발로 금방까지 우리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던 일병의 '쪼인트'를 깠다. 쇳소리 같은 목소리를 들으며 음습한 공포가 발바닥에서부터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그는 거침없이 침상으로 올라와 야전곡괭이 자루를 뽑아들었다.

"이 새끼들이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지금 술래잡기 하냐."

그는 우리에게 바지를 내릴 것을 명령했고 머뭇거리던 훈련병 하나는 그의 군홧발에 그야말로 침상에서 '날아갔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콘크리트 바닥에 통나무처럼 쓰러져버린 '샌님'

경찰서 의경 구타 장면. 2008년 자료사진.
 경찰서 의경 구타 장면. 2008년 자료사진.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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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별거 아냐. X나게 아플 거 같아도 지나면 다 그저 그래. 겁먹지 마."

선배의 말이 귓가를 맴돌았다. 에라 까짓 거 죽기밖에 더하랴. 바지를 내리고 흘끗 옆을 보는데 그 샌님같이 생긴, 여자하고 훌쩍거리던 애가 거의 사색이 되어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나도 공포심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지만 그 아이를 보니 오히려 위로를 해주고 싶은 지경이었다.

맞은편 침상 오른쪽부터 곡소리가 시작되었다. 동네 선배가 말하던 공포의 '물빠따'가 뭔가 했더니 작은 곡괭이 자루에 물을 묻혀 맨살을 때리는 것이었다. 한 대를 맞으면 바로 뒹굴어 또 때릴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겁에 질려 겨우 일어나 두 대를 맞고는 모두들 바닥을 뒹굴었다. 그걸 바로 눈앞에서 보려니 머리가 하얗게 질려오는 것이 느껴졌다.

'매도 빨리 맞는 게 낫다더니 바로 이걸 이르는 말이네.'

두 대씩 휘두르는 그의 곡괭이 자루와 단발마의 비명이 내 눈앞을 지나 맞은편 침상의 왼쪽 끝까지 갔을 때 바로 옆에서 사시나무 떨듯이 떨던 샌님이 이상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도 흘끗 옆눈으로 보니 신음 같기도 하고 추울 때 내는 소리같기도 한데 이빨이 딱딱 부딪히는 소리는 확실히 들렸다.

맞은편 줄을 끝내고 그 악마 같은 놈이 이쪽 침상으로 건너오는 게 보였고 나는 내 몸이 뒤로 기울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샌님이 앞으로 쓰러지고 있는 중이었다. 처음에는 아주 천천히 마치 통나무를 잘 세워놓았는데 균형이 조금 안 맞아 쓰러지는 것 같이, 앞으로 넘어지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죽었을까 살았을까... 그의 여자가 생각났다

그를 잡아야 한다는 생각은 그야말로 생각뿐,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가 없었다. 그는 차려자세로 굳어서 얼어붙은 채로 그대로 콘크리트 바닥에 입부터 박아버리고 말았다. 바닥에 부딪혀 충격을 받은 후 다시 머리를 맞은편 침상에 부딪치며 큰소리를 냈고 야전 곡괭이자루를 휘두르던 그 빌어먹을 놈과 기간병들이 몰려들었다.

얼어붙어 있던 나도 욕을 먹고서야 침상에서 내려서서 그를 눕히고 얼굴을 보았다. 눈동자는 흰자위만 보이고 입은 없어졌을 정도로 엉망이 되었는데 의식을 잃고 신음도 미동도 없었다. 바지를 제대로 올리지도 못하고 그를 들쳐업었다. 어디가 어딘지 오라는 대로 그를 업고 따라가며 나는 자꾸 그 가냘픈 어깨에 기대 울던 여자가 생각났다. 연인이었을까?

그 샌님을 어딘가에 내려놓고 내무반에 돌아오니 모두들 침상 끝에 차려자세를 하고 앉아 굳어 있고 기간병 하나가 턱을 괴고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앉아 있는 모습들을 보니 맞은 쪽과 안 맞은 쪽이 확연히 구별되었다. 건너편 침상쪽 훈병들은 엉덩이를 어정쩡하게 대고 앉아 아직도 가라앉지 않은 통증을 확연히 드러내고 있었고, 이쪽 침상은 희생자(?) 덕에 맞지 않았지만 여전히 얼굴에는 공포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같은 자세로 앉기 위해 자세를 잡는데 뭐가 앞으로 툭 떨어져서 보니 그 샌님의 부러진 이였다. 그러고 보니 윗도리 어깨 부분이 온통 피투성이였다. 어찌해야 할지 몰라 엉거주춤하게 있다가 이를 주머니에 넣고 앉았다. 모두들 나에게 그가 어떻게 되었는지 눈으로 묻고 있었지만 나는 눈을 감았다.

전·후반기 교육을 다 마치도록 끝내 그 샌님은 돌아오지 않았다. 아무도 우리에게 그가 어디로 갔는지 살았는지 죽었는지 이야기해주지 않았다. 단지 며칠 후 위관장교 하나가 우리에게 얼차려와 군기교육은 있었으나 폭행은 없었음을 상기시켰고 전반기 훈련이 끝날 즈음 사단본부에서 폭행에 대한 소원수리를 받아갔으나 나 역시 폭행당한 적이 없다고 적었다.

폭력에 저항하지 못했던 나 역시 '공범' 아닐까 

그 후에도 33개월간 군생활을 하면서 많이 맞았다. 어떤 때는 이유가 있었고 어느 때는 전혀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폭행에 많이 길들 무렵 이제 더는 안 맞아도 되고 오히려 때려도 좋을 위치가 됐지만 맹세코 하급자를 한 번도 때려본 적이 없다.

그것은 나 스스로 많이 맞으면서 폭력으로는 결코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한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폭력에의 유혹이 그 악마적 혀를 낼름거릴 때마다 내 옆에서 상처받은 짐승 같은 신음을 내며 하얗게 질려가던 그 아이의 그 어마어마했을 고통을 생각해내곤 했기 때문이다.

악마는 그리 멀리 있는 게 아니라고 생각했다. 바로 내 옆에 내 앞에 혹은 내 안에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곤 했다. 제대하는 날 나는 그의 이를 땅에 묻으며 그가 살아 있기를, 다시 그녀와 재회했기를, 이제는 추억으로만 그 고통을 기억하기를 빌었다.

지금까지 키우면서 한 번도 때린 적이 없는, 몇 달 후면 군대에 갈 아들에게 가끔 군대 이야기를 해준다. 그 어느 조직이든 예의와 규범은 필요한 것이며 군대야말로 그러한 규범과 예의의 표본 같은 조직이므로 늘 겸손하고 솔선수범하며 어려운 일을 먼저하라고 충고를 해준다.

그러나 부당한 폭력에는 과감하게 부딪혀 싸우라고도 가르친다. 내가 만약 그 물빠다를 맞던 시절에 맞지 않고 저항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지금 내 아들이 가는 군대가 지금보다 훨씬 더 나은 모습이 되지 않았을까. 지나고 보니 내가 저항하지 못하고 군대생활을 맞으며 보낸 것이, 나를 폭력을 방조하고 대물림하게 만든 공범으로 만들고 만 것은 아닐까 하고 지금도 가끔 생각한다.

덧붙이는 글 | 기사공모 '병영구타의 추억' 응모 글입니다.



태그:#군대, #폭력, #응모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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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는 것을 직업으로 삼고 싶었으나 꿈으로만 가지고 세월을 보냈다. 스스로 늘 치열하게 살았다고 생각해왔으나 그역시 요즘은 '글쎄'가 되었다. 그리 많이 남지 않은 것 같기는 해도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 많이 고민한다. 오마이에 글쓰기는 그 고민중의 하나가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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