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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백혈병 피해자 유가족 황상기씨와 정애정씨가 근로복지공단에서 쫓겨난 후 농성중인 물품이 밖으로 나와 있다. 사진 속 영정은 황상기씨의 딸 황유미씨.
 삼성백혈병 피해자 유가족 황상기씨와 정애정씨가 근로복지공단에서 쫓겨난 후 농성중인 물품이 밖으로 나와 있다. 사진 속 영정은 황상기씨의 딸 황유미씨.
ⓒ 오대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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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정말 병원이 싫어요. 제 남편이 병원에 9개월 누워 있다 죽었어요. 정말 싫어요."

한강성심병원 응급실에 누운 삼성백혈병 유가족 정애정씨가 링거 주사를 놓기 위해 온 간호사에게 말했다. 그녀는 주사를 놓지 않는 다른 한 손으로 눈가를 쓸어내렸다. 간호사도 그녀의 사연을 아는지 헛기침을 하고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

정씨가 구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온 시각은 14일 오전 0시 30분. 그 전 40여분 동안 그녀는 서울 영등포 근로복지공단 앞마당 주차장 한편에 쓰러져 있었다. 건물에 불이 모두 꺼지고 가로등도 흐릿한 어두운 주차장 아스팔트에 누워 그녀는 "너희는 사람도 아니야,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라고 울부짖었다.

13일 오후 9시 40분께 삼성백혈병 피해자 황민웅씨의 부인 정씨가 근로복지공단 밖으로 끌려 나왔다. 30~40명의 근로복지공단 직원들이 그녀의 사지를 붙잡고 건물 옆 쪽문 밖으로 밀어냈다. 삼성백혈병 피해자 황유미씨의 아버지 황상기씨도 함께 끌려 나왔다. 밖에는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지만 이들은 맨몸이었다.

유가족과 약속 하루 만에 뒤집은 근로복지공단

황상기씨가 근로복지공단 현관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다.
 황상기씨가 근로복지공단 현관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다.
ⓒ 오대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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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은 최근 <오마이뉴스>와 인터뷰를 한 바 있다. 재판에서 삼성백혈병 산재를 인정받은 황씨는 딸과의 약속을 지켜낸 아버지로(관련기사 : "삼성 10억으로 회유했지만, 딸과의 약속 지켰다"), 남편의 산재를 인정받지 못했지만 삼성과 싸움을 포기하지 않은 정씨는 삼성노조 건설을 위해 뛰는 활동가로 만났다.(관련기사 : "삼성 노동자들, 가족 잃고 후회하지 않기를...")

한 사람은 재판에 승소했고, 다른 한 사람은 그러지 못했지만 이들은 함께 근로복지공단에서 농성을 벌였다. 신영철 근로복지공단 이사장에게 일부 산재를 인정한 판결에 항소 하지 말 것을 요청하는 면담을 위해 지난 5일부터 농성이 시작됐다.

이틀 뒤(7일) 성사된 면담 자리에서 신 이사장은 "항소여부를 열린 마음으로 검토할 것"이라며 "전문가 그룹의 의견을 듣고 검찰과 협의해 항소여부를 결정하겠다"라고 말했다. 그 자리에서 유가족들은 피해자 측이 추천하는 전문가를 포함해 논의할 것과, 그 결과를 항소기한 하루 전인 14일에 면담을 통해 설명할 것을 요구했고, 양측은 이에 합의했다. 유가족들은 농성을 풀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상황은 단 하루 만에 바뀌었다. 면담 직후 근로복지공단 측은 유가족들에게 연락해 "검찰에서 항소하기로 했다"고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피해자들이 추천하는 전문가의 의견을 들어볼 기회조차 없었다. 유가족들은 항소여부를 미리 설명하겠다고 한 약속을 지킬 것을 요구하며 지난 13일부터 다시 농성을 시작했다.

직원들 유가족 향해 '미친X' 욕설

삼성백혈병 피해자 유가족 정애정씨가 근로복지공단 직원에 의해 넘어져 부상을 입고 병원으로 후송됐다.
 삼성백혈병 피해자 유가족 정애정씨가 근로복지공단 직원에 의해 넘어져 부상을 입고 병원으로 후송됐다.
ⓒ 최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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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씨와 정씨는 이날 오후 4시부터 이사장실이 있는 건물 5층 복도에서 면담을 요구하며 앉아있었다. 황씨에 따르면 근무시간이 끝난 오후 6시30분경부터 같은 층 총무실로 직원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황씨는 "처음에는 내일(14일) 우리랑 면담하는 걸 준비하려고 회의하러 모이는 걸로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때부터 현장에 와 있던 영등포경찰서 소속 정보과 형사가 황씨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이런 저런 사는 이야기, 인간적인 이야기들을 던졌다. 오후 9시가 넘자 총무실 안에 있던 직원들이 복도로 나왔다. 정보과 형사는 황씨에게 계속 말을 시켰다.

한 직원이 내려갈 것처럼 승강기를 세웠다. 그러자 갑자기 양쪽에서 수 십명의 근로복지공단 직원들이 두 사람에게 달려들었다. 강제로 승강기에 태워진 두 사람은 1층으로 내려왔고 가장 가까이 밖으로 통하는 문으로 밀려 나갔다. 황씨의 증언이다.

"팔다리가 다 들려서 밖으로 내동댕이 쳐졌다, 밖에는 비가 엄청 쏟아지고 있었는데 그대로 내몰았다. 끌려 나오는 과정에서 옆구리를 몇 대 맞기도 했다, 쫓겨난 우리를 보며 뭐가 좋다고 웃는지, 자기들끼리 웃고 떠드는 모습을 보니 화가 났다."

당시 이들을 지원하고 있던  '반도체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이하 반올림) 활동가들은 모두 건물 밖 농성장에 있었다. 소란스런 소리를 듣고 이들이 달려 왔을 때는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문이 모두 잠겼다. 정애정씨는 쏟아지는 비를 그대로 맞으며 건물 앞에서 2시간 가까이 쓰러져 오열했다.

비가 조금 그치고 그녀의 울음도 그쳐갈 때쯤, 두 사람을 밖으로 끌어냈던 한 무리의 직원들이 건물 밖으로 나왔다. 역할을 마친 사람들이 퇴근을 하는 것이다. 정씨는 20여 명 되는 남성들 무리 속으로 들어가 항의했다.

그 과정에서 충돌이 일어났고, 일부 직원들이 그녀를 밀치기도 했다. 그때 한 직원이 얼굴 부위를 가격했고, "미친 X"라는 욕설이 들렸다. 정씨가 "그래 나 미친 X다"라며 다시 다가가 따지자 그 직원이 이번에는 더욱 강하게 밀쳤다. 그대로 아스팔트 바닥에 꼬꾸라진 정씨는 허리와 골반에 부상을 입은 듯 일어나지 못하고 신음소리만 냈다.

이에 현장을 목격한 반올림 활동가들이 항의했으나 주변에 있던 직원들이 정씨를 밀친 직원을 둘러싸고 급하게 자리를 피했다. 기자가 현장을 방문했을 당시 막 떠나는 직원들과 반올림 활동가들의 실랑이가 이어지고 있었다. 욕설이 오가는 가운데, 직원들은 기자의 질문에 답을 하지 않고 사라졌다.

이후 정씨는 병원으로 후송됐고 황씨는 아직 건물 안에 남아 있는 직원들에게 항의하며 현관 앞에서 피켓을 들고 시위를 계속했다.

근로복지공단 답변 거부... 삼성, 근무환경 재조사 발표 예정

14일 새벽 삼성백혈병 피해자 유가족들이 농성 중인 근로복지공단에서 직원들에 의해 밖으로 쫓겨났다. 근로복지공단 측은 기자의 출입도 막은 채 아무런 설명을 하지 않고 있다. 기자의 질문을 피하는 직원의 모습
 14일 새벽 삼성백혈병 피해자 유가족들이 농성 중인 근로복지공단에서 직원들에 의해 밖으로 쫓겨났다. 근로복지공단 측은 기자의 출입도 막은 채 아무런 설명을 하지 않고 있다. 기자의 질문을 피하는 직원의 모습
ⓒ 오대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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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 함께 있던 김성환 삼성일반노조 위원장은 "지난 이사장 면담에서 항소여부를 전향적으로 검토하겠다고 해놓고 검찰 핑계를 대며 하루 만에 약속을 뒤집었다"라며 "천정배 민주당 의원이 위로 방문했을 때 확인한 결과 담당 검사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했다, 그러니 유가족들이 더 분노했고 근로복지공단이 삼성의 지시를 받아 항소하려는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근로복지공단의 의견은 들을 수 없었다. 기자도 출입이 통제된 건물 안으로 들어 갈 수 없었다. 안에는 그때까지도 수십 명의 직원이 남아 있었지만 누구도 취재에 응하지 않았다. 한 직원은 근로복지공단이 직원을 대거 동원해 삼성백혈병 유가족들의 농성을 강제 해산시킨 이유를 묻는 질문에 "근무시간이 지나 대답할 수 없다"고 답변을 거부했다.

한편, 지난달 23일 서울행정법원은 유가족들이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낸 소송에서 "일부 삼성노동자의 백혈병과 업무 사이에 인과관계가 인정된다"며 황유미씨와 이숙영씨의 산재를 인정했다. 정애정씨의 남편 황민웅씨를 포함해 다른 3명의 산재는 이날 인정받지 못했다. 근로복지공단은 패소한 2건을 포함해 모든 판결에 항소할 것으로 보인다.

14일 삼성은 항소기한으로 단 하루를 남겨 놓은 가운데 경기도 기흥 반도체 사업장에서 근무환경에 대한 재조사 결과를 발표할 예정이다.


태그:#삼성, #삼성백혈병, #반올림, #삼성반도체, #삼성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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