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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6월 26일 12시 36분 '탕'하는 총소리가 서울 종로구 평동 경교장 하늘을 갈랐다. 산도 울고 하늘도 울고 땅이 울었다. 누구 죽음이기에 하늘과 산과, 땅이 울었는가? 친일부역세력과 분단세력 하수인 육군 대위 안두희가 백범 김구 선생을 겨누어 암살했기 때문이다. 지난 26일이 백범 선생 서거 62주기였다. 하지만 아무도 기억하지 않았다.

 

독재자 이승만을 추앙하는 이명박 정권과 <조중동> 그리고 친일부역자 백선엽을 전쟁 영웅 반열에 올린 KBS는 그렇다 쳐도 한겨레·경향신문 기성 진보 언론과 오마이뉴스·프레시안·민중의 소리 등 인터넷 진보 언론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우연히 26일이 김구 선생 서거 62주기임을 알았다

 

한겨레·경향신문·오마이뉴스·프레시안·민중의 소리에 들어가 '김구'라는 단어로 검색을 해봤더니 서거 62주기를 직접 다룬 기사는 없었다. 어떤 경우 '김구라'로 검색된 경우도 있었다.

 

오마이뉴스 경우, 27일 <김정일과 이명박, 그들은 '한국전쟁'의 산물> 기사에서 "만일에 우리 동포들이 양극단의 길로만 돌진한다면 앞으로 남북의 동포는 국제적 압력과 도발로 인하여 본의 아니게 동족상잔의 비참한 내전이 발생할 위험이 없지 않으며..."라는 김구 선생 발언을 인용했다.

 

그리고 "이렇게 동족상잔의 위험을 경고한 김구는 1949년 6월 26일 피살됐고 그의 사후 정확히 1년째 되는 날 급기야 동족 간에 전면전이 발발했다."는 기사가 있었지만 제목이 보여주듯이 김일성과 이승만을 잇는 김정일과 이명박을 비교를 통해 한국전쟁이 얼마나 잔혹한 전쟁이었는지 분석한 것이지 김구 선생이 주 대상이 아니다.  

 

한나라당은  기대도 하지 않았지만 민주당을 비롯한 민노당, 진보신당도 김구 선생 서거 62주기 논평도 하지 않았다. 26일이 일요일라고 변명할 수 없는 있겠지만,민주당은 <'도청' 증거는 바로 한선교 의원> 제목 논평을, 민노당은 <반값등록금 실현, 최저임금 현실화> 보도자료를, 진보신당은 <진보신당 당대회 '진보진영 연석회의 합의문'인정, 최종승인 여부 8월 결정키로'> 브리핑을 했다. 하지만 어느 당도 김구 선생을 기억하는 논평이나 보도자료는 없었다.

 

KBS는 24~25일 이틀 동안 항일무장독립세력을 학살하는 것이 주 목적인 간도특설대 출신인 백선엽을 전쟁영웅으로 미화했다. 이를 두고 많은 이들이 분노했다. 하지만 그 분노는 백범 김구 선생 서거 62주년이 26일임을 기억해내지 못했다. 친일부역세력들은 자기들이 저지른 완악한 죄악을 감추기 위해 한국전쟁 당시 벌어였던 전투를 하나하나 반추하게 하였는 데 우리는 백범을 기억해내지 못했다, 아니 기억하지 않았다. 

 

백범 김구 선생이 누구냐 묻는다면 무엇이라고 답할 것인가? 내가 기억하는 백범 선생은 윤봉길 의사와 이봉창 의사를 통해 일본제국주를 향해 폭탄을 던지게 하고, 광복군 조직, 임시정부 주석, <백범일지>, 독재자 이승만 남한만의 단독정부 건립 비판, 1948년 4월 김일성을 만나기 위해 평양을 방문한 것을 우리는 기억하면서 그를 민족주의자로 추앙한다. 김구 선생은 1948년 2월 10일 단독정부 반대 성명을 낸다. 

 

"공산주의자나 어떤 주의를 가진 자를 불문하고 한 꺼풀 벗기면, 동일한 피와 언어와 조상과 도덕을 가진 조선민족이지 이색민족이 아니다. 어려운 시기에 처하여 동족과 친히 자리를 같이하여, 어떠한 외부의 음모와 모략이라도 우리의 나길 길을 찾이 아니하면 아니되겠다"(삼천만 동포에게 읍소함)

 

이런 그를 두고 2008년 5월 출간된 뉴라이트교과서포럼의 대안교과서는 백범 선생을 테러리스트로 규정했다. 뉴라이트 대안교과서를 지은 이영훈은 2008년 3월 26일 동아일보와 인터뷰에서 "김구는 독립운동에 족적을 남겼지만 '민족'만 주창했을 뿐 건국에 대한 비전은 없었다. 또 건국 이후의 과정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평가했고, 같은 인터뷰에서 이승만을 "세계정세에 대한 해석과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확고한 개념을 바탕으로 근대국민국가를 추구했다"고 평가했다.  

 

김구 선생을 테러리스트니, 건국에 대한 비전이 없닸다고 주장한 자들이 독재자 이승만을 추앙하고, 친일부역자를 전쟁 영웅으로 미화하는 데 힘쓰는 것을 보고 우리는 그들을 비판했지만 정작 백범이 간 그 날을 잊어버리고 지나 간 것이다. 그들을 비판만 했을 뿐, 정작 그들과 대척점에 섰던 백범은 반추하지 못했다. 백선엽을 추앙한 친일부역세력을 비판한 것으로 백범을 기억하지 못한 것을 대신할 수 없는 일로, 우리 자신을 향한 채찍이 필요하다.  

 

백범 선생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 확인할 수 있는 설문조사를 방증한다. 물론 1999년인 12년전 기사로 현실을 제대로 반영한 것은 아니지만 '20세기 한국의 정신사에 영향을 낀친 인물 10인' 중 1위였다. 그를 뽑은 이유는 이랬다.  

 

"사상가라기보다 정치지도자에 가까운 백범은 역사 속에서 민족자주를 위한 실천을 치열하게 전개한 점에서, 많은 응답자들로부터 한국 민족주의의 정화" (<한겨레21> '20세기 한국의 정신사에 영향을 낀친 인물 10인' 1999년 03월 25일 제250호) 

 

12년 전 평가라며 넘어갈 것인가? 하지만 1949년과 1999년, 그리고 2011년은 단절된 시간이 아니라 이어진 시간이다. 이를 잊어니 친일부역세력이 부끄러움도 모르고 나라를 구했다고 활개를 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을 비판하기 전 우리가 과연 민족과 민주주의를 위해 얼마나 위해 싸우고 있는지 반추해야 한다. 그래야 다시는 나라와 민주주의를 잃지 않는다.

 

김구 선생 국민장은 10일 동안 치렀는데, 경교장을 찾은 추모행렬만 6월 26일 서거 후 28일까지 사흘간 약 75만명이 종로구 평동의 빈소인 경교장을 찾았고 전체 추모객은 100만 명, 어떤 이들은 200만 명이 넘었을 것으로 주장하고 있다. 아래 사진은 1949년 7월 5일 치러진 김구 선생 국민장 행렬이다. 그 때 대한민국 인민은 목놓아 울었다. 

 

우리들은 다만 통곡할 뿐입니다. 울고, 다시 울고, 눈물밖에 아무 할 말도 없습니다.동포형제여 ! 가슴을 치며 통곡하십시요. 선생님에게 드릴 선물이 이것밖에 없습데까. 선생님 ! 선생님 ! 민족을 걱정하시던 선생님의 말씀을 저녁마다 듣자왔는데, 오늘 저녁부터는 뉘게 가서 이 말씀을 듣자오리까. 선생님 ! 선생님 ! 민족을 걱정하시던 선생님의 얼굴을 아침마다 뵈웠는데, 내일 아침부터는 어데 가서 그 얼굴을 뵈오리

 

까. 선생님은 가신대도 우리는 선생님을 붙들고 보내고 싶지 아니합니다.('선생님! 선생님!'-백범 김구선생기념사업회)

 

62년 전 인민들이 왜 통곡했고, 하늘이 울었는가? 백범이 남긴 족적이 무엇인지 알았고, 그것을 참을 수 없었던 친일부역세력들과 독재자들이 가만히 둘 수 없어 백범 암살할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물론 백범은 절대무오가 아니고, 그때처럼 똑 같이 통곡하라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그가 간 것을 기억은 해야 한다. 이명박 정권들어 백범보다는 이승만을 추앙하는 만큼이라도 기억해야 한다. 그들은 저토록 자신들이 저지른 민족반역과 독재를 숨기기 위해 '국민의 방송'인 KBS를 친일부역자와 독재자를 찬양하는 방송으로 만드는 일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데 우리는 무엇하는가. 우리는 백범을 기억 저편에서 지금 이곳으로 기억해내고 그의 부족한 점들은 후세대인 우리가 채워가면서 민족통일과 민주주의를 실현해야 할 것이다.

 

"소원이 무엇이냐?" 하고 하나님이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대한 독립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 다음 소원은 무엇이냐?" 하면, 나는 또

"우리나라의 독립이오" 할 것이요, 또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 하는 셋째번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를 높여서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백범일지>-'나의소원')

 

덧붙이는 글 | 다음 뷰에 실렸습니다


태그:#백범 김구, #62주기, #민족주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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