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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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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썰매를 타자'고 떠난 도보여행이었다. 강원도 인제군 기린면 방동리, 방태산 임도에서는 눈 쌓인 겨울이면 비료부대로 눈썰매를 탈 수 있다. 해서 겨울이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비료부대를 타고 씽씽 달려 보자고 떠난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눈썰매를 타지 못했다. 북풍한설이 몰아친다는 강원도 인제에 2월이 채 가기 전에 봄이 성큼 다가와 있었던 것이다. 방태산 임도가 온통 눈으로 뒤덮여 있어야 맞는데, 어찌된 게 군데군데 눈이 녹아 부드러운 땅이 드러나 있었으니, 비료부대를 깔 수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 길에서 이제 막 눈 뜨기 시작한 버들강아지까지 만났으니 무슨 말을 덧붙일 수 있으랴. 봄이 오는구나, 할 밖에.

지난 2월 26일, 1박 2일 일정으로 강원도 인제로 도보여행을 떠났다. 첫날은 방태산 임도를 걷고, 이튿날은 인제의 유명한 트레킹 길인 아침가리를 걸을 예정으로. 하지만 도보는 첫날밖에 하지 못했다. 일요일 아침, 인제에 비가 내렸기 때문이다. 강원도에 폭설이 내린다고 했는데 비라니,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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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적추적 내리는 겨울비를 맞으면서 9시간 이상을 걷는다'는 건 무리라는 결론을 내리고 철수했다. 겨울에 비를 맞고 흠뻑 젖는다는 건, 섶을 지고 불로 뛰어드는 거나 마찬가지. 감기에 걸려서 며칠간 몸져누울 작정이 아니라면 당연히 철수해야지. 도보여행 떠나서 비 때문에 철수하기는 처음이었다. 이번 도보여행은 도보모임 '숲길 도보여행' 회원들과 함께 했다.

26일 오전 7시. 천호역 앞에서 강원도 인제를 향해 출발. 인제군 기린면 방동리까지는 2시간 남짓 걸렸다. 예전에는 오지라 불렸던 곳이 이제는 서울에서 고작 2시간밖에 걸리지 않다니 여행을 다니면서 늘 감탄하게 된다. 도로가 그만큼 뻥뻥 뚫리고 있다는 것일 게다.

날씨 맑음, 바람 없음, 햇볕 따사로움. 여행하기 더없이 좋은 날이 아닐 수 없다. 일요일인 다음 날에는 전국적으로 비가 내릴 것이라는 일기예보가 있었다. 하지만 맑고 푸른 하늘을 보니 기상청의 일기예보가 빗나가 강원도 지역은 맑은 날씨가 지속될 것 같다. 기상청 일기예보가 빗나간 게 어디 한두 번이더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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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시가 조금 넘어 방동리 펜션에 도착. 무거운 짐을 일부 덜어놓고, 방태산 임도 입구로 직행. 38선 경계를 알려주는 표지석 앞에서 점봉산이며 곰배령을 먼발치로 눈요기를 한 뒤, 임도로 들어가 걷기 시작한다.

한 겨울에도 푸른빛을 잃지 않는다는 소나무를 올 겨울, 실컷 본다. 강릉, 인제, 영월 등등 어딜 가나 소나무가 지천이다. 눈밭 사이로 모습을 드러내는 소나무는 가끔 넋을 잃고 바라보게 하는 매력을 지녔다. 푸르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 품위 있는 자태라니, 옛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면서 시를 쏟아낸 심정이 이해가 된다.

그 소나무를 보면서 걷기 시작하는 길의 초입은 눈이다. 10cm 이상은 족히 될 것 같은 눈이 쌓인 길에는 자동차 바퀴 자국이 선명하게 나 있었다. 눈 덮인 길을 사람은 안 지나가도 자동차는 지나갔다는 건데, 누구일까? 눈이 쌓인 길을 자동차를 몰고 지나간 사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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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 바퀴 자국을 따라 걷는다. 그래야 쉽게 걸을 수 있기 때문이다. 끝없이 이어질 것 같던 눈길이 삼십 분쯤 걷자 툭 끊어졌다. 부드럽고 폭신한 땅이 드러난 것이다. 그 뿐인가. 길옆에서 버들강아지를 발견. 순간 고개를 갸웃거린다. 여기가, 강원도가 맞나?

지난해는 봄이 더디게 왔더랬다. 강원도에는 4월까지 한파가 몰아쳐 냉해가 심했다고 했다. 한데 올해는 봄이 빨리 오려는 참인가? 벌써부터 버들강아지가, 그것도 강원도 인제에서 모습을 드러내다니. 참으로 신기할 따름이다.

양지바른 길은 눈이 녹아 땅이 확실하게 드러났지만 응달진 곳은 여전히 눈이 쌓여 있었다. 눈길과 흙길을 번갈아 걷는 길에서 땅의 숨결을 타고 올라오는 봄이 느껴진다. 어깨 위로, 머리 위로 쏟아지는 햇볕은 왜 그리 따사로운지, 이마에 땀방울이 맺히더니 볼을 타고 주르르 흘러내린다. 땀을 흘리면서 걷는 기분이 어찌나 상쾌한지 날아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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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길은 폭신했다.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탄력이 튀어난 스프링을 밟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였다. 흙길이 이렇게나 부드러웠던가? 한동안 눈길만 걸었더니, 흙길을 밟는 느낌을 잊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내딛는 걸음이 한없이 가볍다. 언제까지나 이런 길만 이어진다면 몇날 며칠을 걸어도 지치지 않을 것 같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눈길이 다시 나타난다. 자동차조차 지나가지 않은 눈길에 자국이 남아 있다. 사람의 발자국은 아니다. 작은 동그라미 같은 자국 옆에 조금 큰 둥근 자국. 작은 자국은 고라니의 발자국이요, 큰 것은 멧돼지 발자국이란다. 눈 덮인 길을 겅중거리면서 달려갔을 고라니의 모습이 떠오른다.

이따금 산길을 걷다보면 먼발치에서 고라니를 보기도 한다. 이 녀석은 멀리서도 사람의 기척을 알아채고 아주 날쌔게 달아나기 일쑤다. 겁이 많은 녀석들이라서 그럴 게다. 멧돼지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그저 지나간 발자국만 보았을 뿐. 하긴 멧돼지와 맞닥뜨리는 건 재앙일 것이다. 그러니 가급적이면 서로 만나지 않고 비껴가야겠지.

그런데 고라니나 멧돼지는 사람의 발자국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할까? 다시는 이 길로 다니지 말아야지, 하는 건 아닐지. 그들 역시 사람과 절대로 마주치지 말아야지, 다짐을 하는 건 아닐까. 사람과 만나서 좋을 건 하나도 없을 테니까. 그래도 나 같이 걷기만 하는 사람을 만나는 건 괜찮지 않을까? 그냥 고라니 봤다, 멧돼지 구경했다, 하고 말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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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든 자동차든 지나간 흔적이 없는 눈길을 걷는 건, 고역이다. 발이 푹푹 빠지는 건 괜찮은데 눈을 헤치고 걷자니 힘이 두 배 이상 들기 때문이다. 그래도 스패츠나 아이젠을 하지 않고도 걸을 수 있어 좋다.

구불거리는 산길을 걷다가 문득 걸음을 멈추고 길옆으로 펼쳐진 능선을 보고 있자니 저절로 감탄이 터져 나온다. 완만한 능선에는 나무들이 빽빽하게 자라고 있고, 그 아래는 하얀 눈으로 덮여 있다. 능선 위에는 푸른 하늘에 새털구름이 잔잔하게 뿌려져 있다.

이 길, 적막을 느끼기 위해 핸드폰을 잠시 꺼두지 않아도 통화가 되지 않는다. 산허리를 감돌면서 이어지는 길은 생각보다 깊은 산속에 자리를 잡고 있는가 보다. 어지간한 산에서도 핸드폰 통화를 할 수 있는데, 역시 강원도구나, 싶어진다.

이날 걸음 임도의 거리의 18km. 임도 중간에는 식당이나 휴게소가 없기 때문에 점심은 미리 준비해야 한다. 아니면 굶으면서 걷든지. 우리 일행 11명 외에는 아무도 없는 길 위에 돗자리를 깔고 점심을 펼쳐 놓는다.

이른 새벽에 출발하는데도 어찌 그리 도시락을 알차게 준비해왔는지, 감탄한다. 나, 집 근처 분식집에서 김밥 달랑 두 줄 사들고 왔는데 말이다. 그 김밥,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면서 먹지 않아서 다시 배낭에 집어넣어야 했다. 나중에 간식으로 처치했지만. 어쩐지 살까 말까 망설여지더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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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녹은 기세로 보아 이번이 마지막 눈길도보가 되는 것은 아닌지, 싶다. 이튿날 아침가리 트레킹을 했더라면 눈길을 더 많이 걸었을지 모르겠지만, 비 때문에 걷지 못해 아쉬웠다.

아침가리는 지난해 2월 중순에도 걸었다. 그때, 길 중간에 다리가 끊어져 신발에 양말까지 벗고 맨발로 계곡물을 건넜다. 신발을 신은 채 건넜다가는 신발이며 양말까지 죄다 젖을 게 분명하니, 어쩔 수 없이 맨발로 건너야 했던 것이다. 찬물에 그것도 얼음이 둥둥 떠다니는 계곡물에 발을 담그니 수백 개의 바늘이 찔러대는 것처럼 아팠다. 으으윽, 저절로 비명이 터져 나올 지경이었으니까. 이번에도 그런 경험을 하나, 했더니 기대를 접고 돌아 나와야 했다.

아침가리는 예전에는 오지 중의 오지였으나, 이제는 누구나 찾아가 걸을 수 있는 트레킹 코스가 되었다. 이 길, 여름에는 계곡을 따라 걸으면 좋다. 계곡물에 몸을 담근 채 걸어야 하는 구간이 많으니, 그 점을 감안하고 미리 준비를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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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가리골에서 캐녀닝을 하다
아침가리골, 맨발로 얼음계곡을 건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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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도보여행, #강원도, #인제 , #방태산 , #아침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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