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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곡을 건너고 있습니다.
 계곡을 건너고 있습니다.
ⓒ 유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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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곡에는 올챙이들이 우글거렸습니다. 여기도 꼬물거리는 올챙이들, 저기도 무리지어 헤엄치는 올챙이들. 이 많은 올챙이들이 죄다 살아남아 개구리가 된다면 아침가리 계곡은 개구리로 뒤덮일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없겠지요. 개구리의 천적들이 개구리들을 그냥 놔둘 리가 없을 테니까요.

아침가리 계곡에 다녀왔습니다. 아침가리는 강원도 인제군 기린면에 있는데 정말 좋다, 는 말 외에는 다른 수식어를 붙일 수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깊고 깊은 두메산골에 자리 잡은 아침가리는 숲이 우거져 볕이 드는 아침 나절에만 밭을 갈 수 있어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고 하네요.

하지만 직접 가 보니 사실과 달랐습니다. 숲이 우거지긴 했으나, 볕은 해가 질 때까지 계곡 전체를 골고루 비춰주었답니다. 아침가리골은 조경동이라고도 불립니다. 아침가리를 한자어로 표기한 것이지요. 아침 조(朝), 밭갈 경(耕), 골 동(洞)). 조경동 보다는 아침가리가 훨씬 운치가 있네요.

지난 21일, 강원도 홍천군 내면 월둔리에서 월둔고개를 넘어 폐교가 된 조경분교를 지나 진동리까지 약 26km를 걸었습니다. 아침가리 계곡 길은 8km 정도라고 합니다. 숲이 우거진 산길을 걷는 것도 즐거웠지만 계곡 속으로 들어가 차가운 물의 감촉을 느끼면서 걷는 재미, 아주 좋았습니다. 이렇게 계곡으로 들어가 걷는 것을 '캐녀닝'이라고 한다네요.

이번 도보여행도 '인생길 따라 도보여행(인도행)' 회원들과 함께 했습니다. 이들이 있어 인적이 드문 두메산골이 두렵지 않았습니다.

아침에만 밭을 갈 수 있다는 아침가리에 가다

걷기 좋은 길이 펼쳐져 있습니다.
 걷기 좋은 길이 펼쳐져 있습니다.
ⓒ 유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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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출발해 홍천군 내면 월둔리에 도착한 시간은 11시. 출발지부터 도착지까지 화장실이 전혀 없답니다. 이런 경우, 여자들은 참으로 난감합니다. 하지만 이런 구간들을 걸어보니 어떻게든 해결이 되더군요. 하다못해 문짝이 없는 화장실이라도 등장을 해주니까요. 그래도 미리 준비를 단단히 하고 가는 게 좋겠지요?

자, 드디어 월둔교를 건너 아침가리를 향해 출발합니다. 아침가리 계곡까지 가려면 18km를 걸어야 합니다. 이 길, 죄다 비포장입니다. 잘 다듬어진 흙길도 아닙니다. 여름에 비가 많이 내리면 길이 떠내려가 사라져 버리기도 한답니다. 그래도 걷기에는 전혀 무리가 없는 '좋은' 길이었습니다.

멀리 보이는 산 능선이 여러 겹입니다. 골이 깊기는 깊은 모양입니다. 하늘이 약간 흐립니다. 장마라고 하지만 비가 내리지 않는다는 일기예보가 있었답니다. 하지만 혹시 몰라서 1회용 비옷을 준비했습니다. 우산도 하나 배낭에 찔러 넣었지요.

이랑이 길게 파인 밭이 죽 이어져 있습니다. 검은 비닐을 길게 덮어 놓았습니다. 부지런한 농부의 손길이 닿았기 때문이겠지요.

옥수수 밭 뒤로 빛바랜 주황색 양철 지붕집이 보입니다. 밭을 지나고, 또 밭을 지납니다.

삼십 분 남짓 걸으니 표지판이 보입니다. 입산통제기간을 알리고 있습니다. 봄철은 2월 1일부터 5월 15일까지, 가을철은 11월 1일부터 12월 15일까지랍니다. 표지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산불감시초소가 있습니다. 긴 쇠막대가 길을 가로 막고 있습니다.

초소 옆에 한 사람이 서 있습니다.

"여기서 일 하시는 분이신가 봐요?"

제가 초소를 가리키며 묻자 그 분, 맞는답니다.

"산불과 상관없이 못 들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한두 분이 들어가시나 했더니 아주 많이 들어가셔서 나와 봤어요."
"어머나, 그럼 우리가 불법을 저지르고 있는 거네요?"
"네, 그런 거지요."
"아, 그렇군요. 그럼, 조심해서 잘 다녀오겠습니다."
"네, 조심해서 잘 다녀오세요."

어째 선문답을 하고 난 기분입니다.

산불감시원과 선문답을 하다

배기가스를 내뿜고 있는 트럭
 배기가스를 내뿜고 있는 트럭
ⓒ 유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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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게 부순 돌이 길에 깔려 있습니다. 발바닥에 돌의 감촉이 느껴집니다. 길옆으로 계곡이 보였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합니다. 계곡의 물은 얼굴이 비칠 정도로 맑습니다.

이 길에서 방귀를 뀌듯 배기가스를 뿜어내는 소형 트럭 한 대를 만났습니다. 트럭은 몸체를 출렁이면서 천천히 앞으로 나아갑니다. 배기가스, 쉬지 않고 뿜어져 나옵니다. 배기가스가 코를 통해 폐 속으로 서서히 스며듭니다. 독가스가 따로 없습니다. 숨이 콱 막히고 어지러워지는 것 같아 얼른 숨을 멈추고 빠르게 걸음을 옮깁니다.

산악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대략 스무 명은 되는 것 같습니다. 젊은 언니들도 몇 명 있습니다. 이 언니들, 울퉁불퉁한 길을 잘도 달려갑니다. 길을 걷던 사람들이 길 옆으로 비켜주고 자전거가 지나가는 것을 지켜봅니다. 박수를 쳐주고, 잘 타라고 응원도 합니다.

걷는 길 곳곳에 흙탕물 웅덩이가 있습니다. 내린 비가 고인 것이겠지요. 장마인데도 강원도에는 비가 많이 내리지 않았습니다. 다행입니다. 비가 많이 내려 계곡물이 불었다면 캐녀닝을 할 수 없었을 테니까요.

길 한쪽이 무너져 있습니다. 여름에 큰 비가 내리면 길이 없어지기도 한답니다. 험하지 않고 걷기 좋은 길이 이어집니다. 오르막길이 어쩌다 나오지만 가파르지도, 험하지도 않습니다. 숲에서 은은한 향기가 흘러나옵니다. 참 좋다, 감탄사가 저절로 나옵니다.

폐교가 된 조경분교 내부
 폐교가 된 조경분교 내부
ⓒ 유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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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새벽에 일어나 아침식사를 해서 깊은 시장기가 느껴집니다. 계곡 한쪽에 모여앉아 준비해온 도시락을 먹습니다. 아, 그런데 밥을 먹으려고 자리를 잡으니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합니다. 이런, 비가 안 온다더니 그게 아닌 모양입니다. 때도 잘 맞추네요. 이렇게 시작된 비가 캐녀닝이 끝날 때까지 내렸습니다.

다행인 것은 밥을 다 먹을 때까지 빗줄기가 굵어지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준비해간 비옷을 꺼내 입었습니다. 비가 많이 내리지 않아야 할 텐데, 은근히 걱정이 됩니다. 비가 많이 오면 캐녀닝을 포기해야 할지도 모르니까요.

허름한 건물 하나가 보입니다. 건물 옆으로 여러 개의 텐트가 쳐져 있습니다. 여기가 어딘고? 가까이 가니 학교 건물이 보입니다. 방동초등학교 조경분교입니다. 폐교 옆에 텐트를 친 사람들은 '솔로다음카페' 회원들입니다. 이들에게서 '솔로'들의 여유가 넘쳐납니다.

이 곳에 문짝이 떨어진 화장실이 하나 있습니다. 한 사람이 보초를 서고, 한 사람은 볼 일을 봅니다. 이런 경험, 쉽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요.

폐교 안이 궁금해 미닫이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갑니다. 묵은 먼지 냄새가 납니다. 교실 한가운데에 난로가 하나 놓여 있고, 그 옆에 의자가 있습니다. 한쪽 벽에는 만화책이 잔뜩 꽂힌 책장이 있습니다. 먼지가 잔뜩 덮여 있는 것을 보니 사람의 손길이 머문 지 아주 오래된 것 같습니다.

폐교된 조경분교의 문짝 떨어진 화장실

'인도행' 회원인 토굴님과 참이슬1004님.
 '인도행' 회원인 토굴님과 참이슬1004님.
ⓒ 유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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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다보니 멀리 깃발 하나가 보입니다. 태극기라는데 멀리서 보니 깃발일 따름입니다. 집 한 채가 보입니다. 검은 개 한 마리가 어슬렁거리면서 돌아다닙니다. 이 녀석, 사람들을 보더니 슬금슬금 뒤로 물러납니다. 한참을 그렇게 물러나던 녀석, 자리를 잡고 앉아 여유로운 표정으로 사람들을 바라봅니다. 이 녀석, 사람을 경계하지 않는지 깽 소리 한 마디 내지 않습니다.

조경동교가 보입니다. 이제부터 계곡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캐녀닝에 대비해서 스포츠 샌들을 가져왔는데 캐녀닝 경험자가 그냥 등산화를 신고 들어가라고 조언을 합니다. 계곡 바닥의 돌이 미끄럽기 때문에 자칫하면 넘어질 수 있다는 거지요. 계곡만 걷는 것이 아니라 계곡 옆의 숲길도 걸어야 하고, 돌길도 걸어야 하는데 등산화가 가장 안전하다는 겁니다. 이런 경우 경험자의 조언에 따르는 것이 가장 현명하겠지요?

이 때가 오후 4시. 이후 네 시간 동안 계곡 길을 걸었습니다. 계곡을 가로 질러 건너기도 하고, 계곡 옆의 사람의 흔적이 드문 길을 걷기도 하고, 산길을 올라가기도 했습니다. 계곡 물은 발목을 적시기도 하고, 무릎과 허벅지를 푹 젖게도 했습니다. 물살이 빠른 곳에서는 몸이 휘청거리기도 했고, 물 속에 잠긴 채 이끼가 낀 돌은 디딘 발을 미끄러지게 했습니다.

계곡물에는 올챙이들이 우글거렸습니다. 다른 물고기들도 있었을 텐데 올챙이들이 너무 많다보니 보이지 않더군요. 게다가 계곡을 건너는 게 생각만큼 쉽지 않아 다른 것을 돌아볼 만한 여유가 없었습니다. 얕은 줄 알고 발을 내디뎠는데 푹 빠지기도 했고, 몇 번은 물 속으로 완전히 빠질 뻔 했습니다. 물 속에서 넘어진 사람들도 있었지요.

계곡 물 속에서 하얀 뼈가 보였습니다. 동물의 형태를 고스란히 갖췄더군요. 산짐승이 죽어서 물 속에 가라앉았던 모양입니다. 저렇게 뼈만 하얗게 남으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할까?

아침가리 계곡
 아침가리 계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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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다보니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걸렸습니다. 거기다 길을 잘못 들어 산길을 따라 올라갔다가 "이 길이 아니라네" 하면서 다시 내려오기도 했지요. 사람의 발길이 드문 곳이라 길이 확실하게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말이 쉬워서 올라간 길 다시 내려오기지, 그거 힘 빠지는 짓이지요. 하지만 아주 오래 남는 추억이 된답니다.

저녁 7시가 넘어 조금씩 어두워지기 시작합니다. 산에는 어둠이 빨리 찾아온다지요. 일행이 혹시나 싶어 랜턴을 점검합니다. 어둠이 내리면 랜턴 빛에 의지해서 걸어야 할 테니까요.

한 20여 년 전에 설악산에 갔을 때, 미처 다 내려오기 전에 어두워졌던 적이 있습니다. 길을 안내한 분들은 전문산악인이었지요. 그런데, 이 분들도 산에서 길을 잃더라구요. 그래서 하산길이 늦어졌지요. 그래도 이 분들의 대처는 전문가다웠습니다. 자일을 타고 내려온 기억이 또렷하게 남아 있습니다.

진동리의 산채비빔밥집 앞에 도착한 시간은 저녁 8시 10분입니다. 어둠이 조금씩 더 깊어졌지만 그래도 아주 깜깜해지기 전에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 이렇게 이 날의 도보여행은 마무리되었습니다.

이 날 걸은 거리는 26km 남짓. 걸린 시간은 9시간입니다. 캐녀닝 구간은 8km였다고 합니다.


태그:#도보여행, #아침가리, #진동계곡, #캐녀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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