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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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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남 버스터미널부터 버스가 설설 기었다. 지난밤에 내려 쌓인 눈 때문이었다. 강원도 영동지방에는 폭설이라는 말로도 감당하기 어려운 눈 폭탄이 쏟아진 다음 날인 지난 2월 12일, 강원도 인제 수산리 응봉산의 자작나무 숲길을 걸으러 떠난 참이었다.

이날 도보여행은 도보모임 '숲길 도보여행' 회원들과 함께 했다.

서울을 벗어나 강원도 초입으로 들어서니 세상은 온통 눈 천지였다. 강원도 어디는 1미터가 넘게 왔대, 하는 말이 들려왔다. 그건 사실이었다. 눈, 정말이지 엄청나게 내렸다.

이날, 우리는 수산리에서 출발해 자작나무 숲길을 걸은 뒤, 임도를 따라 걷다가 어론 마을로 빠져나올 예정이었다. 한데 전날 밤 내린 눈 때문에 시작부터 계획이 삐걱거렸다. 출발지에서 우리 일행을 내려준 버스기사가 어론 마을로 가서 우리를 기다려야 하는데, 그렇게 못하겠다고 한 것이다. 혼자만 버스를 몰고 눈 덮인 도로를 달릴 자신이 없다고 했단다.

수산리 마을회관
 수산리 마을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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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수산리에서 출발해 숲길을 걸은 뒤 중간 지점에서 돌아 나와 원점회귀를 하는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결국 우리는 수산리에서 자작나무 숲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수산리 마을회관 앞에서 만난 할머니들 때문이었다. 이분들, 눈을 쓸고 계셨다.

처음에는 눈이 너무 많이 와서 못 간다는 줄 알았더니, 구제역 때문이란다. 자작나무 숲길로 가는 길에 축사가 많아서 외부인의 통행을 금한다는 것이다. 이런 경우, 두 말 않고 돌아 나와야 한다.

그렇다고 인제까지 와서 아무 짓(?)도 못하고 도로 돌아갈 수야 없지 않나. 다행히 어론 마을은 출입을 금하지 않는다고 하니, 그쪽으로 가서 임도를 걷고 싶은 만큼 걷고 돌아 나오자는 결론을 내렸다.

어론 마을 입구에 도착한 시간은 오전 11시경. 서울에서 오전 8시 20분에 출발했으니, 2시간 40분쯤 걸린 셈이다. 마을은 온통 눈으로 덮여 있었다. 적당히 내린 눈은 아름다운 풍경이 되지만 감당할 수 없는 수준으로 내린 눈은 재앙이 된다. 이번에 강원도에 내린 눈이 그랬다.

어론 마을 입구
 어론 마을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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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제에는 눈이 그리 많이 내린 편이 아니라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돌아 나왔을지도 모르겠다. 마을길을 지나 '어론 임도' 입구로 들어섰다. 길은 온통 눈으로 덮여 있었다. 어느 사이에 자동차가 지나갔는지 길 위에 자동차 바퀴자국이 길게 남아 있다.

그 길을 걸었다. 발이 푹푹 빠진다. 하필이면 이날, 늘 배낭 안에 넣어두었던 스패츠를 빼놓고 왔다. 겨울이 슬슬 저물어간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늘 갖고는 다니지만 거의 쓴 적이 없기에 이제는 없어도 되겠지, 했던 것인데 너무 성급한 판단이었다. 정작 필요할 때는 빼놓고 왔으니. 하는 수 없지. 그냥 버텨야지.

대신 상어 이빨처럼 날카로운 톱니를 가진 아이젠을 등산화 위에 신었다. 한데 이 아이젠이 영 불편했다. 눈길에서 미끄러지지 않게 해주는 건 고마운데 아이젠 밑으로 눈이 뭉쳐진 채 달라붙었다가 떨어지기를 반복해 어떤 때는 하이힐을 신은 느낌이 들다가 어떤 때는 높은 굽이 달린 것처럼 뒤뚱거리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결국 아이젠을 빼버리고 말았다. 발이 가벼워지긴 했지만, 자꾸 발이 미끄러지는 것은 막을 수 없어 몇 번이나 넘어질 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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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도보모임 '숲길 도보여행' 회원들은 재미있는 행사를 준비했다. 회원들의 도보여행의 무사·안녕을 기원하는 '기원제'를 지내기로 한 것이다. 그렇다고 거창하게 종교적인 의미를 부여한 것은 아니다. 즐겁고 행복하고 그리고 건강하게 걸을 수 있기를 한 마음이 되어 기원한 것이라고 보면 된다. 그래서 행사는 격식을 갖추되 격식을 파괴(?)하는 형식으로 간소하게 진행되었다.

'제'를 지낼 때 가장 필요한 것은? 당연히 돼지 머리. 그래서 도보여행을 떠나기 전에 '머리 고기'를 먹을 수 있겠거니, 잔뜩 기대를 했는데 한 점도 못 먹었다. 돼지가 도저히 칼을 댈 수 없는 상태라서, 말이다. 구제역 때문에 이런 돼지(?)를 준비했단다. 참내, 이런 돼지로 제를 지내는 건 또 처음이네.

하긴 마음이 중요하지, 돼지 머리가 중요하겠어.

"돼지님, 언제 어디서나 늘 무사히, 안전하게 걸을 수 있게 늘 보살펴 주세요."

눈을 동그랗게 뜬 돼지. 언제 어디서나 무사히, 안전하게 걷게 해주소서.
 눈을 동그랗게 뜬 돼지. 언제 어디서나 무사히, 안전하게 걷게 해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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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종의 퍼포먼스 같은 기원제를 지낸 뒤, 그 자리에서 이른 점심식사를 했다. 점심식사는 야외에서 하는 것 치고는 상당히 푸짐했다. 중국음식점을 운영하는 회원이 얼큰하면서 개운하고 감칠맛이 나는 짬뽕 국물과 '짜장' 소스를 준비해 온 것이다. 퍼질러 앉아서 숟가락질에 여념이 없는 내게 회원들이 외쳤다.

"사진 찍어. 기자가 뭐하는 거여, 사진을 찍어야지."

짬뽕 국물과 건더기. 이런 맛, 처음이야.
 짬뽕 국물과 건더기. 이런 맛, 처음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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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밥 먹을 때는 사진 안 찍거든요. 방해하지 말고 말 시키지 마세요. 이래서 음식 사진은 몇 장 찍지 못했다는 얘기다. 이런 식탐 덕분에 요즘 내 뱃살은 점점 더 두둑해지고 있는 중이다.

어론 임도는 완만한 오르막길이 이어지고 있었다. 눈이 덮인 길은 걷기 쉽지 않다. 평소보다 두 배는 힘이 들어간다고 보면 맞는다. 그래도 눈을 헤치면서 걷는 게 아니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이따금 눈이 덮였던 도로가 사람들의 발자국 때문에 드러나곤 했는데, 그 길은 얇은 얼음으로 덮여 있었다. 얼어붙은 도로 위에 눈이 쌓인 것이다.

눈은 길 위에만 쌓이지 않았다. 임도를 따라 길게 늘어선 나무 위에도 눈은 내려앉아 있었다. 가끔 바람이 불어 나무 위에 쌓인 눈이 흩날렸고, 무게를 견디지 못한 눈 무더기가 쏟아져 내리면서 우리를 덮치기도 했다.

나무껍질이 하얀 자작나무가 군락을 이룬 숲길을 걷지 못하는 대신 눈 덮인 산길을 걷고 있지만 전혀 실망스럽지 않았다. 오히려 아름답다는 감탄을 연발했다. 눈이 살포시 덮인 나무들은 죄다 눈꽃이 화사하게 피어난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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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은 굽이치는 강처럼 산허리를 둘러가면서 이어졌다. 걷다가 이따금 걸음을 멈추면 눈 덮인 완만한 능선들이 연달아 모습을 드러냈다. 먼 곳의 봉우리들은 눈바람 때문에 자태가 흐릿해져 신비롭기까지하다. 숨이 막힐 것처럼 아름다운 산이었고, 나무였고, 눈이었다.

겨울산은, 겨울 임도는 황량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눈 때문이다. 벌거벗은 앙상한 가지를 눈은 한 가지 색만으로 충분히 아름답게 장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세상의 그 무엇이 자연의 아름다움을 따라갈 수 있을까. 자연은 자연 그대로일 때 가장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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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번이나 산허리를 감돌았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저만치까지만 가면 길이 끝나겠지, 했지만 막상 그곳에 닿아보면 길은 다시 이어지고 있었다. 걸을 수 있다는 것, 눈 속에 발을 파묻을 수 있다는 것은 새로운 기쁨이었다. 거기에 보태, 같이 걷는 길 친구가 있으니 기쁨은 배가 되고도 남는다.

20km 이상 걸을 예정이었지만 언제 눈이 쏟아질지 모르는 상황이라면 무리를 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2시 반까지 걸었고, 커다란 소나무가 홀로 서 있는 지점에서 원점회귀를 하기 위해 돌아가기로 했다. 하늘이 잿빛으로 잔뜩 흐린 것이 함박눈이 펄펄 쏟아질 징조로 보였지만, 우리가 그곳을 떠날 때까지 큰 눈은 내리지 않았다.

완만한 오르막이라 오를 때 헉헉거렸던 길은 돌아갈 때는 내리막길이 되어 발걸음을 재촉했다. 덕분에 걷는 속도가 빨라졌다. 출발지였던 어론 마을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4시경. 걸은 거리는 15km도 채 되지 않을 것이나, 눈길을 걸은 탓인지 허벅지가 묵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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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도보여행, #강원도, #인제, #어론 임도, #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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