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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4일,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로 궁지에 몰린 벤 알리 튀니지 대통령은 군에 시위대 진압을 명했다. 그러나 튀니지군은 시민에 대한 발포를 거부했고, 바로 그날 벤 알리는 외국으로 달아났다. (관련 기사 : 튀니지 '재스민 혁명'과 4월혁명은 닮았다)

 

1월 25일, 이웃나라 튀니지의 '재스민 혁명'에 영향 받은 이집트 시민들이 무바라크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를 시작했다. 시민들은 30일(현지 시각)까지 엿새 동안 시위를 이어가며 30년 동안 이집트를 통치해온 무바라크 대통령을 곤혹스럽게 하고 있다.

 

이집트 시민들도 튀니지 '재스민 혁명'과 같은 짜릿한 승리를 거둘 것인지 국제 사회의 관심을 모으고 있는 가운데, 이집트군의 행보가 주목받고 있다. 군이 시민에게 충성할 것인지, 아니면 독재자 편에 설 것인지에 따라 이집트의 운명이 상당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가디언>, <알 자지라> 등 외신을 종합하면 현재 이집트 수도 카이로 곳곳에 탱크와 장갑차를 갖춘 군 병력이 배치돼 있다. 시위대 규모가 점점 커지면서 경찰이 거리에 대한 통제권을 잃은 후, 군은 주요 시설을 지켜왔다.

 

경찰이 일상화된 부패와 강경 진압으로 시민의 원성을 산 것과 달리, 군은 이집트인들에게 평판이 좋은 편이다. 카이로 시내에 배치된 군이 시위대와 크게 충돌했다는 소식도 없다. 오히려 탱크에 무바라크를 비판하는 그라피티(벽 등에 스프레이 페인트를 뿌리거나 긁어서 그리는 그림)가 그려지고, 시위대가 탱크에 올라가 무바라크 퇴진 구호를 외치는 등의 모습이 포착됐다.

 

또한 정부가 선포한 통행 금지 조치를 시위대가 어겼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를 이유로 군이 시위 참가자들을 연행하지는 않았다. 다만 치안이 불안해지면서 일부에서 나타나고 있는 약탈에 참여한 이들을 군이 연행한 사례는 전해지고 있다.

 

이처럼 군은 아직까지 시위대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이는 얼마 전 튀니지에서 나타났던 모습과 유사하다. 그러나 군이 시위대 편에 선 것은 아니다. 경찰이 시위대를 유혈 진압할 때, 군은 이를 지켜보고만 있었다. 또한 시민들이 30일 대규모 시위를 벌이고 있을 때, 그 위에서는 군 헬기와 F16 전투기가 날아다녔다.

 

<가디언>은 이러한 군 헬기와 F16 전투기 비행이 시위대 사이에서 "두려움과 비웃음을 동시에 불러일으켰다"고 보도했다. 또한 이 신문은 "군이 시위대와 대치하기보다는 종종 그들과 친하게 지내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면서도 "군 고위층이 무바라크를 버릴 준비를 하고 있다는 신호는 아직 없다"고 전했다.

 

이와 관련, 이는 시위대를 지지하고 있는 이슬람주의 정치세력인 무슬림형제단을 군이 경계하고 있는 것과 관계돼 있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상황이 이렇게 전개되면서 이집트 정부와 시위대 모두 군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경쟁하는 모양새다.

 

공군 참모총장 출신인 무바라크 대통령은 술레이만 부통령과 탄타위 국방장관을 대동하고 군 지휘소를 방문했다. 이 모습은 국영 TV에 보도됐는데, 외신들은 이를 군이 자신을 확고하게 지지한다는 이미지를 확산하려는 무바라크의 의도가 담긴 행보로 평가했다.

 

이와 달리 무바라크 퇴진을 요구하며 시위대에 합류한 엘바라데이 전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무총장은 30일 "군은 이집트의 일부"라며 무바라크 체제를 떠받쳐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또한 "새로운 정부 구성에 대해 군과 협상하고 싶다"며 "군과 곧 접촉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와 함께 카이로 시내 타흐리르 광장에 집결한 시위대 사이에서 "군은 이집트와 무바라크 중 하나를 택하라"는 요구도 나왔다.

 

이러한 가운데, 무바라크 대통령의 측근인 술레이만 부통령과 탄타위 국방장관이 대통령에게 상황을 진정시키기 위해서는 퇴진이 불가피하다는 의견을 냈다는 보도가 나와 관심을 끌고 있다. 영국 언론 <선데이타임스>가 이집트 정부 소식통을 인용해 보도한 이 내용의 진위는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다.

 

며칠 전까지 정보부 수장을 맡고 있던 술레이만 부통령은 근 20년간 이집트의 안보 및 외교 정책의 민감한 문제들에 깊이 개입했으며, 1995년 에티오피아에서 무바라크 대통령 암살 시도가 있었을 때 무바라크의 목숨을 구한 인물이다.

 

미국, 앞에선 "질서 있는 이행" 뒤에선 '무바라크 이후' 준비?

 

군의 행보와 함께 주목받고 있는 또 한 가지 요소는 미국을 비롯한 열강들의 태도다. 시위가 고조된 후 미국 정부는 "(민주주의를 향한) 질서 있는 이행"을 강조하고 있다. 이집트의 정치 개혁을 지지하지만 폭력 사태가 발생해서는 안 된다는 것. 그러나 30일까지는 무바라크의 퇴진 문제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은 상태다. 과거에 이집트를 다스렸던 영국도 미국과 보조를 맞추고 있다.

 

미국은 이집트가 1979년 이스라엘과 평화협정을 맺고 아랍권 국가 중에서는 최초로 이스라엘을 인정한 후, 이집트를 지원해왔다. 무바라크 정권도 친미 노선을 취하며 이에 화답했다. 그러한 무바라크 정권이 최근 궁지에 몰리면서 미국도 곤혹스러운 상황에 놓였다.

 

그렇지만 미국의 핵심 이해관계는 미국에 우호적인 정부가 계속 이집트에 들어서게 하는 것이다. 미국에 충실했던 무바라크가 아깝긴 하지만, 상황에 따라 무바라크를 버릴 수 있다는 뜻이다. 달리 말하면 이집트 군부와 마찬가지로 무슬림형제단을 비롯한 이슬람주의 세력이 이슬람을 장악하는 것은 미국으로서는 달갑지 않은 일이다. 힐러리 클린턴 미국 국무장관이 "우리는 중동에서 매우 크고 중요한 나라를 급진적인 이데올로기가 통제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나온 말이다. 

 

이와 관련, 사미 에난 육군 참모총장이 군사협력회의 참석 차 워싱턴을 방문했다가 지난 주말에 귀국하고, 탄타위 국방부 장관이 로버트 게이츠 미국 국방부 장관과 30일 장시간 통화한 사실에 주목하는 이들도 있다. 미국이 '무바라크 이후'에 대한 모종의 메시지를 전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가디언>은 "이집트의 다음 단계는 질서 있는 이행을 요구한 미국이 '무바라크를 물러나게 하고 정치 개혁을 허용해야 한다'고 (이집트) 군부를 설득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전망을 내놓았다.

 

또한 미국 신문 <로스앤젤레스타임스>는 미국의 전직 정부 관계자가 "미국 정부는 무바라크를 벼랑으로 내몰고 싶어 하지 않지만, 무바라크의 시대가 끝난 것을 안다"고 말했다며 미국 정부가 '무바라크 이후'를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보도했다.

 

한편 6일간 계속된 민주화 시위 과정에서 사망한 이집트인은 100명이 넘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가디언>은 102명, <알 자지라>는 150명으로 보도).


태그:#이집트, #무바라크, #재스민 혁명, #엘바라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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