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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날학파의 대표적인 학자 페르낭 브로델은 그의 저서 <역사학논고>에서 하나의 문명을 효과적으로 연구하기 위해 문명의 가장 작은 부분까지 세밀하게 살펴야 한다고 언급한 바 있다. 즉, 미시사의 가능성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것이다. 실제로 미시사는 최근 역사학계에서 연구방법론의 하나로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까를로 진즈부르크의 <치즈와 구더기>와 르루아 라뒤리의 <몽타이유> 같은 저서들은 미시사학의 가능성과 미시사학만의 장점을 잘 보여준 서적이라 할 수 있다.

미시사의 장점은 범위를 축소하고 기존의 거시사에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민중이나 민중문화, 그리고 구술 등을 중요하게 여김으로써 기존의 거시사에서 놓쳤던 혹은 제기하지 않았던 문제들을 살펴볼 수 있다는 것에 있다. 이에 따라 우리학계에서도 최근 지방사나 미시사적 관심들이 커지고 있다. 박찬승의 <마을로 간 한국전쟁>은 이러한 관심을 최대한 읽어낼 수 있는 책이다.

<마을로 간 한국전쟁> 겉그림.
 <마을로 간 한국전쟁> 겉그림.
ⓒ 돌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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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서문에서 한국전쟁을 거시적 관점에서 뿐 아니라 미시적 관점으로 살필 시기가 왔음을 환기시키고 있다. 실제로 지방사에 관한 저서들을 살펴보면 한국전쟁시기에 지방에 여러 가지 변화가 있었음을 간접적으로 유추할 수 있으나, 그에 대한 직접적인 조사는 행해진 것이 적음을 알 수 있다. 또 저자는 한국전쟁 당시 남북한 군인 사망자의 합이 44만 명, 민간인 사망자의 합이 65만 명으로 민간인 사망자가 군인보다 많았다는 점에 주목한다.

11만 명의 차이, 이 차이가 보여주는 진실은 사실 잔혹한 것이다. 민간인 65만 명의 사망은 사실상 폭격과 같은 민간인을 향한 공격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라 마을에서 일어난 학살에서 발생한 것이므로... 우리가 주지하는 바와 같이 한국전쟁 당시 국군과 인민군의 점령지역이 전세에 따라 휘둘리면서 그곳에서는 여지없이 민간인 학살이 일어났다. 인민군이 점령한 지역에서는 지주나 경찰조직, 경찰의 가족과 같은 이들을 학살했고 국군이 수복한 지역에서는 다시 인민군에게 협조한 사람들을 학살했다. 이 과정에서 마을 간의 갈등이 표출되거나 증폭되었다.

이 책은 진도, 영암, 부여, 당진, 금산 이 다섯 개 지방의 학살과 갈등에 관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어떤 지방에서는 동성(同姓)을 가진 계파끼리 학살을 하기도 하고, 어떤 지방에서는 평민마을과 양반마을끼리 학살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렇게 이어진 학살과 증폭된 갈등은 한국전쟁이 끝난 후에도 여전히 꽤 오랫동안 존재하기도 한다.

저자는 이러한 이야기들을 듣고 수집하여 각 사례별로 정리를 해놓았고, 이 사례들을 정리하자 한국전쟁의 새로운 면모가 수면으로 떠올랐다. 그것은 한국전쟁이 마을의 갈등을 증폭시키고 양산해 마을사람들이 서로가 서로를 죽이도록 유도했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인민군은 점령 당시 그 마을에서 가장 억압받고 핍박받던 이들을 선두에 내세워 마을의 지배층을 학살하게 하거나 마을을 통솔하게 했다. 또 국군은 다시 수복 후 인민군 점령 하에서 가족을 잃거나 모진 핍박을 받은 사람들에게 권력을 주어 사적복수를 자행할 수 있도록 묵인했다. 결국 이는 국가권력이 개인과 마을에게 베푼 모질고 잔혹한 은혜인 것이다.

이처럼 마을사라는 관점에서 보면 한국전쟁은 좌우의 대립도 아니오, 국제전도 아니다. 그저 국가권력이 폭력으로 마을을 지배하고 마을의 공동체를 와해시켜 서로가 서로에게 총을 겨누게 한 모진 폭력이며 공포일 뿐이다.

남북관계가 어느 때보다 경직되어있는 작금의 상황도 그러하다. 그저 연평도 주민들의 관점으로 그리고 남과 북의 주민들의 관점에서 본다면 지금의 상황은 그저 국가가 힘을 과시하기 위해서, 건재함을 알리기 위해서 취하는 줄다리기에 지나지 않고 공포이며 폭력일 뿐이다.

무엇 때문에 북한은 공격을 하고 또 무엇 때문에 우리는 그들에게 경고를 해야 하는가? 또한 이로 인해 빚어지는 사태에서 공포로 혹은 눈물로 지새워야 할 사람들은 누구인가? 누굴 위해서, 그것이 정말 국민을 위한 일인가? 한국전쟁 당시 희생되었다는 군인보다 많은 11만 명이라는 숫자는 다시금 남북정부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한다.

덧붙이는 글 | 블로그에 수정 후 게재 될 겁니다.



마을로 간 한국전쟁 - 한국전쟁기 마을에서 벌어진 작은 전쟁들

박찬승 지음, 돌베개(2010)


태그:#마을로간 한국전쟁, #한국전쟁, #미시사, #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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