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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전통의 명문대 정문 치고는 아주 수수하다.
▲ 홋카이도 대학 정문. 오랜 전통의 명문대 정문 치고는 아주 수수하다.
ⓒ 노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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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잠이 많지 않은 나는 새벽 일찍 눈을 떴다. 귀한 휴가를 맞아 나온 여행. 해 뜬 이후의 시간을 침대에서 보내고 싶지 않았다. 나는 삿포로(札幌)의 새벽 공기를 마시며 홀로 산책을 나섰다. 호텔을 나선 후 일단 삿포로 역으로 갔다. 오늘 이동할 오타루행 열차시간을 확인하고 초콜릿 공장을 가기 위한 지하철역도 사전에 확인했다. 나는 대도시의 빌딩숲이 밀집한 역의 남쪽으로 다시 내려가지 않고 역의 북쪽 출구로 나왔다.

삿포로 역의 북단은 삿포로 역 남쪽과 달리 한적함이 느껴지는 곳이었다. 나는 삿포로 역에서 북서쪽 방향으로 걸어가며 주변의 풍광을 찬찬히 감상했다. 역 주변의 건물들은 내진설계 탓인지 각진 골격이 모두 단단해 보였다. 10분 정도 걸어가자 명문대학의 정문이라고 하기에는 소박한 홋카이도 대학 정문이 보였다.

개천이 흐르는 자연림 숲속 같은, 홋카이도 대학 교정

아침에 둘러보는 홋카이도 대학 교정이 정말 아름답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역시 사방은 마치 자연림 숲속에 들어온 것 마냥 조용했다. 드넓은 숲 안에 드문드문 들어선 단과대 건물들을 보자 비로소 이곳이 대학 캠퍼스임을 느낄 수 있었다. 인간이 만든 나무 숲이지만 나무들에 연륜이 쌓이면서 풍기는 풍광은 자연스러운 자연에 못지 않았다. 나는 대학의 농학부 쪽으로 더 걸어 들어갔다.

과거에 연어가 거슬러왔던 맑은 개천이다.
▲ 사쿠슈코토니천. 과거에 연어가 거슬러왔던 맑은 개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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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 멋진 숲 속에 개천이 졸졸졸 흐르고 있었다. 옛날에는 연어가 거슬러 올라오던 강의 상류였다는 사실이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깨끗한 개천을 보면서 내가 한 대학 안에 들어와 있는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이곳은 시민들이 언제라도 와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편안한 공원이었다. 우리나라 사람들 같으면 벌써 돗자리를 깔고 싶은 충동이 생길 만한 곳이었다. 성격 급한 나도 숲 속의 냇가에서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

시냇물이 졸졸 흐르는 개천의 이름은 사쿠슈코토니(サクシュコトニ)이다. 삿포로 대학을 안내하는 지도에는 이 개천이 강이라고 적혀 있다. 개천이 2004년에 복원되었다고 하니 과거에는 아마도 메말라가던 작은 강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작은 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찬미하는 일본인들의 과장된 의식도 여기에 담겨 있을 것이다. 아무튼 이 물길은 학교를 더욱 공원같은 모습으로 단장하고 있었다. 개천에 연어가 거슬러 올라왔을 당시의 풍광은 현재보다 훨씬 장관이었을 것이다.

시원한 개천 옆으로 중앙 잔디밭이라는 뜻의 주오론(中央ロ-ン)이 넓고 푸르게 펼쳐져 있다. 나는 잔디밭 위 벤치에 앉아 호텔에서부터 이 숲속까지 걸어온 다리를 잠시 쉬게 했다. 잔디밭은 인근 주민들의 훌륭한 휴식처인데 지금은 이른 아침이라 사람들이 많이 눈에 띄지 않는다. 시원한 아침 공기에 기분이 상쾌했다. 나는 대학교 안에 들어와 있는 것이 아니라 아무도 없는 숲 속에 들어와 있었다.

유서 깊은 건물들이 가득한 캠퍼스 안

 재벌이 세워준 건물이지만 백년 동안 잘 보존되어 왔다.
▲ 후루카와 기념강당. 재벌이 세워준 건물이지만 백년 동안 잘 보존되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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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오론을 지나 캠퍼스 조금 더 안으로 들어서자 흰색의 벽면과 녹색의 아름다운 지붕을 가진 건물이 나온다. 건물 앞에는 이 건물이 일본의 국가 등록 문화재라고 되어 있다. 삿포로 농학교는 거친 황무지였던 홋카이도를 개척할 농업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해 일본에서 최초로 지어진 고등농업교육기관이었다. 그래서 캠퍼스 안의 옛 건물들도 홋카이도 내에서 가장 유서가 깊은 건물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백색의 강당 건물 앞에서 학교 직원이 마당을 쓸고 있었다. 1909년에 지어진 이 후루카와 기념강당(古河記念講堂)은 홋카이도 내에서 최초로 지어진 프랑스 르네상스 양식의 건물이다. 후루카와(古河)는 당시 구리광산을 운영하며 큰 돈을 벌었던 재벌이었다. 그는 자신이 운영하던 아시오동산(足尾銅山) 광독 사건으로 일본 내에서 집중적인 여론의 비난을 받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비난을 무마하기 위해 일본 정부에 100만 엔을 기부해 8개동의 건물을 지었는데, 이후 유일하게 남은 건물이 농학부의 임학강당이었던 이 건물이다.

재벌이 남긴 건물이지만 홋카이도 대학은 이 건물을 잘 보존하고 이 학교 건물 안에서 전통을 만들어왔다. 백년이 지난 건물이 아름답게 보이는 것은 건물의 역사만큼이나 후배들이 학교의 명성을 유지하고 빛내 왔기 때문이다. 이 학교는 최근에 한 명예교수가 노벨 화학상을 받을 정도로 학문의 뿌리가 깊다. 이는 홋카이도 대학이 지역 주민의 자랑이자 관광지가 된 이유이기도 하다.

 그는 홋카이도 대학의 의식세계에 영향을 미친 정신적 지주였다.
▲ 클라크 상. 그는 홋카이도 대학의 의식세계에 영향을 미친 정신적 지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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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루카와 기념강당에서 맞은편으로 조금 더 걸어갔다. 이 학교 역사에 가장 큰 이름을 남긴 학자의 흉상이 나왔다. 미국 매사추세츠 주립 농과대학 학장 출신으로 홋카이도 개척사가 홋카이도 대학에 초빙하였던 윌리엄 스미스 클라크(William Smith Clark, 1826∼1886) 박사. 그는 홋카이도 대학의 부학장으로서 10개월간 홋카이도 대학에 머물면서 자연과학과 식물학을 학생들에게 가르쳤다.

아침 햇살을 받기 시작한 이 흉상도 그리 편치 않은 역사를 견뎌 왔다. 홋카이도에 맞는 농업기술 도입에 큰 공헌을 하였던 클라크 박사였지만 태평양전쟁 때는 그가 미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흉상이 수난을 당하게 된다. 흉상이 전쟁에 사용될 공물로 처리되서 전쟁터로 공출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지금 눈앞에 보이는 흉상은 1948년에 복원된 것이다.

클라크 박사는 왜 이 머나먼 일본의 최북단에서 숭앙을 받고 있는 것일까? 몇 개월간 영어로 일본학생들에게 강의만 하였던 그가 이곳에 남기고 간 영향은 무엇일까? 얼마나 많은 일본 학생들이 그의 영어 강의를 알아들었을지 의문이지만 그가 남기고 간 것은 지식이 아니었다. 이 학교에서 백년이 넘는 세월 동안 그를 기리는 것은 그가 학생들의 마음에 용기와 자유를 남기고 떠났기 때문이다.

그는 학교를 떠나면서 "젊은이여, 야망을 가져라(Boys, be ambitious)"라는 고별사를 남겼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이다. 이 격언의 출처는 바로 일본의 홋카이도였다. 홋카이도 대학의 표어로도 정해져 있는 그의 명연설은 일본인들의 의식과 정신세계에 큰 영향을 미쳤고 일제 강점기를 거친 우리나라에도 그의 명언이 그대로 전해지게 되었다. 홋카이도의 자연 속에 사는 일본인들의 의식세계에 그는 강한 영향을 미치고 떠나갔다.

클라크 박사의 흉상에서부터 캠퍼스 안쪽으로 넓은 녹지가 끝도 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이른 아침의 밝은 기운이 나무들 사이로 들어오며 캠퍼스 잔디밭의 녹색과 어울리고 있었다. 아침의 맑은 공기가 폐 속으로 들어오며 나의 마음을 싱그럽게 달랬다. 잔디밭 뒤로는 홋카이도의 역사를 담은 고풍스런 벽돌 건물들이 운치를 풍기고 있었다. 나는 마음 편히 수목 속의 교정을 산책했다.

옛 경성제대 건물과 쌍둥이처럼 닮은 종합박물관

태풍의 영향으로 뿌리가 뽑혀 나갔다.
▲ 나무 그루터기 태풍의 영향으로 뿌리가 뽑혀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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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캠퍼스는 '에르므의 숲(エルムの森)'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다. '에르므'란 느릅나무를 뜻하는 엘름(elm)의 일본식 발음이다. 숲 속, 거대한 느릅나무가 잘려나간 멋진 그루터기가 잔디밭 위에 남아 있었다. 100년 이상을 살아온 거목의 자취였다. 한 거목은 태풍의 바람에 맞은 듯 나무의 윗부분이 꺾여 있고 그 잘린 나무통이 잔디 위에 모셔져 있다. 이 거목들은 아마도 예상치 못했던 태풍의 영향을 받은 것 같다.

나는 조금 더 걸어나갔다. 입구가 아치로 되어있는 3층의 근대 고딕양식 건물이 나온다. 갈색 벽돌건물의 외관이 서울 대학로에 있는 옛 경성제대(서울대) 본관 건물과 쌍둥이처럼 닮아 있다. 홋카이도 대학 종합박물관. 이 박물관은 원래 홋카이도 제국대학의 이학부 본관이었다. 서울의 경성제대 본관이 1931년에 준공되었으니 같은 해에 완공된 홋카이도 제국대학의 건물이 닮아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당시는 우리나라가 치욕적인 일제 강점기 하에 있었고 이 두 건물은 동시대에 지어진 건물이었다.

학교에서 가장 오래된 콘크리트 건물이다.
▲ 홋카이도대학 종합박물관 학교에서 가장 오래된 콘크리트 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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홋카이도 대학 내에서 가장 역사가 오래된 이 철근 콘크리트 건물은 2001년부터 1층과 3층 일부가 박물관 전시실이 되었다. 아치 사이로 보이는 대학 캠퍼스의 풍경이 무척 아름다웠다.

나는 자연사 관련 자료가 많다는 이 박물관이 문을 열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박물관 입구로 들어섰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 종합박물관은 너무 이른 시간이라 아직 문을 열지 않았다. 사람이 지키지 않는 관광지는 모두 들어가 보아야 한다는 것이 내 여행원칙이다. 열려 있는 현관 문을 통해 박물관 1층 안으로 살짝 들어가 보았다. 견고한 건물 바닥과 대리석으로 장식된 계단이 고풍스러움을 풍기고 있었다. 정성스레 보존된 인류 변천사 등의 학술표본을 몰래 둘러보는 것이 너무나 흥미로웠다.

나는 드디어 오늘 홋카이도 대학 기행의 하이라이트를 향해 걸어갔다. 나는 몇 년 전 내 여행의 기억 속에 강렬하게 남아 있는 포플러 가로수 길을 찾아 걸어갔다. 캠퍼스를 관통하는 큰 길을 따라 느릅나무와 은행나무 등의 거목이 심어져 있었다.

가볍게 산책을 즐길 수 있는 정원이다.
▲ 화목원. 가볍게 산책을 즐길 수 있는 정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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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플러 길에 거의 다다르자 그전에는 볼 수 없었던 화목원(花木園)이 눈앞에 나타났다. 운치 있는 작은 길이 마치 작은 오솔길처럼 꾸며진 작은 정원이다. 정원 안에는 꽃과 정원 가꾸기 실습을 위해 정성스레 심어 놓은 식물들이 오솔길과 명확한 경계를 이루며 자라고 있었다. 홋카이도 대학 내에서 아침 산책 코스로는 최고로 손꼽히는 곳이다.

화목원 안에는 일본 구권 5000엔 지폐에 그려진 니또베 이나조(新渡戶稻造)의 흉상이 있다. 일본 최초로 무사의 길을 적은 '무사도'라는 글을 남긴 그는 퀘이커 교도이자 저명한 교육가, 그리고 외교관이었다. 그가 이 숲 속에 남아 있는 것은 바로 이 홋카이도 대학의 자랑스런 동문이기 때문이다. 무심한 흉상 앞으로 젊은 삿포로의 여인이 조깅을 하고 있었다.

일본 아줌마 따라 쇠사슬 넘어 들어간 포플러 숲길

하늘로 곧게 솟은 포플러가 압권이다.
▲ 포플러 가로수길. 하늘로 곧게 솟은 포플러가 압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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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림욕장같은 화목원은 홋카이도 대학의 관광명소인 포플러 가로수 길과 바로 연결되어 있었다. 나는 포플러들을 향해서 다가섰다. 1890년대에 방풍림으로 처음 홋카이도에 심어졌다는 포플러의 거대한 가로수가 눈앞을 막아섰다. 30~40m 높이로 곧게 자란 포플러들이 시원하게 하늘로 솟아 있었다.

그런데 가로수 길 입구는 통나무 문이 막아서고 있었다. 2004년 9월 가을, 제 18호 태풍의 영향으로 절반이나 되는 포플러가 쓰러지고 뿌리가 뽑혀 나갔기 때문이다. 그동안 태풍을 경험해 보지 못한 일본 최북단의 홋카이도였기 때문에 태풍에 대한 대비가 소홀했을 것이다. 서양 대표수종 중의 하나인 포플러는 뿌리가 얕은데 동양에 심어졌다가 동양의 거대한 태풍을 맞고 쓰러져 버렸다. 홋카이도의 자랑이었던 포플러 가로수 길의 피해는 많은 삿포로 시민들을 낙담시켰다.

포플러 가로수 길은 출입금지이지만 내가 포플러 나무를 해칠 일도 없기 때문에 가로수길 안으로 들어가 보기로 했다. 가로수길 산책을 위해 삿포로 역에서 이곳까지 30분을 걸어왔는데 그냥 돌아갈 수는 없었다. 나는 포플러가 아름드리 나무로 자란 300m의 흙길을 걸어보기로 했다.

그때 내 앞으로 검은 개 한 마리를 데리고 산책하는 아주머니 한 분이 나타났다. 아주머니는 나를 보고 씩 웃으며 순식간에 포플러 가로수길 안으로 들어섰다. 가로수길 입구를 막아놓은 철제 사슬 옆의 허술한 공간으로 개와 함께 몸을 끼여서 들어간 것이다. 작은 규칙도 무시하지 않고 잘 지키는 일본 사람들을 여행 중에 많이 보아왔는데 이런 모습은 일본에서는 놀라운 경험이었다. 그래서 나도 그 아주머니를 따라 자연스럽게 쇠사슬을 넘었다.

전국에서 지원을 받아 다시 세워진 어린 나무들이 큰 나무들 사이에 서 있었다. 녹색의 향연이 펼쳐지는 포플러 나무 뒤편으로 넓은 들판과 민가가 있었다. 과거에 내가 둘러보았던 포플러 가로수 길의 운치만큼은 아니었지만 아직도 그 아름다움은 남아 있었다.

맑은 아침공기를 마시러 나온 삿포로 주민이다.
▲ 개와 산책 나온 아주머니. 맑은 아침공기를 마시러 나온 삿포로 주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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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아주머니는 검은 개를 데리고 포플러 가로수 길을 한가하게 산책하고 있었다. 아주머니와 개는 내 앞에서 가까워졌다가 멀어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이 아주머니의 손에는 개의 변을 치우는 봉투가 들려 있었다. 일본인답지 않은 아주머니였지만 변 봉투를 보니 일본인 같다는 생각이 다시 들었다. 나는 함께 금단의 땅을 들어선 아주머니에게 아침 공기가 참 맑다는 인사를 했다.

많은 발걸음으로 지친 나는 발길을 돌려 나오기로 했다. 걸어서 홋카이도대학 전체를 다 둘러보는 것은 무리였다. 숲 속에서 혼자 걸어 나오는 길이 고즈넉했다. 넓고 조용하며 아름다웠다. 많은 주민들이 아침 공기를 마시며 학교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 오마이뉴스에만 송고합니다. 제 블로그인 http://blog.naver.com/prowriter에 지금까지의 추억이 담긴 세계 여행기 약 260편이 있습니다.



태그:#일본여행, #홋카이도, #삿포로, #홋카이도대학, #포플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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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와 외국을 여행하면서 생기는 한 지역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는 지식을 공유하고자 하며, 한 지역에 나타난 사회/문화 현상의 이면을 파헤쳐보고자 기자회원으로 가입합니다. 저는 세계 50개국의 문화유산을 답사하였고, '우리는 지금 베트남/캄보디아/라오스로 간다(민서출판사)'를 출간하였으며, 근무 중인 회사의 사보에 10년 동안 세계기행을 연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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