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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안(西安)역 아침 9시. 기차가 서서히 산베이(陕北)를 향해 출발한다. 산베이는 산시(陕西)성 북부 지방을 이 지역 사람들이 흔히 쓰는 말이다. 산베이 중심에는 바로 옌안(延安)이 자리잡고 있다. 옌안은 중국공산당 홍군(红军)의 2년간의 2만5000리 장정(长征)의 종착지이다. 10여 년 동안 중국공산당 중앙이 있었으니 바로 마오쩌둥의 정치적 고향이라 할 수 있다.

시내를 벗어나면서부터 더욱 설레는 마음이 드는 것은 공산주의자이거나 혁명을 꿈꾸던 시절의 기억이 되살아나기 때문이 아니다. 역사의 현장에 다가간다는 느낌, 카메라 메고 가는 여행자의 기대감이리라. 350km, 4시간 반의 기차 여행, 아침에 출발하는 여행은 늘 맑아서 좋기도 하다. 옌안으로 다가갈수록 차창 밖은 온통 황토 빛깔이다.

기차에서 내려 옌허(延河)가 흐르는 칭량산(清凉山)으로 향했다. 시내 중심을 흐르는 이 하천은 황토고원의 색감을 다 휘감고 돌아서인지 황허(黄河)만큼 누렇다. 강을 바라보며 조금씩 산을 오른다. 강이 흐르는 황토산이라 동굴들이 쉽게 형성돼 있다. 산 속 동굴을 집 삼아 기거하는 야오둥(窑洞)이 곳곳에 흔적을 남기고 있다.

옌안 칭량산 황토 동굴 야오둥에 자리잡은 신화서점
 옌안 칭량산 황토 동굴 야오둥에 자리잡은 신화서점
ⓒ 최종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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옌안 시내 중심의 얕은 산 속 동굴은 바로 중국공산당 옌안 정부의 근거지이기도 했다. 특히 이곳 칭량산은 언론기관지들이 대거 집결했던 곳이다. 신화통신사(新华通讯社), 해방일보사(解放日报社), 신화라디오방송국(新华广播电台) 등이 여기서 탄생했다.

입구를 들어서자마자 '중공중앙당보위원회(中共中央党报委员会) 발행과(发行科)' 표시가 보인다. 그리고 바로 옆에는 1937년 4월 24일 문을 연 신화서점(新华书店)이 있던 야오둥이 있다.

지금은 1만4000여 지점을 지닌, 전 중국에 없는 곳이 없을 정도로 최대의 서점 프랜차이즈이지만 그 시작은 이렇게 황토 동굴 속에서 시작했다. 당보를 발행하고 서점을 운영하면서 정치사상을 선전하고 교육하는 것이 옌안 정부에게는 아주 중요한 일이었던 것이다.

옌안 칭량산의 만불사 패루
 옌안 칭량산의 만불사 패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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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에는 대략 18군데에 야오둥이 있다고 한다. 중국공산당이 오기 전부터 이곳에는 사원들이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만불동(万佛洞)이다.

만불사 안에 있는 이 동굴은 수당(隋唐)시기에 처음 건립됐다고 하는데 이후 수 차례 중건을 거쳤다. 입구에는 하천을 바라보며 3문4기둥3누각(三门四柱三楼) 형태의 돌 패루가 온전히 황토 빛깔을 담고 있다.

보수공사 중이라 안으로 들어가 볼 수 없지만 동굴을 입구 삼아 안에는 불상이 있고 바깥에는 향로가 놓였다. 붉은 현수막을 내걸고 나무들을 이리저리 엮어놓아서 다소 어수선하다.

살짝 안을 들여다보니 한가운데 커다란 불상이 자리잡고 있고 벽에는 자그마한 불상들이 셀 수 없이 많이 새겨져 있다. 옌안 정부 시절에는 이 말 없는 불상 조각들이 그저 홍군들만의 귀찮은 눈요기였으리라. 종교보다 혁명이 더 긴박한 시절이니 말이다.

만불동은 중앙인쇄창(中央印刷厂) 유적지이다. 이 인쇄공장은 장시(江西) 성 루이진(瑞金)에서 성립된 중화소비에트공화국(中华苏维埃共和国) 시절의 서북지사 소속이었는데 대장정으로 옌안에 온 중국공산당이 1937년 1월 칭량산으로 옮겼다. 인쇄공장은 곧 당보위원회가 설립되자마자 주간지인 당보 <해방(解放)>을 발간하게 된다.

홍군 옷을 입고 기념사진을 찍을 수 있다.
 홍군 옷을 입고 기념사진을 찍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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옌안 칭량산에 있는 중국공산당 중앙인쇄창과 절벽에 수 많은 글씨가 새겨진 '시만'
 옌안 칭량산에 있는 중국공산당 중앙인쇄창과 절벽에 수 많은 글씨가 새겨진 '시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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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당 기관지인 <해방일보(解放日报)>를 비롯 <중국공인(中国工人)>, <중국부녀(中国妇女)>, <중국청년(中国青年)>, <중국문화(中国文化)> 등 신문을 발행했다. <삼국연의(三国演义)>, <손자병법(孙子兵法)>, <사마문답(司马问答)>과 같은 중국고전과 <고리키선집(高尔基选集)>, <돈키호테(堂吉诃德)> 같은 외국 소설을 발행했다.

야오둥을 떠난 1948년까지 중앙인쇄창 이름으로 발행한 <해방일보>는 총 2130호에 이른다. 옌안 정부가 홍군은 물론 전 중국의 농민과 지식인을 교양하는데 그 공로가 혁혁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은 비록 그저 돌 비석 하나이고 야오둥은 잠겨 있지만 피 비린내 나는 전쟁터의 후방에서 종이에 용기와 미래를 담아내던 현장의 냄새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옌안 칭량산 황토절벽에 있는 '시만'에 있는 중국 홍군 지도자 예젠잉의 시 '충여우옌안'
 옌안 칭량산 황토절벽에 있는 '시만'에 있는 중국 홍군 지도자 예젠잉의 시 '충여우옌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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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사진을 찍으면 '당시 풍모를 그대로 드러낼 수 있다(尽显当年风采)'는 관광지 상술과는 다르다. 홍군 복장을 입고 중국공농홍군(中國工農紅軍) 담벼락 앞에서 사진 찍는 데 15위엔이다.

중국사람들은 대부분 기념사진 찍는 것에 돈을 아까와 하지 않는다. 중국 아주머니가 막 사진을 찍는데, 총까지 겨눈다. 황토 벽에는 거울까지 하나 놓여 있다.

바로 이곳은 역대 문장가들의 멋진 글자가 구비구비 새겨졌다고 해서 시만(诗湾)이라 한다. 절벽에 글자를 새긴 마애제각(摩崖题刻)이 곳곳에 있는데 계단을 따라 오르면 시중화(诗中画)라는 글자도 인상 깊다. 멋진 글자체로 사방에 새겨진 뜻을 다 살피기는 어려운 일이다.

그러던 중 중국공산당 역사를 답사하는데 어울릴 멋진 비석이 눈에 들어왔다. 바로 홍군의 창설자 중 한 명인 예젠잉(叶剑英)의 충여우옌안(重游延安)이다.

예젠잉은 홍군의 활동근거지이던 옌안의 왕자핑(王家坪)과 양자링(杨家岭)을 떠올리며 회한과 함께 새 시대 건설에 대한 의지를 드러낸 시를 지었다.

옌안 떠난 지 12년, 이제 그 옛날 모습은 아니지만
왕자핑의 양자링 보니, 지나간 흔적 머리 속에 생생하네

그 옛날 야오둥 시절, 토비들 횡포 심했건만
탁월한 산베이의 건아들, 어려운 일마다 재주를 발휘했네.

마을사람들 진심으로 대해주고, 대추와 호박으로 옛 친구 환대하니
당면한 과제가 곧 고향의 일이니, 모두 새 나라 건설에 앞장서 나서자.

옌안을 떠난 지 12년 만에 쓴 7언 율시 형식의 시인데 주더(朱德)와 함께 홍군을 지휘하며 혁명을 이뤄낸 장군의 노회가 가슴에 와 닿는 듯하다. 이 시는 노래로도 만들어져 불렸는데 지금 젊은 세대들이 과연 이 시나 노래를 알는지 모르겠다.

옌안 칭량산에 있는 정자 인위에팅. 아래에 있는 우물에서 두레박으로 물을 길어 올린다.
 옌안 칭량산에 있는 정자 인위에팅. 아래에 있는 우물에서 두레박으로 물을 길어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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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벽을 따라가면 공중에 매달린 듯 서 있는 아담한 정자 인위에팅(印月亭)이 나온다. 달의 흔적이 있다는 이름이니 관망대가 있구나 싶었다. 그런데 정자 안에는 둥근 구멍이 뚫린 위에얼징(月儿井)이라는 우물이 있다.

더 정확하게는 맨 바닥의 우물을 두레박으로 기어 올리는 통로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물을 바라보면 달의 모습이 비친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3층 높이나 되니 이렇게 물을 끌어올려 생활했던 것이다. 절벽을 끼고 야오둥에서 살아가는 삶의 모습이라 하겠다.

산베이 야오둥은 중국 5대 전통 가옥 중 하나이다. 오랜 역사와 수 많은 소수민족들이 함께 살아가는 나라답게 각양 각색의 향토적인 가옥양식이 많다. 베이징 등 화북지방의 장방형의 쓰허위엔(四合院), 광시(广西) 등 남방지방의 대나무와 풀로 엮어 만든 간난식(杆栏式), 윈난 이족(彝族)의 문과 방이 붙어 있고 이층구조로 마치 도장처럼 생긴 이커인(一颗印), 남방으로 이주한 북방 커자(客家) 사람들의 공동체 가옥인 웨이룽우(围龙屋) 등이 대표적이다.

칭량산은 중국공산당이 진주하기 전에는 불교 및 도교 사원이 있던 곳이다. 문 입구의 만불동 외에도 야오둥 안는 미륵동(弥勒洞)과 누워 자고 있는 부처가 있는 수불동(睡佛洞)도 있다.

옌안 칭량산 절벽에 새겨진 시안(是岸). '돌아보면 피안이다'라는 뜻!
 옌안 칭량산 절벽에 새겨진 시안(是岸). '돌아보면 피안이다'라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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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불동을 지나면 벽에 붉은 글씨로 마음 심(心)자가 크게 써있고 그 뒤 절벽에는 시안(是岸)이라 새겨 있다. '고개를 돌리면 피안이다(回头是岸)'라는 말이 있는데 '깨달으면 극락'이란 뜻이니 마음을 다스리면 극락에 이른다는 뜻인가 보다.

산 서쪽으로 선인동(仙人洞)이 자리잡고 있다. 한 노인이 앉아 있는 누각을 보니 봉래각(蓬莱阁)이다. '봉래'란 신선이 산다는 산의 이름이니 누각 이름치고는 도교의 냄새가 잔뜩 묻어난다. 안으로 들어서니 벽에 새겨 있는 봉래선경(蓬莱仙境), 복지동천(福地洞天) 글자만 봐도 신비한 곳이라는 느낌이 든다.

좁은 마당을 사이에 두고 절벽 쪽으로는 자연동굴 야오둥으로 노자동(老子洞)과 노반동(鲁班洞)이 나란히 자리잡고 있다. 노자야 도교를 창시한 철학자이자 사상가인데 노반은 낯설다. 춘추시대 노나라 사람으로 톱(锯), 송곳(钻), 대패(刨子), 삽(铲子) 등 공구를 발명한 건축의 달인이었다고 전해지는 사람이다. 노자의 이름이 이이(李耳)인 것처럼 노반은 성이 공수(公输)이고 이름이 반(般)이다. 노나라 사람 공수반을 일반사람들이 음이 같은 반(班)을 써서 노반이라 하며 숭상하는 것이다.

옌안 칭량산에 있는 도교사원 선인동. 입구인 봉래각(왼쪽)과 노자동(오른쪽위)과 노반동(오른쪽아래)
 옌안 칭량산에 있는 도교사원 선인동. 입구인 봉래각(왼쪽)과 노자동(오른쪽위)과 노반동(오른쪽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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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굴에 만들어진 정면 본당인 팔선동(八仙洞)에는 8명의 신선들이 각양 각색의 모양으로 서 있다. 어두워서 자세히 보이지는 않지만 조각상 8개가 나란히 서 있다. 남자도 있고 여자도 있는데 그 모양들이 흔히 보기 어려운 형상들이고 생경한 느낌이 든다. 아마도 도교문화에 익숙하지 않고 도술을 부리거나 한다는 선입견 때문일지 모른다.

도교에서 말하는 팔선은 모두 도술을 잘 부리거나 악기 연주가 신기하거나 무기 다루는 솜씨가 신비롭거나 한 신선들을 말한다. 한나라, 당나라, 송나라마다 팔선이 서로 달랐는데 명나라 시대 소설가인 오원태(吴元泰)의 <팔선출처동유기(八仙出处东游记)>에 이르러 지금의 팔선으로 정해졌다 한다.

도교적 판타지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동굴 속에 있다고 생각하니 흥미롭다. 일명 '동유기'라 불리는 이 소설은 '서유기'에 비해 훨씬 도교적 소재와 주제를 담았다고 전해진다. 서유기가 지금도 널리 알려진 소설이자 영화나 드라마로 제작돼 방영되듯이 동유기 역시 '팔선'의 캐릭터로 흥미로운 대중문화의 소재이다. 우리는 도교의 영향을 덜 받아서 그다지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중국은 온통 명산마다 도교사원이 많아 자주 접하게 된다.

신선동 마당에서 절벽 위를 바라보니 사각형의 동굴 안에 하얀 천으로 온몸을 가린 조각 상이 자리잡고 있다. 알록달록한 색깔의 장식이 달려서 그런지 더욱 화사해 보인다. 자연동굴을 다듬고 양쪽에 돌기둥을 세웠으니 나름대로 잘 관리하는 신선인 듯싶었다. 그런데 바람에 휘날리는 휘장에 '부처님이 지닌 지혜의 빛이 두루 세상을 비추다'라는 뜻의 불광보조(佛光普照)라는 4글자가 써 있는 게 아닌가. 그렇다면 이는 도교 안에 불교인 것이다.

옌안 칭량산 도교사원 선인동 절벽 동굴에 있는 불교 조각상
 옌안 칭량산 도교사원 선인동 절벽 동굴에 있는 불교 조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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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을 다니다 보면 불교와 도교가 서로 한 공간에 머물고 융합되었던 역사적 흔적이 많다는 것을 느낀다. 종교 교리에 얽매어 서로 경계가 분명한 것보다는 종교를 믿는 사람들의 기구에 더 부합하려는 합리성이 아닐까 싶다. 특히 중원으로 진출한 민족들은 더욱 도교와 불교, 심지어 유교까지도 함께 융합하려는 시도가 많았던 이유 때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신선동을 나와 황허(黄河) 같은 옌허(延河)를 바라보며 산길을 더 오르니 멋진 류리탑(琉璃塔)이 나온다. 명나라 숭정(崇祯) 2년(1629년)에 만든 탑으로 원래 시 동북쪽 탕자핑(唐家坪)에 있던 것을 옮겨온 것이다.

옌안 칭량산에 있는 류리탑. 7층8각 목탑에 류리로 상감된 모습(오른쪽)이다. 3층에는 승천하는 용(왼쪽위), 4층에는 길상동물들, 나머지 층에는 조그만 불상(왼쪽아래)들이 상감돼 있다.
 옌안 칭량산에 있는 류리탑. 7층8각 목탑에 류리로 상감된 모습(오른쪽)이다. 3층에는 승천하는 용(왼쪽위), 4층에는 길상동물들, 나머지 층에는 조그만 불상(왼쪽아래)들이 상감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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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m 칠층 높이의 팔각 목조 탑으로 겉면에는 매 층마다 아름다운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대부분 불상들이 예쁘게 자리잡고 있는데 흥미로운 것은 3층에는 용이 솟구치는 모습(腾龙)이 있으며 4층에는 봉황(凤凰), 기린(麒麟), 사슴(鹿), 천마(天马)와 같은 길상영물이 류리로 상감 돼 있다. 군데군데 오랜 세월의 흔적으로 상감 자욱이 떨어져 나간 것이 오히려 이 탑의 진면목이다.

탑을 몇 바퀴 돌아보고 나니 멀리 서민들이 살아가는 야오둥이 보인다. 아직 옌안 시민들은 동굴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칭량산에서 부처와 신선에게 생사고락을 의지하거나 삶의 고통을 하소연하며 살던 사람들처럼 말이다. 옌안에 왔던 중국공산당 중앙과 홍군은 떠나갔어도 마을을 지키며 변함 없이 살아갈 것이다.

▲ 옌안 칭량산 황토동굴 중국공산당 기관지 발원 본문기사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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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13억과의 대화 www.youyue.co.kr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옌안, #칭량산, #중국공산당, #혁명유적지, #야오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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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발품취재를 통해 중국전문기자및 작가로 활동하며 중국 역사문화, 한류 및 중국대중문화 등 취재. 블로그 <13억과의 대화> 운영, 중국문화 입문서 『13억 인과의 대화』 (2014.7), 중국민중의 항쟁기록 『민,란』 (2015.11)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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