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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농사를 함께 지어준 오리들
 벼농사를 함께 지어준 오리들
ⓒ 조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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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오리의 목을 땄다. 오리의 피는 뜨거웠다. 목에 칼을 밀어 넣는 순간의 그 오묘한 느낌은, 여전히 생생하기만 하다.

오리농법으로 벼농사를 지었다. 이제 열심히 일해 준 오리들과 작별해야 할 순간. 그간 모기, 개미, 바퀴벌레 등은 수없이 죽여 왔다지만 살다 살다 이런 살생은 처음! 어떻게 저 귀여운 눈을 하고 있는 오리를 죽일 수 있단 말인가!

사실, 피할 수 있다면 피하고만 싶었다. 아직도 심장이 '쾅쾅' 뛰고 있는 오리를 죽인다는 건 마치 큰 죄악인 듯 느껴지기도 했다. 허나, 결국 난 오리를 잡았다. "고맙다"란 말을 읊조리며, 이것이 우리 인류가 수 천 수 만 년 간 살아온 자연스런 방식이라 읊조리며.

수없이 많은 죽음으로 빛나는 우리의 '생명'

책 <숨겨진 풍경>. 올해 1월 출간.
 책 <숨겨진 풍경>. 올해 1월 출간.
ⓒ 달팽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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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오리를 잡는 '거사'를 앞두고 여러 날 고뇌에 휩싸였었다. 생명을 죽인다는 것에 대한 무수한 생각이 오갔었다. 그런 고민의 시간 속에서 운 좋게 '죽음과 생명'에 관한 생각 정리에 큰 도움을 주는 책을 만났다.

그 책은 바로 <즐거운 불편>의 저자이자 마이니치 신문의 기자인 후쿠오카 켄세이가 펴낸 <숨겨진 풍경>. 저자는 이렇게 외친다. "셀 수 없이 많은 '죽음'이 있으므로 우리의 '생명'은 빛이 난다"고.

책 <숨겨진 풍경>은 '죽음을 은폐하는 사회에서 생명을 만나다'란 부제를 달고 있다. 저자는 불필요해진 애완동물을 처리하는 처분장과 고기를 만들기 위해 가축을 처리하는 도축장을 취재함으로써 죽음을 은폐하고 있는 우리 현실을 꼬집는다. 

일본에서는 후쿠오카 현에서만도 1년간 처분되는 개·고양이가 3만 마리가 넘는다고 한다. 98년에는 그 수가 전국적으로 64만 마리에 이르렀다고 한다.

대다수의 경우가 새끼 때는 '오냐 오냐, 이쁘다 이쁘다' 키우던 개·고양이가 번거롭고 불필요해지자 유기해버린 경우라고. 이는 비단 일본의 경우만이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유기되는 개·고양이의 숫자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저자는 그런 유기동물들을 처분하는 현장에서 그곳 직원들을 만났다. 매일 수천마리의 개·고양이를 안락사 시키는 그들. 그런 업무에 종사하는 사람들에 대한 차별과 편견은 아주 강하다. 동물애호단체로부터 항의를 받는 것은 물론, 주민들로부터는 혐오시설로 취급받고, 주변 사람들로부터는 '몹쓸 짓'을 한다는 손가락질을 받는다고. 심지어 한 직원은 "우리는 필요악"이라는 자괴적인 말까지 꺼내놓았다.

애완동물 죽이는 사람들이 선이라고?

사실 나도 그 직원들, 그 작업들을 생각하면 거부감이 일었다. '어떻게 인간의 친구인 개·고양이를 그렇게 마구 죽일 수 있나'라며. 그런데 저자는 오히려 그들이 "세상에서 아주 중요한 일"을 하고 있으며 "그건 의심할 여지없는 선(善)"이라고 외친다! 아니, 애완동물들을 죽이는데 선이라고?

저자는 나 같은 사람에게 되묻는다. 처분되는 개·고양이가 그대로 거리에 방치되었다고 생각해보라고. 몇 만의 떠돌이 개·고양이가 거리를 어슬렁 배회하는 모습. 상상만으로도 그 직원들의 일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해내고 있는지 충분히 알 수 있을 거라고.

개고양이들의 '죽음'으로 인해 실현된 안전과 쾌적함을 누리면서, '불쌍해라'라는 말 한 마디 툭 뱉어냄으로써 그 '죽음'은 자신과는 무관하다고 자위하며 마음의 평안을 찾는다. 그런 우리들의 자화상이 눈앞에 떠오른다. (30쪽)
안락사 처분을 몸소 실천하면서 그 현실 속에서 '생명'을 키워가고 있는 사람들과, 현실을 외면한 채 '상냥함' 속에 안주하고 있는 우리들 중, 진정으로 우러러야 할 사람은 과연 어느 쪽일까? (47쪽)

사실 "동물들이 처분되어야 하는 원인은 사람에게 있지 동물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일본에서 시장규모가 8000억 엔에 이르는 애완동물산업(애완동물 숍, 미용실, 호텔, 먹이, 장의사 등)을 계속 존속시키기 위해서는 개·고양이가 대량으로 팔리지 않으면 안 된다. 대량으로 팔리니, 대량으로 버려질 수밖에. 결국 끊임없이 유기동물이 쏟아져 나오는 이유는 바로 사람 탓이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우리 인간사회를 지키기 위해 (유기동물들을) 처분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 마음의 고통을 우리를 대신해서 짊어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사회는 좀 더 자각할 필요가 있다." (55쪽)

다른 사람이 죽인 건데, 먹으면 좀 어때?

저자가 두 번째로 찾은 곳은 닭고기를 얻기 위한 닭 처리장이었다. 이 도축장에선 컨베이어벨트를 따라 매일 2000마리가 넘는 닭의 모가지가 잘려나간다.

도축장의 직원들 또한 유기동물을 처분하는 직원들과 마찬가지로 사회적 멸시를 받고 있었다. 동물을 '무자비하게' 죽이고 있다는 이유로. 도축장의 한 노인 직원은 "이런 더러운 일은 아무도 하고 싶어 하지 않거든"이라며 엷은 미소를 지었다. 저자는 이러한 '죽음 은폐'의 사회에 다시금 반문을 던진다.

사람들은 매일같이 동물의 고기를 먹으면서 '동물을 죽이는 것은 잔혹한 행위'라고 생각하고, 그 일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들을 혐오의 눈길로 바라본다. 그런 만화 같은 일들이 지금도 버젓이 벌어지고 있다. 그러한 경향은 '동물애호'를 자인하는 사람들이 특히 강하다. 고기를 먹는 사람이 가축을 기르거나 도축해서 고기를 만드는 사람에게서 완전히 분리되어 있어, 그런 일련의 행동들을 보지 않아도 되고 생명을 빼앗음으로 인해 느끼게 되는 마음의 고통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 사회구조가 그 희화화된 구조를 뒷받침해주고 있다. (116쪽)

우리는 고기에 의존한 식생활을 영위하고 있으면서도, 그 고기가 어떻게 해서 생산되는지에 대해선 알지 못한다. 고기를 만드는 과정에서 피할 수 없는 동물의 죽음을 애써 외면하려 하고 있다. 마치 고기는 원래부터 고기의 모습으로 거기에 있었던 것처럼. "'살아있는 것을 죽이는 것은 나쁘다'는 단순한 생각과 '하지만 다른 사람이 죽인 것은 아무렇지 않게 먹을 수 있다'는 행동이 어떤 망설임도 없이 동거"하고 있는 것이다.

고기를 만드는 현장이 우리 주변에서 배제되고 은폐되어 온 결과, 우리의 생명이 수많은 동물의 '죽음'에 의해 유지되어오고 있다는 '생명의 연쇄'를 실감하지 못하게 된 지 오래다.(134쪽)

우리 인간은 다른 동물을 죽임으로써 대대로 자손을 이어가며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러하기에 저자에게 "사람이 살기위해 다른 생물의 생명을 죽이는 것은 결코 '살육'"이 아니다. 그는 그런 죽음을 오히려 "자기 안에서 '살게 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내가 죽인 오리도 내 안에 살아있겠지

도축과 애완동물 처분을 바라보는 우리들의 배제와 멸시의 눈빛. 저자는 '고통'과 '죽음'을 외면하려는 우리의 태도에 강한 문제 제기를 하며, 우리 사고의 뿌리를 건드린다.

우리는 고통을 동반하는 행위를 '악'으로 치부하고 주변에서 배제시켜왔다. (…) 고통을 동반하는 '악'으로써 아무리 은폐하려고 해도, 사람이 살기 위해 동물의 생명을 빼앗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은 엄연히 존재한다.
그러므로 사회가 숨겨온 그 장소에는 우리를 대신해 매일같이 동물들의 '죽음'과 직면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죽어가는 동물들에게 자신의 모습을 투영하여 생각함으로써 뼈저린 '고통'을 느낀다. (60-61쪽)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필요악'이라고 했지만, 진짜 '악'은 자신들의 삶이 이런 '죽음'의 현장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들의 땀으로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혹은 알면서도 그 사실은 묵과한 채 그런 행위를 '악'으로 치부하여 무시하고 차별하는 세상이라고 생각합니다. (229쪽)

저자의 문제제기는 한층 더 근원으로 치고 들어간다. "'고통'을 느끼지 않고 동물의 생명을 내키는 대로 낭비할 수 있는 사회"에서는 "타인의 입장에 서서 고통을 느낄 수 있는 상상력까지도 상실한 인간"을 낳고 있다. 또한 "'생명'을 지탱해주는 준엄한 '죽음'"을 은폐하고 '너그러운 마음'만 부각되어온 결과, "사실은 터무니없이 '너그럽지 못하고 가혹한 세상'"이 되고 말았다.

셀 수 없이 많은 '죽음'이 있으므로 우리의 '생명'이 있다. 그리고 사람이 자신의 '생명'을 실감하는 것은 다른 사람의 '죽음'과 직면했을 때다. 그 '죽음'과 생활 속에서 가까이 만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 '생명'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달을 계기를 사람들로부터 빼앗아버린 것은 아닐까?
우리의 '생명'을 지탱해주는 무수히 많은 숭고한 '죽음'을 외면한 채 외치는 '생명의 소중함'이라는 말에, "새빨간 거짓말!"이라고 악다구니라도 쓰고 싶은 충동(…). 우리가 의도적으로 모른 체하고 일상에서 배제하고 있는 '죽음'을 직시하지 않는 이상, '생명'의 의미도 '생명의 소중함'도 알 수 없다. 이 믿음 하나만을 의지 삼아. (19쪽)

'죽음'이 없이는 '생명'이란 있을 수 없다. 수많은 '죽음'이 있으므로 우리의 '생명'은 빛난다. 고통과 죽음을 배제한 채 사고하는 '생명'이란 그 결이 얼마나 얕은 것인지, 고통과 죽음을 직시하고 그를 껴안은 '생명'이란 사고는 얼마나 진솔한 것인지. 오리를 직접 잡으며 품었었던 고뇌들도 이내 천천히, 차분히 가라앉았다. 내가 살아가기 위해 죽인 오리의 목숨은, 내 안에서 계속 살아남아 있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책 <숨겨진 풍경>에는 위 서평에서 언급한 애완동물 처분장 및 가축 도축장 이야기 외에도 자살한 사람들의 유서에 초점을 맞춘 '유서를 읽다' 시리즈도 실려 있다.



숨겨진 풍경 - 죽음을 은폐하는 사회에서 생명을 만나다

후쿠오카 켄세이 지음, 김경인 옮김, 달팽이(2010)


태그:#숨겨진 풍경, #후쿠오카 켄세이, #유기동물, #유기견, #오리농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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