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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천원 인생 / 임지선 외 4명 / 한겨레출판사
 4천원 인생 / 임지선 외 4명 / 한겨레출판사
ⓒ 한겨레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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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가격표

<4천원 인생>, 제목부터 참 그렇다. 우리는 한 사람의 인생을 돈 몇푼어치로 환원시키는 저 말장난 앞에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은가? 인간에겐 저마다 돈으로 값을 매길 수 없는 고귀하고 존엄한 가치가 있다고?

맞는 말이긴 한데, 우리 솔직히 서로 그런 식으로 고상한 척 위선떨지 말자. 딱 까놓고 말해서 우리들은 한 사람의 인생을 "얼마얼마짜리"라고 규정짓는 데 이미 많이 익숙하지 않은가.

억대의 수입을 벌어들이는 누구누구의 성공담들을 거들먹거리며 연봉의 숫자놀음에 자신의 인생 전부를 내걸고, 그것도 모자라 남의 인생에까지 감나라 대추나라 왈가왈부하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읽고 슬퍼할 자격이 없다.

아니, 자격이고 뭐고를 떠나서 일단 돈으로 인생의 가치를 재단할 정도로 천박하게 판단력이 비틀어진 사람이라면, 한순간이나마 울컥할 감수성마저 이미 메말라버린 나무막대기나 다름없겠지만.

책 <4천원 인생>은 2009년 당시 <한겨레 21>의 기자 네 명이 대한민국 노동 현장의 최전선에 뛰어들어 몸으로 겪어낸 경험담을 한 권의 책으로 새롭게 정리한 에세이다. 당시 최저임금이었던 시급 4천 원에서 따온 책 제목이지만 <4천원 인생>이라는 말은 사실 이론에 불과하고, 책에 나오는 현실은 <3천 원 언저리쯤 인생>에 가까웠다.

식당 아줌마가 된 임지선 기자가 '감자탕 노동일기'를, 마트 임시 계약직이 된 안수찬 기자가 '히치하이커 노동일기'를, 가구공장 노동자가 된 전종휘 기자가 '불법 사람 노동일기'를, 그리고 안산 반월공단 조립공이 된 임인택 기자가 '9번 기계 노동일기'를 작성했다.

"언론에서 매일같이 떠들어대는 '노동'이지만, 정작 언론기자 자신들조차 진정 '노동'이 무엇인지 전혀 몰랐다"는 그들의 자기고백은 나에게도 하나의 '불편한 진실'로 다가왔다. 나는 TV에 나오는 결식아동의 모습을 볼 때마다 "불쌍하다, 비극이다, 도와줘야 해"라고 속으로는 말했지만 아주 잠깐이었다.

하룻밤만 자고 나도 내 머릿속의 지우개는 그 비극의 잔상을 모조리 지워 놓는다. 이래놓고 어디가서 관련된 얘기만 나오면 누구 못지않게 일목요연한 논리로 현실의 부조리함을 늘어 놓는다. 이처럼 입으로만 떠들어대는 나 같은 사람들에게 한겨레21 기자들의 <4천원 인생>과 더불어 조지 오웰의 에세이<위건 부두로 가는 길>을 일단 추천하는 바이다.

허름한 시장 분식집에서 오뎅을 잡수시는 각하의 모습
 허름한 시장 분식집에서 오뎅을 잡수시는 각하의 모습
ⓒ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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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정부는 서민정치를 국정기조로 내걸고서 민생의 마음을 직접 이해하겠다고는 하지만, 단순히 시장바닥에서 오뎅 몇 개 먹어본다고 각박한 민생의 현실이 마음 속에 각인되는 건 아니다.

그와 같은 논리라면, 자취생활 2년 간 삼시세끼 저렴한 분식으로 피와 살을 채워온 나는 진작에 테레사 수녀의 계시를 받았어야 한다. 몸이 편하면, 좋은 것만 보이게 마련이다. 배고픔이 두렵지 않은 자에게 세상의 낮은 곳이 이해될 리가 없다.

같은 이유로, 나는 대학의 교수라는 사람들이 점잔빼면서 이 세상에 대해 이야기하는 말도 쉽게 믿지 않는다. 그들의 학문적 전문성, 이론적 탁월함은 분명 인정해야겠지만 그들이 아는 세상은 세상의 전부가 아니다.

무더운 한여름에 에어컨 빵빵하고 엄동설한 한겨울엔 히터있는 연구실에 들어앉아 더위추위 잊고 지내는 사람들이 이 세상의 험난함을 알면 얼마나 알 것인가. 배고프고 술고프면 근처 고급 식당 아무데나 들어가서 학교에서 발급받은 교수카드 긁는 사람들이, 하루종일 뼈 빠지는 고된 노동의 해후로 야밤 포차에 앉아 깡소주에 빈약한 안주를 계산하면서도 오늘 내일의 살림을 걱정하는 못가진 자들의 절박함을 얼마나 알겠냐는 말이다.

우리는 이 세상을 얼마나 알고 있는가

사실 <4천원 인생>에서 노동현장에 직접 뛰어든 네 명의 기자들도 고작 딱 한 달 체험한 게 전부다. 솔직히 뒤늦게 그 사실을 알았던 나는 "애걔, 겨우 한 달? 난 또... 한 오륙개월 푹 담겼다 나온 줄 알았네"하고 김이 빠졌다. 하지만 단정짓기에는 성급하다.

식당 아줌마로 일했던 임지선 기자의 취재 후기<그래서 무엇이 바뀌었냐고요?>를 읽어보자.

"감자탕 노동일기를 쓴 뒤, 그래서 무엇이 바뀌었냐는 질문을 받곤 한다. 그럼 되받아친다. 당신조차 어렴풋이 '뭔가 바뀌어야 한다'고 느끼고 있다는 것이 변화라고. 수많은 사람이 빈곤 노동으로 일생을 보내야 하는 사회구조를 만들어놨다는 점에 있어 우리 모두는 공범이다. 변화의 시작은 현실을 냉정하고 세밀하게 들여다보는 일에서부터 시작된다"(책 중에서)

그렇다. <한겨레21>의 기자 4명의 경험은 분명 길지 않았지만, 그들은 그 체험을 바탕으로 완성한 비망록에 기자로서 동원할 수 있는 저널리즘이라는 최선의 틀을 접목시켰다. 아울러 사회의 낮은 곳을 어떤 형식의 매체보다 세밀하게 비추고 그 정보의 유통을 통해 효과적으로 사회인식 변화의 계기를  이끌어냈다.

이런 점에서 전문성을 참신하게 살린 것은 물론이고 윤리적으로도 극대화된 성과를 이루어낸 모범케이스가 되었다. 그리고 2009년 한국기자협회는 그들에게 한국기자상을 선사함으로써 이 한 편의 뛰어난 리얼리즘에 대한 길고 긴 찬사를 짧고 굵게 대신했다.

어느덧 슬슬 주위의 친구들이 하나 둘 취직 전선에 뛰어들기 시작한다. 그래서인지 술자리만 모였다 하면 하나같이 취직 얘기다. 그 중 한 놈이 술기운이 올랐는지 고래고래 운을 띄운다. 본인보다 공부도 덜 하고 놀기는 더 많이 놀았던 대학 동기 녀석이 자신보다 연봉이 더 높아서 배가 아프단다. 기어이 쐬주 한잔 들이키면서 한탄한다.

녀석의 술잔을 받아들었던 그 때 내 머릿속엔 무언가 불편한 생각이 떠올랐다. 시간이 지나고 생각해보니 그 때 내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지금에야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수입(시급 혹은 연봉)이 낮다고 우리들은 배 한 번 아프고 말지, 이 시간에도 밤늦게까지 공장에서 뼈 빠지게 착취당하는 노동자들은 배가 고플 것이다. 이 문제는 우리에겐 상대적인 시샘꺼리이지만, 그들에겐 절대적인 생존의 문제다. 그들의 힘겨운 인생에 어느정도 공감은 하겠는데, 겪어보지 않은 이상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구나. 그들의 입장을 온전히 이해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상 나는 반쪽짜리 세상, 불완전한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닐까?"

 열심히 일하면 부자된다는 거짓말

이 책의 부제는 '열심히 일해도 가난한 우리 시대의 노동일기'다. '열심히 일해도 가난하다.' 이 명제는 분명 거짓이다. 근데 그건 현실에서의 이야기고, 워킹푸어(빈곤노동층)가 하나의 계층 단위로까지 구분 가능할 정도로 양산된 대한민국이라는 초현실에서 저 명제는 참이 된다.

의무교육 제도가 확립된 이 나라의 학교에선 전 국민에게 버젓이 "베짱이는 굶어 죽고 개미는 행복하다. 그러니까 근면하고 성실하라"고 교육한다. 하지만 그렇게 가르치는 이 나라 교사들은 다 거짓말쟁이들이다. 앞으로 앞으로 자꾸 걸어나가면 온세상 어린이들 다 만나기는 커녕 집 앞 시궁창에 빠지고 만다는 정도의 현실감각 정도만 익히면 이 나라에서는 거짓말이라는 것쯤은 안다.

이젠 이 만화가 대한민국 교과서에 실려야 하는 건 아닐까?
 이젠 이 만화가 대한민국 교과서에 실려야 하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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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서는 이 세상에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더럽지만 명백한 진짜 세상'을 가르쳐야 하는가, 그래도 '상식적으로 어긋나지 않는 거짓세상'을 보여줘야 하는가. 매정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직시하는 위악(僞惡)이냐, 부조리한 현실을 미화해서 포장하는 위선(僞善)이냐. 내 대답은 간단하다. 답 안 나오는 딜레마 집어치우고, 그냥 이 더러운 현실을 고치면 되잖아."

얼마 전 참여연대에서 <최저생계비로 한달나기 희망 UP 캠페인>이라는 일종의 사회적 실험을 실시했다.

모집에 응한 참가자들이 지정된 단칸방에서 4인 가족 기준 법정 최저생계비인 136만 3천 90원에서 개개인에 할당된 돈만 가지고 한 달을 '생존'해내는 것이었다. 실험을 지켜보고 참가자의 후기를 읽고 있자니, 이건 뭐 정상적인 인간의 생활이 아니라 금욕주의 서바이벌 게임을 감상하는 기분이었다.

"우리는 한 달만 버티면 되지만, 실제로 이 조건에서(혹은 더 열악한 조건에서) 매일을 살아가는 분들의 생활이 상상이 가지 않는다"는 참가자들의 소감은 한 편의 환타지소설 감상문에 가까웠다. 이쯤되면, 어쩌다 우리 현실이 이 지경까지 오게 되었나 의문을 품게 된다.

그들의 파이는 누가 가져갔을까?

사실 대한민국에서 노동자의 가난, 착취, 소외, 불행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40년 전으로만 돌아가보자. GDP는 100달러에서 2만 달러로 200배가 커졌다. 이는 곧 우리나라 모든 경제주체 개개인들에게 돌아가는 파이의 절대적인 양이 늘어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200배 늘어난 파이의 웅장함은 실제로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다. 현대기아차가 포드를 제치고 세계 4위 자동차기업으로 도약하고, 삼성이 매분기 최고실적을 쏟아 놓는다.

하지만 기아차 모닝을 생산하는 동희오토의 노동자들은 오늘도 거리로 내몰리고, 삼성에서 반도체를 만들다 백혈병으로 죽어나간 영혼들의 억울함은 보상받지 못한다. 이들에게 돌아가야 할 파이는 도대체 어디로 간 것인가? 그게 허공으로 사라지지만 않았다면, 당연히 누군가 가로챘다는 뜻이다. 이젠 인간적으로 그동안 가로채온 파이 좀 뱉을 때도 되지 않았을까.

양적인 경제성장만 바라보며 국가발전을 칭송해온지 50 여년이 흘렀다. 사실 지금껏 이 나라에서 돈 좀 벌었다면서 자기들끼리 좋다고 샴페인을 터트려온 건 대기업을 비롯한 가진 자들이었으며, 그 잔치는 곧 그들만의 축제였다.

너무나 사실적이어서 더없이 슬픈 책 <4천원 인생>은 운이 나빠서 시급 4천 원밖에 받지 못하는 '불운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혹은 천성이 게을러서 시급을 4천원  이상 받지 못하는 '자격 미달'의 사람들 이야기는 더더욱 아니다.

신자유주의 사회가 양산해 낸 억울한 착취 피해자들을 '재수없는 불행아'와 '게으른 자격미달자'로 둔갑시키는 자본주의 체제 근본의 야만성의 현장을 까발리는 생생한 고발장이다.

말이라는 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말은 단지 그 문제의 소지를 확인시켜줄 뿐이다. 말보다 앞서는 실천의 중요성의 근거가 바로 여기서 나오는 게 아닐까. 그리고 그 행동으로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과정에 있어서 책 <4천원 인생>은 탁월한 지침서이자 훌륭한 안내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4천원 인생 - 열심히 일해도 가난한 우리 시대의 노동일기

안수찬 외 지음, 한겨레출판(2010)


태그:#4천원 인생, #한겨레출판사, #신자유주의, #최저임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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