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하얀리본>의 포스터

영화 <하얀리본>의 포스터 ⓒ ㈜영화사 진진


"어? 이게 뭐야! 끝이야?"

영화 <하얀 리본>의 엔딩 크레딧과 함께 밝아오는 상영관의 조명과 동시에 제 머릿속을 때린 질문이었습니다. 어리둥절한 건 저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제 손목의 시계바늘과 골반의 저릿함은 영화 시작 이후 2시간도 넘게 흘렀다는 걸 알리고 있었지만, 저를 포함한 관객들의 멍때림은 고요히 이어졌습니다. 서로 누구 나가는 사람 없나 두리번거렸죠.

상영관 안내요원이 나가시는 문은 이쪽이라고 외칩니다. 그제서야 영화가 끝났다는 사실을 믿을 수 있었지만, 이해할 수는 없었습니다. 상영 내내 쉽사리 감을 잡을 수 없는 영화였습니다. 저의 영화적 감상과 지식을 총동원해 봤지만, 그 순간에도 눈앞에 흘러가는 영화 관람을 동시에 병행하는 멀티태스킹은 불가능했습니다.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분명 쉽지 않은 영화였구요, 저의 추천으로 이 영화를 함께 관람한 후배의 원망스런 눈초리가 매서웠습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영화인지, 그래서 어쩌자는 건지 감독의 옷소매를 부여잡고 캐물을 기세더군요. 제 옆에서 영화표값 본전 운운하며 불평하는 후배를 간신히 누그러뜨리고, 우린 함께 지나간 영화를 천천히 되짚어나갔습니다. 영화 <하얀 리본>의 상영은 끝났지만, 본격적인 감상은 그 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극장 문을 나선 순간부터 지나간 장면들이 또렷해지는 영화가 있죠. 미카엘 하네케 감독의 영화 <하얀 리본>이 그런 영화더군요. 1913년 독일의 어느 마을, 말을 타던 의사가 누군가 매어놓은 줄에 걸려 부상당하고, 농부의 아내가 썩은 마룻바닥 아래로 추락사하고, 한밤 중 헛간이 불에 타고, 장애를 가진 꼬마의 눈이 도려내지는 사건들이 발생합니다.

영화는 당시 마을의 학교에서 근무하던 교사가 내레이션으로 과거 마을의 모습을 회상하는 방식으로 흘러가는데요. 영화 막바지에 이르러 교사는 마을에서 일어난 일련의 끔찍한 사건들의 용의자로 마을 아이들을 의심합니다.

하지만 영화는 2시간 러닝 타임 내내 서사의 중심을 차지해 오던 이 사건들의 범인을 끝내 알려주지 않은 채 끝나 버리죠. 때문에 대다수 관객들은 "그래서 도대체 범인이 누구라는거야?"하며 의뭉스런 불만을 안고서 상영관을 나섭니다. 하지만 그 질문은 이 영화에서 그다지 중요한 게 아닐 뿐더러, 영화 속 교사의 추리처럼 범인은 (제 생각엔) 사실상 마을 아이들이라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물음이 시작됩니다. 그렇다면, 아이들은 왜 그런 끔찍한 범죄를 저질렀는가?

  1913년 독일의 한적한 마을에서 벌어진 끔찍한 사건들. 그리고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되는 마을의 아이들. 확실한 물증은 없지만, 강력한 심증이 남았다. 그렇게 영화는 끝난다. 더 이상의 증거는 없다. 영화의 열린 결말에 의해 "누가 범인인가?"라는 구태의연한 의심은 사라지고 "아이들은 왜, 어떻게 범죄를 저지르게 되었는가?"는 새로운 의문이 오롯이 솟아난다.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우리는 영화의 처음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1913년 독일의 한적한 마을에서 벌어진 끔찍한 사건들. 그리고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되는 마을의 아이들. 확실한 물증은 없지만, 강력한 심증이 남았다. 그렇게 영화는 끝난다. 더 이상의 증거는 없다. 영화의 열린 결말에 의해 "누가 범인인가?"라는 구태의연한 의심은 사라지고 "아이들은 왜, 어떻게 범죄를 저지르게 되었는가?"는 새로운 의문이 오롯이 솟아난다.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우리는 영화의 처음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 ㈜영화사 진진


1913년 당시 독일(유럽)사회는 산업혁명 이후 점차 계급질서가 몰락하고 농업/수공업 경제구조를 탈피해가며 산업경제질서에 기반한 시민사회로 접어드는 과도기였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의 배경과 같은 한적한 시골지방에는 여전히 중세 봉건적인 공동체 질서가 남아있었나 봅니다.

영화는 남작, 목사, 농민, 의사 각각 네 가정의 내부에서 벌어지는 여러 사건들을 담담하고 차가운 시선으로 그려나가는데요. 이 네 가정은 각각 귀족, 성직자, 농민(농노), 그리고 근대사회와 함께 출현한 새로운 계급인 부르주아지까지, 당시 봉건적 잔재가 남아있던 근대 초기 유럽 시골의 공동체를 구성하던 네 계급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근데 이 네 집안의 공통점이라면, 하나 같이 콩가루 집안이라는 겁니다. 기성세대인 부모와 신진세대인 자녀들간의 대립이 집집마다 끊이질 않죠. 농부의 집에서는, 세상이 너무 불공평하다며 계급적 차별을 비판하는 아들에게 아버지가 뺨따귀를 날립니다. 의사라는 인간은 죽은 아내를 뒤로 하고 옆집 유모와 불륜이나 피우며 자신의 친딸을 성노리개 삼는 변태입니다. 목사의 집안에선 저녁식사 시간을 지키지 않았다고 딸의 종아리를 회초리로 매질하지를 않나, 사춘기가 되어 성기를 만진 아들의 손을 밤새도록 침대에 묶어두질 않나.

여기서 아이들의 아버지인 목사는 하얀색 리본을 아이들의 팔에 완장처럼 채웁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하얀 리본은 순결을 상징한다!"고 말이죠. 본인들 스스로도 믿지 않는 자신들의 윤리규범을 자식들에게 강제를 통해 전수하려는 부모의 세대간 폭력과 그것으로부터 자식들이 느낄법한 살인적인 억압이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이 부분을 보면서 여러가지 생각이 떠오르더군요. '나라면 저런 집안에서 살다가 숨이 막혀서 죽어 버릴지도 몰라.' '그나저나 저 애들은 도대체 저런 걸 보고 뭘 배울까'라는 걱정도 듭니다. 바로 저의 이 걱정이 우려하던 바, 즉 어른들의 악습을 무의식적으로 학습당한 아이들의 변질입니다.

그제서야, 이 마을에서 벌어진 사건들의 범인이 정말 아이들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는데요. 그러나 문제는 이처럼 아이들의 탈선에서 단순하게 끝나지 않습니다. 어른들에 의해 아이들이 학습한 폭력과 악습들은 세대를 거치면서 확대 재생산되기 때문입니다. 이 영화의 시대적 배경이 1913년인 건 우연이 아닙니다.

영화 속의 아이들은 의사를 다치게 하고, 농부의 부인을 살해하고, 장애 아동을 실명시키는 것에서 끝납니다. 하지만 영화 이후 20년이 흐른 뒤의 그 아이들은 자신들의 손으로 히틀러를 당선시키고 파시즘을 탄생시키며 2차 세계대전과 반인류적 죄악의 주체로 거듭나죠. 이 영화의 열린 결말이 더욱 더 섬뜩하게 다가온 건 바로 이 때문이었습니다.

 목사네 집안 풍경. 회초리로 얻어맞은 두 아이는 구석에 처박힌 채, 나머지 아이들은 강압적 제식을 강요당한다. 아버지 목사의 저 역겹게 권위적인 표정을 보라. 그리고나서 억눌린 아이들의 겁에 질린 얼굴을 돌아보라. 따스하고 정다워야 할 가정에서조차 비정상적인 군기를 강요당한 아이들은 노이로제에 걸린다. 그 결과는?

목사네 집안 풍경. 회초리로 얻어맞은 두 아이는 구석에 처박힌 채, 나머지 아이들은 강압적 제식을 강요당한다. 아버지 목사의 저 역겹게 권위적인 표정을 보라. 그리고나서 억눌린 아이들의 겁에 질린 얼굴을 돌아보라. 따스하고 정다워야 할 가정에서조차 비정상적인 군기를 강요당한 아이들은 노이로제에 걸린다. 그 결과는? ⓒ ㈜영화사 진진



  아버지인 목사에 의해 강제로 팔에 하얀 리본이 묶인 소년의 모습. 기성세대의 윤리관을 강압적으로 승계시키는 매개로써 작동하는 기독교 윤리, 그리고 그것을 상징하는 십자가를 주목하라. 이것은 20여년 후 이 소년 앞에 나타날 데자뷰의 한 장면이다. 분노와 슬픔으로 강요받은 십자가와 하얀 리본은 그 속에 폭력을 잉태하였고, 그것들은 머지 않은 미래에 각각 유겐트(卍)와 나치 완장으로 변모할 잠재가능성을 내포한다.

아버지인 목사에 의해 강제로 팔에 하얀 리본이 묶인 소년의 모습. 기성세대의 윤리관을 강압적으로 승계시키는 매개로써 작동하는 기독교 윤리, 그리고 그것을 상징하는 십자가를 주목하라. 이것은 20여년 후 이 소년 앞에 나타날 데자뷰의 한 장면이다. 분노와 슬픔으로 강요받은 십자가와 하얀 리본은 그 속에 폭력을 잉태하였고, 그것들은 머지 않은 미래에 각각 유겐트(卍)와 나치 완장으로 변모할 잠재가능성을 내포한다. ⓒ ㈜영화사 진진


인류 최악의 범죄자라 불리는 히틀러의 독재도 사실은 선출된 권력이었습니다. 당시 세상에서 가장 잘 발달된 민주적 정치시스템을 갖춘 국가에서 왜 나치의 파시즘이 도래한 걸까요.

독일의 정신분석학자 빌헬름 라이히는 그의 저서 <파시즘의 대중심리>에서 말하길, 당시 근대 산업사회의 기계문명과 자본주의 노동소외에 의해 억눌린 대중의 감정과 심리가 방출되지 못하고 정체되어 있는 상태에서 한 순간 충동적으로 분출되어 나온 기형적인 결과가 파시즘이라 분석한 바 있구요. 프랑스의 사회학자 귀스타프 르봉은 저서 <군중심리>를 통해, 여러 각각의 개인들이 '군중(혹은 대중)'이라는 하나의 집합체로 결속될 때 개개인의 저마다 고유한 정체성은 희석되어 사라지고 제3의 새로운 성질을 부여받은 균질한 집단으로 재탄생한다는 이른바 유기체적 결합원리에 의한 파시즘의 탄생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에리히 프롬의 경우엔 그의 저서 <자유로부터의 도피>를 통해, 인간은 스스로의 생물학적 성숙이나 자아실현이 박해당할 때 정신적 위기에 빠지고 결국 파시즘과 같은 자기부정의 권위주의에 빠지게 된다고 주장했죠.

위의 여러 뛰어난 이론들이 파시즘의 태동의 배경과 작동원리를 하나 같이 대중, 집단 단위를 통해 거시적으로 분석했다면, 미카엘 하네케 감독의 영화 <하얀 리본>은 파시즘을 개인 단위에서 통찰하고 규명한 탁월한 미시적 보고서입니다. 그리고 그 보고서의 탐구 대상이자 영화의 주인공은 바로 앞서 말한대로 아이들이 되는 거겠죠.

근데 다른 영화와는 다르게 이 영화에 없는 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이 영화에는 음악이 없고 색깔이 없습니다. 때문에 영화가 굉장히 차가운데요. 특히 목사에게 아이들이 회초리로 종아리를 얻어맞는 장면에서 카메라는 체벌이 이루어지는 방 안이 아니라 방의 바깥에서 방문만 비춘 채, 회초리가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고통을 깨무는 아이들의 신음소리만 나직이 흘립니다.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더 많은 것을 자극하는 미니멀리즘 기법이 인상적입니다. 정말 관객의 숨이 다 막힐 정도죠.

게다가 이렇게 뻣뻣하게 굳어버린 관객의 마음을 잠시나마 녹여줄 음악도 없습니다. 그리고 관객의 긴장 좀 풀어준답시고 카메라는 화창한 태양이 내리쬐는 따스한 하늘을 비추지만, 흑백필름에서 태양빛은 그저 창백한 백색광일 뿐이죠. 영화 상영 도중 서늘하게 굳어버린 마음을 추스리는 방법은 상영관을 나가는 수밖에 없어 보이더군요. 영화 <하얀 리본>은 관객들에게 여러모로 다양한 자극과 새로운 영화적 경험을 선사하는 풍요로운 작품임에 틀림없습니다.

 영화 <하얀 리본>의 마지막 장면. 1층에 자리잡은 어른들과 2층의 모여있는 아이들. 영화의 메시지를 한 컷에 농축해놓은 환상적인 구도가 아닐 수 없다. 기성세대와 아이들을 상하로 배치시킴으로써, 정형화된 세대 간 소통구조를 통해 폭력과 악습이 학습되고 계승되는 알고리즘을 도형적인 구도(앵글)로 담아냈다. 영화평론가 이동진의 표현대로 '살떨리는 완벽주의'의 한 장면이다. 이 섬뜩하도록 치밀한 마지막 장면 속 구도적 섬세함은 이 영화의 완벽함에 마지막 구두점을 찍기에 충분히 아름답다.

영화 <하얀 리본>의 마지막 장면. 1층에 자리잡은 어른들과 2층의 모여있는 아이들. 영화의 메시지를 한 컷에 농축해놓은 환상적인 구도가 아닐 수 없다. 기성세대와 아이들을 상하로 배치시킴으로써, 정형화된 세대 간 소통구조를 통해 폭력과 악습이 학습되고 계승되는 알고리즘을 도형적인 구도(앵글)로 담아냈다. 영화평론가 이동진의 표현대로 '살떨리는 완벽주의'의 한 장면이다. 이 섬뜩하도록 치밀한 마지막 장면 속 구도적 섬세함은 이 영화의 완벽함에 마지막 구두점을 찍기에 충분히 아름답다. ⓒ ㈜영화사 진진


한 편의 영화가 걸작의 반열에 오르는 경우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뛰어난 내용을 평범한 방식으로 전달하거나 혹은 평범한 내용을 뛰어난 방식으로 전달하거나. 이를 달리 표현하면, 내용물(메시지)의 충실함이냐 혹은 그것을 담아내는 그릇의 탁월함이냐겠죠.

영화 <하얀 리본>은 후자에 가까워 보입니다. 그것도 후자 축에서도 대단히 놀라운 작품인데요. 무엇을 이야기할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를 두고 치밀하게 고민한 흔적이 기교적 테크닉으로 영화 곳곳에 고스란히 담겼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실천하는 화술의 영역에 있어서도 미장센과 영상미를 치밀하게 버무려낸 미카엘 하케네 감독의 연출력에 감탄하게 됩니다(앞서 말했듯 이 영화가 괜히 흑백인 게 아닙니다).

그리고 2009년 칸 영화제는, 이 뛰어난 작품 앞에 범작들을 향한 자질구레한 헌사들을 대신하여 마스터피스에 바치는 황금종려상을 선사했습니다. 새로운 영화적 즐거움을 한가득 담고 있는 작품 <하얀 리본>은 그 정도 찬사는 충분히 받을 자격이 있는 새로운 걸작입니다.

하얀 리본 미카엘 하네케 파시즘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