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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고사를 거부하다 해임된 교사를 위해 초등학생들이 학교 정문 앞에서 '선생님을 빼앗지 말아 주세요'라고 적힌 피켓을 들었다. 학생들은 학교측에 피켓을 빼았겼지만 국가인권위는 이 학교 교장에게 학생의 인권을 침해했다며 재발방지를 권고했다. 초등학생들도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기 위해 피켓을 드는 시대. 뿐만 아니라 팬클럽, 스포츠 응원단 등에게 피켓은 분신과도 같은 존재다. '2010 피켓문화' 1탄에서는 대중문화 속에서 '플카', '치어플' 등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는 피켓의 모습을, 2탄에서는 시대의 흐름을 반영하는 피켓의 변천사를 살펴보겠다. [편집자말]
"준석아~ 여기서두 너만보여. 너만볼래 너만볼거야"
"형 저… 어때요^^? 밥 잘해요♡"
"오재원이우승땜에비주얼을버렸다면"
"나는오재원땜에남친을버렸다ㅜ.ㅜ"


지난 12일 서울 잠실야구장에 등장한 피켓들이다. '호헌철폐 독재타도' 등 심각하고 진지했던 70~80년대 운동권만의 전유물이 이제는 발랄함과 독창성으로 무장돼 대중문화 곳곳으로 퍼져 있다. 톡톡 튀는 언어와 개성만점의 피켓은 스타를 향한 팬들의 애정과 관심의 매개체가 되고 있다.

미디어를 의식하는 그라운드의 피켓

야구장에서의 피켓은 미디어를 의식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전광판 화면에 나오는 자신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기꺼이 즐기는 요즘 야구팬들이다.
 야구장에서의 피켓은 미디어를 의식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전광판 화면에 나오는 자신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기꺼이 즐기는 요즘 야구팬들이다.
ⓒ 강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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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손을 거치니 병살이로세, 날아라, 잡아라, 던져라! 손션(두산베어스 손시헌 선수의 약칭)."

지난 12일 두산과 넥센의 경기가 한창인 서울 잠실야구장. 곰 형태의 피켓을 들고 있던 김은정(25)씨는 "두 번째 만들어 본 피켓"이라며 수줍게 웃었다. 김씨는 "손시헌 선수가 병살타를 잘 잡는 장점을 살리기 위한 문구를 생각했다"면서 "(손시헌 선수가) 보시고 열심히 하시라고 만들었다"고 덧붙였다. 옆에 있던 조아라(25)씨는 "매 경기마다 중계 화면만 봐도 워낙 독창적 (피켓) 문구가 많아 재밌다"고 말했다.

뒤편으로 눈을 돌리니, 피켓을 무더기로 가져온 일행이 보였다. 이진희(26)씨는 "못 하는 게 뭐니"라는 문구가 공통적으로 쓰인, 일명 '못 시리즈'라고 피켓을 소개했다. 함께 있던 임정은(31)씨는 "(피켓은) 애정을 가지고 만들어야 한다"며 "(선수들이) 이걸 보고 잘 했으면, 알아봐줬으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지난 12일 잠실야구장에서 만난 피켓들. 일명 '못 시리즈'로 응원하는 선수의 능력을 강조하고 있다.
 지난 12일 잠실야구장에서 만난 피켓들. 일명 '못 시리즈'로 응원하는 선수의 능력을 강조하고 있다.
ⓒ 강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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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켓이 야구장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지난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 한국야구가 우승을 차지한 이후 여성팬들이 급격히 증가하면서부터라는 분석이 많다. 야구장 피켓의 특징은 미디어를 의식할 줄 안다는 것이다. 방송 카메라는 중계 중 늘어지는 순간을 '톡톡' 튀는 피켓으로 잡아내기 시작했다. 어느덧 팬들은 전광판에 잡힌 자신의 모습을 즐기게 됐다.

올해는 각 방송사에서 '오늘의 베스트 피켓상'을 만들어서 기념품을 주기도 한다. 야구를 중계하는 해설자들도 화면에 잡힌 피켓을 보면서 웃음을 참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활력소'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박용숙(59)씨는 "정말 재미있는 문구가 많다"며 "우리 땐 상상도 못했던 건데, 자유롭게 표현하는 걸 보면 보기가 좋다"고 말했다.

"오빠, 나 한번 봐 줘"... 스타를 향한 '플카'

스타를 향한 팬들의 마음은 자기를 바라봐 달라는 의사의 표현이다.
 스타를 향한 팬들의 마음은 자기를 바라봐 달라는 의사의 표현이다.
ⓒ 강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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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돌'이 있는 곳이면  언제나 함께하는 '플카'. 플래카드의 줄임말인 이 플카는 팬들이 스타를 향해 자신을 드러내는 주요한 수단이다.

지난 12일 M.net 방송국의 공개방송 현장에서 방송에 쓰일 플카를 정성스럽게 만들고 있던 팬들을 만날 수 있었다. 이날 '슈퍼스타K'의 1회 우승자인 가수 서인국씨를 보기 위해 경남 진주에서 온 황현숙(53)씨는 "플카는 가수의 기를 세워주기도 하지만 먼저 나를 봐달라는 의미가 크다"며 활짝 웃었다. 단순히 스타에 열광하는 것에서 벗어나 스타가 자신에게 주목할 수 있도록 플카를 제작한다는 것이다. 

공개방송을 기다리던 신인 아이돌 그룹 틴탑의 팬들은 "아이돌이 (플카를) 보고 좋아하려면 하나라도 크게, 꼼꼼하게 만들어야 한다. 아이돌이 (플카를) 보고 나를 볼 수 있게 해야 한다"며 한 목소리를 냈다.

플카의 생명은 발랄함과 독창성으로 스타의 시선을 사로잡는 것이다. 특히 자신의 플카가 스타들의 눈에 확실하게 띄도록 발광다이오드(LED)로 플카를 제작하는 팬들도 많다. 한 개당 비용이 10만원 가까이 들지만 팬들은 '돈' 걱정보다는 '정성'을 걱정하고 있었다.

플카 만드는데 많게는 3일 정도의 시간이 든다는 닉네임 '창조미진'(20)은 "(플카를 만들 때) 굵고 큼직한 글씨가 좋다. 궁서체나 한양해서체, 개봉박두체 등을 많이 쓴다"며 "아이돌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스스로의 만족 때문에 이렇게 정성을 들인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깔끔하게 만들고 하나라도 더 크게 만들고 싶은 것이 팬의 마음"이라며 웃음을 지었다.  

가수 조성모의 팬 김지혜(24)씨는 '개성만점 플카의 문구는 어디서 영감을 얻냐'는 질문에 "(스타의) 사진을 보고 있으면 그냥 떠오른다"며 즐거운 표정을 지었다. 김씨는 또 "조성모는 남자 팬들이 별로 없어서 남팬들을 좋아한다"며 "'형만보면 몹시 흥분', '형 때문에 심장이 쫄깃' 정도는 써야 (조성모씨가) 좋아한다"고 강조했다.

시사만평 뺨치는 e-스포츠의 치어플

만화가에 버금 가는 그림솜씨와 톡톡튀는 언어가 조화되는 치어플. e-스포츠에서도 빠질 수 없는 주요한 요소가 되었다.
▲ e-스포츠 경기장의 치어플 만화가에 버금 가는 그림솜씨와 톡톡튀는 언어가 조화되는 치어플. e-스포츠에서도 빠질 수 없는 주요한 요소가 되었다.
ⓒ 강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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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산업의 성장에 따라 e-스포츠 경기장에도 많은 팬들이 몰린다. e-스포츠 응원단들에게 피켓은 치어플(Cheer placard, 응원 메시지)이라는 이름으로 통한다. 야구장에서의 피켓이 선수를 응원하는 문구 위주라면 e-스포츠의 치어플은 직접 그린 그림에 촌철살인의 문구로 이루어져 있다. 전문 화가 뺨치는 솜씨로 신문의 만평처럼 재치만점의 그림을 그려낸다.

대한항공 스타리그 16강 경기가 벌어진 지난 10일. 치어플을 살펴보기 위해 서울 용산역 I-Park Mall에 있는 e-스포츠 경기장을 찾았다. 팬들은 경기장 입장과 함께 미리 준비된 치어플 보드와 펜을 가져갔다. 그리곤 자리에 앉자마자 자신이 응원하는 선수를 위해 분주하게 치어플을 만들기 시작했다. 특히 팬들은 자신이 응원하는 선수의 특징과 별명을 이용했다.

지루하기 쉬운 경기 초반, 중계 카메라는 팬들의 톡톡 튀고 개성만점인 치어플을 화면에 담아내기 시작했다. '승리하라. 그리고 생존하라'는 단순한 내용에서부터 ''매'날자 '택'도 없네'라는 의미심장한 내용까지, 경기에 나서는 선수를 응원하기 위한 다양한 치어플이 순식간에 만들어졌다.

권소영(19)씨는 "매는 김정우(CJ 엔투스) 선수의 별명인데, 매의 부리로 상대 선수(김택용)의 코를 찍겠다는 응원의 메시지"라며 "김정우 선수가 상대 선수를 제압하는 것을 글보다는 그림으로 나타내야 재밌게 표현될 것 같았다"고 말했다. 

또 권씨는 "치어플을 그리는 데는 잠깐이지만 아이디어를 생각하는 시간은 3시간이나 걸렸다"며 "경기장에 오기 전부터 무엇을 어떻게 표현할지 머리를 싸매고 고민한다"고 덧붙였다.

권씨의 치어플 덕분인지, 이날 경기에서 김정우 선수가 상대 선수를 가볍게 이겼다. 김 선수에게 권씨의 치어플을 보여주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봤다. 김 선수는 "매가 아닌 것 같은데… 닭을 그린 것은 아닌지"라면서도 팬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그러나 김 선수는 경기에 집중하느라 정작 경기장에서는 치어플을 볼 수 없다고 한다. 김 선수는 "경기가 끝난 후에 VOD 동영상을 통해서 팬들의 치어플을 보고 있다"며 "다음 경기에서도 반드시 이길 수 있도록 나에게 힘을 주는 치어플을 기대한다"고 말했다. 김 선수는 또 "나를 응원하는 것은 좋지만 상대 선수를 너무 비하하는 경우도 있다"며 "상대 선수가 기분나쁘지 않게만 해달라"고 당부하기도 했다.

"피켓보다 피켓을 들고 있는 팬들이 아름다워"

플카, 치어플 등 새롭게 진화하는 피켓문화에 대해 원용진 서강대 교수(커뮤니케이션학부)는 "놀 줄 아는 인간형의 등장, 자신을 드러낼 준비가 되어있는 인간형의 등장, 미디어를 충분히 의식할 줄 아는 인간형의 등장"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시대가 빠르게 변하고 미디어가 확장됨에 따라 피켓은 자신을 드러내는 주요한 수단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전문적으로 광고를 제작하는 카피라이터들도 피켓의 장점에 말을 아끼지 않았다. 광고대행사 오리콤의 김귀연 아트디렉터는 "전문적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어설프고 삐뚤빼뚤한 것들이 눈에 보이지만 문구 하나 그림 하나에 정성이 느껴지고 진정성이 보인다"며 "피켓 자체보다도 그것을 들고 응원하는 팬들의 모습이 아름다운 것 아닌가"라고 피켓 문화를 평가했다.

각양각색으로 다양한 현장에서 볼 수 있는 피케 시리즈. 피켓에는 자신을 드러내고 미디어를 의식하는 개방적 인간으로의 모습이 묻어 있다.
▲ 피켓, 플카, 치어플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각양각색으로 다양한 현장에서 볼 수 있는 피케 시리즈. 피켓에는 자신을 드러내고 미디어를 의식하는 개방적 인간으로의 모습이 묻어 있다.
ⓒ 이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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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강민수·이미나 기자는 오마이뉴스 12기 인턴기자 입니다.



태그:#피켓, #플카, #치어플, #야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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