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원에 감사합니다. 국가대표팀 골키퍼 이운재가 워밍업 중 관객들의 성원에 보답하고 있다.

국가대표팀 골키퍼 이운재 ⓒ 조재환


이제 그가 그동안 입고 있던 무거운 옷과 장갑을 벗으려 합니다. 정말 아낌없는 박수로 이제 그가 걷기로 한 홀가분한 발걸음을 축하해야 할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뒤에 서 있기만 해도 골문 앞이 든든했던 문지기 이운재. 이제 그의 몸에는 지난 17년간 입었던 국가대표로서의 무거운 옷이 떨어져나가고 소속팀 수원의 가벼운 날개만 남게 됩니다.

마침 그의 국가대표 은퇴 경기 장소도 '빅 버드'입니다. 그래서 나이지리아와의 평가전(8월 11일 오후 8시 수원월드컵경기장)이 더욱 의미 있게 다가옵니다. 아마도 그의 등 뒤에서 수없이 "이운재!"를 외치던 그랑블루는 그 날 남다른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더 크게 불러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132', 다음 기록은 '343'부터!

K-리그를 포함하여 축구 경기가 열리는 경기장에 일찍 가 보면 선수단의 몸 풀기를 아주 가까이에서 흥미롭게 구경할 수 있습니다. 그 중에서 문지기 역할을 맡은 두 선수는 가장 먼저 경기장에 나와서 몸풀기를 시작합니다. 그만큼 그 자리가 단순히 골문 앞을 지키는 일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감독 입장에서 특별한 일이 벌어지지 않는 한 바꿔줄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을 정도로 외로운 그 자리가 바로 문지기입니다. 이운재는 지금까지 태극 마크를 달고 모두 131경기를 뛰었습니다. 이번 나이지리아와의 평가전에 나오면서 132경기를 끝으로 물러나는 것입니다. 이에 어떤 이들은 묻습니다. 홍명보 올림픽대표팀 감독이 가지고 있는 135경기 기록을 넘어서고 싶지 않느냐는 것이죠.

물론, 기록이라는 것은 깨지기 위해서 존재한다고 하지만 이운재 선수는 지난 6일 있었던 국가대표 은퇴 기념 기자회견 자리에서 "욕심 없습니다"라고 잘라 말했습니다. 과연 그 넉넉한 마음이 느껴지는 대답입니다. 아마도 이런 종류의 욕심이 그의 마음에 넘쳤다면 1994년부터 네 차례의 월드컵을 치르는 동안 그는 주로 벤치에 앉아 있으면서 센추리 클럽에 못 들었을지도 모릅니다.

골잡이들도 그렇지만 축구장에서 가장 마음을 비워야 하는 자리가 바로 골문 앞 문지기입니다. 웬만해서는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빠르게 전개되는 상대 팀의 공격 흐름을 바라보면서 그의 머릿속에 잡생각이 가득하다면 슛이 날아오는 궤적도 잘 느껴지지 않을 뿐더러 몸이 무거워지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이운재 선수는 국가대표로서 132라는 숫자를 남기고 물러나지만 바로 그 곳 빅 버드에서 '343'(K-리그 통산 출장 기록)이라는 숫자부터 계속 헤아려 나갈 것입니다. 어디까지 계속될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그의 장갑과 땀에 젖은 유니폼, 그리고 축구화 속에 새겨질 그 숫자가 K-리그와 수원 블루윙즈의 전설임을 말해줄 것입니다.

11미터의 진정한 승부사

 12일 저녁 서울 상암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축구대표팀의 파라과이 평가전에 앞서 선수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왼쪽 위 시계방향으로) 조용형, 김정우, 이동국, 이정수, 기성용, 이운재, 이영표, 염기훈, 김치우, 이근호, 오범석 선수.

2009년 8월 12일 저녁 서울 상암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축구대표팀의 파라과이 평가전에 앞서 선수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왼쪽 위 시계방향으로) 조용형, 김정우, 이동국, 이정수, 기성용, 이운재, 이영표, 염기훈, 김치우, 이근호, 오범석 선수. ⓒ 권우성


유독 이운재 선수가 기록한 선방의 역사에는 중요한 경기의 승부차기 장면이 많았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아직도 생생한 2002년 6월 22일 광주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2002 한일월드컵 8강 토너먼트 승부차기(한국 5-3 스페인) 순간입니다.

상대 팀 골문은 이번에 남아공 월드컵 트로피를 들어올린 이케르 카시야스가 지켰기 때문에 더 극적인 승부라 아니 할 수 없습니다. 노련한 황선홍 선수(현 부산 아이파크 감독)를 시작으로 당시 우리 선수들은 모조리 골을 성공시켰지만 엄청난 부담을 느낀 스페인의 날개공격수 호아킨은 팀의 네번째 키커로 나와서 이운재에게 막혔습니다. 각도를 줄이며 왼쪽으로 몸을 날린 문지기 이운재의 감각은 실로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그 덕분에 4강 신화를 이룬 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 정도의 장면이었습니다. 그 이후에도 이운재는 대표팀과 소속팀에서 여러 차례 승부차기 신공을 자랑하며 축구팬들에게 든든한 문지기로 자리매김하게 됩니다.

이운재의 이름이 또 한 번 빛나는 장면은 2004년 12월 12일 빅 버드에서 열린 2004 K-리그 챔피언결정전 2차전(수원 vs 포항)입니다. 여기 운명의 외나무다리에서 만난 두 사람은 문지기로서 그 실력의 우열을 가리기 힘들었던 '김병지(현 경남 FC)와 이운재'였습니다. 더구나 포항의 마지막 키커는 꽁지머리 김병지였습니다. 이 명장면은 결국 오른쪽으로 몸을 날려 멋지게 막아낸 이운재의 승리로 끝납니다.

그리고 이운재의 축구 시계는 2007년 7월 22일 벌어진 이란과의 아시안컵 8강 맞대결로 흘러갑니다. 이란 선수들도 이러한 이운재 선수의 승부차기 신공을 익히 알고 있던 터라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나왔겠지만 그 앞에서는 한없이 작아지고 말았습니다. 실제로 이운재 선수는 승부차기에서 상대 팀 주장 마다비키아와 카티비의 슛을 각각 막아내며 4강 진출의 기쁨을 또 한 번 축구팬들에게 선물합니다.

여기에다가 지난 해 11월 8일 성남종합운동장에서 열린 2009 FA(축구협회)컵 결승전 승부차기 승리(수원 4-2 성남) 기록까지 보태면 할말이 더 없을 정도입니다. 성남 수비수 김성환과 전광진의 슛을 몸 날려 막아내는 그 동작은 이제 이운재가 아니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을 들게 만듭니다.

이처럼 국가대표팀과 소속팀 수원 블루윙즈를 오가며 그가 내던지는 몸놀림을 보고 있으면 무아지경에 빠집니다. 11미터밖에 안 되는 정말 가까운 거리에서 상대 골잡이들은 무시무시한 허벅지 근육을 자랑하며 강한 킥을 해댑니다. 그 상황에서 눈 하나 꿈쩍 않고 자신이 땀 흘린 만큼, 자신이 믿는 문지기로서의 감각 만큼 몸을 아끼지 않는 그를 보며 놀라지 않는 사람들은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그 장면처럼 그는 조용한 11미터의 승부사입니다.

당신은 각도를 얼마나 잘 잡습니까?

 지난 7월 아시안컵축구대회 기간 중 숙소를 무단이탈해 폭탄주를 마시는 등 음주로 물의를 일으킨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 4명 중 이운재 선수(오른쪽)와 우성용 선수가 30일 저녁 서울 신문로 축구회관 대회의실에서 사과의 뜻을 밝히고 있다.

지난 2007년 7월 아시안컵축구대회 기간 중 숙소를 무단이탈해 폭탄주를 마시는 등 음주로 물의를 일으킨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 4명 중 이운재 선수(오른쪽)와 우성용 선수가 10월 30일 저녁 서울 신문로 축구회관 대회의실에서 사과의 뜻을 밝히고 있다. ⓒ 권우성

문지기 이운재의 17년 국가대표 생활이 늘 순탄하지만은 않았습니다. 2007년 아시안컵 당시에 음주 뒤풀이 파동을 겪으며 눈물을 훔치던 장면도 많은 이들이 기억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그 시련의 세월이 있었기에 그를 더욱 성숙한 문지기로 자리잡게 했는지도 모릅니다.

지워 버리고 싶은 1년 동안의 국가대표 소집 금지 징계 기간을 그렇게 묵묵히 보내면서 소속팀에서는 놀라운 무패 행진을 기록할 정도로 이운재의 어금니는 더욱 단단하게 단련되었습니다. 그는 국가대표로 다시 돌아와 한층 노련한 경기 운영으로 2010 남아공월드컵 본선에 올라갈 수 있는 든든한 발판을 마련합니다.

2008년 11월 20일 리야드에 있는 킹 파드 스타디움에서 벌어진 월드컵 최종 예선 세 번째 경기입니다. 상대는 '사막의 여우들'이라 불리는 사우디 아라비아였습니다. 우리 선수들은 방문 경기라는 불리한 조건 속에서도 2-0이라는 멋진 승리를 거두는데 그 과정에서 돌아온 이운재의 안정된 경기 운영 능력은 많은 이들을 감동 시키기에 충분했습니다.

특히, 57분에 상대 골잡이와 단 둘이 맞선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서 오히려 나이프 하자지에게 두번째 노란딱지(경고 누적-퇴장)를 안기는 침착한 몸놀림을 자랑했습니다. 문지기가 골문을 박차고 멀리까지 달려나가는 순간에는 그야말로 다른 생각 모두 지워 버리고 상대 골잡이의 발끝과 공의 진행 방향을 응시합니다.

그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각도를 얼마나 제대로 줄일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한 공간 감각이 갖춰지지 않은 문지기라면 골문을 떠나 상대를 위협하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상황에서 이운재 선수는 몸을 내던지면서도 하자지의 민첩한 동작을 완벽하게 읽어냈던 것입니다. 바로 페널티킥을 얻어내기 위한 속임 동작을 알아낸 것입니다. 자신도 몸의 중심을 잃고 쓰러지는 과정에서 보통 문지기로서는 흉내 내기도 힘들 정도로 완벽하게 몸을 피하는 동작으로 오히려 상대 골잡이를 망신시켰습니다. 문지기가 갖춰야 할 또 하나의 덕목인 '절제의 미덕'이 절정을 이루는 순간입니다.

나름대로 유명세를 자랑하던 그에게 지금까지 이런저런 유혹의 손길이 뻗치지 않았을 리 없습니다. 그러나 2007년 음주 뒤풀이 사건 말고는 그의 이름이나 수원 블루윙즈의 이름이 더럽혀진 일은 기억나지 않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겪는 여러가지 상황 앞에서 어떤 각도를 취하는지에 따라 그 평가는 너무도 달라질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그는 그라운드 위에서 뿐만 아니라 그라운드 밖에서도 삶의 각도를 꽤 잘 잡아온 셈입니다. 어떤 위기 상황이 닥치더라도 침착함을 잃지 않고 몸 중심을 낮게 가져가는 그의 자세가 축구장 안팎에서 모두 훌륭한 지킴이가 되고 있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뚱뚱한 문지기? 그의 슈퍼 세이브를 보라

꽤 오랫동안 그의 몸매를 놓고 말들이 많았습니다. 몸을 공중으로 자주 날려야 하는 문지기로서 뚱뚱한 것이 아니냐는 논란 말입니다. 이제 국가대표팀에서 그의 뒤를 이을 정성룡이나 김영광, 소속팀에서 경험을 쌓고 있는 하강진까지 봐도 모두 그보다는 호리호리합니다. 외모로만 보면 그를 비난하는 일부 사람들의 말이 얼핏 옳게 들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축구장에서 골문을 지키는 역할을 맡는 문지기의 몸놀림 전반을 놓고 봤을 때 단순히 체격 조건만 따질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아마 그의 몸매가 정말 경기력에 지장을 줄 정도였다면 그는 벌써 대표 선수는 물론, 수원 블루윙즈의 No. 1 자리를 다른 이들에게 물려주었을 것입니다.

열 명의 필드 플레이어를 지켜보며 이래라 저래라 소리치면서 가장 넓은 시야로 경기 전체를 읽어줄 줄도 알아야 하는 자리가 바로 그 문지기입니다. 그러다가 골이라도 내주게 되면 거의 모든 비난이 그 한 사람에게 쏟아집니다. 그 순간 바닥 위에 쓰러져 절망하고 있는 사람의 마음은 안중에도 없을 것입니다.

이운재 선수는 그런 소리들을 수도 없이 들어오면서도 길이 7.32m, 높이 2.44m의 골문을 든든히 지켜왔고 앞으로도 그 자리에 설 것입니다. 무회전 킥이나 발리슛으로 전해지는 발등의 전율 못지 않게 장갑을 통해 찡하게 전해지는 슈퍼 세이브의 손맛도 꽤 짜릿하다는 것을 많은 이들에게 잘 알려주기 위해서 말입니다.

이운재 수원 블루윙즈 월드컵 문지기 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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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대인고등학교에서 교사로 일합니다. 축구 이야기, 교육 현장의 이야기를 여러분과 나누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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